"구차한 변명 거두고 하나님과 세상 앞에 납작 엎드리자"
"구차한 변명 거두고 하나님과 세상 앞에 납작 엎드리자"
  • 박득훈
  • 승인 2008.02.21 15: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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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득훈 목사, "한국 교회 새롭게 일어나길 바라며"

교회 개혁을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교회 상황은 별로 나아진 바 없는데 같은 소리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도 지치긴 매한가지다. 피곤이 극에 달하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 얼마 안 있어 걷잡을 수 없는 침체에 빠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지쳐 잠든 엘리아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어루만져 주시고 먹을 것을 내미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할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자기 혼자만이 외롭게 교회 개혁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절대 고독의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또 다른 형태의 무서운 교만이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 개혁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종종 주님의 은혜를 절박한 심정으로 붙들게 된다. 한편으론 너무나 힘들고 다른 한편으론 자기 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기도할 때 늘 빼놓지 않는 제목이 생겼다. ‘주님, 제가 은근히 잘난 척 하면서 감사만 하고 회개할 것이 없었던 바리새인이 되는 순간 저는 끝장입니다. 제발 제가 주님께 나아갈 때마다 세리처럼 통절한 회개의 마음을 품게 하소서.’ 주님께선 이런 기도를 참 기뻐하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런 기도를 응답하셔서 은혜를 새롭게 베풀어 주신다.

“세리의 통절함을 품게 하소서”

며칠 전 MBC에서 열린 ‘100분 토론’에 패널로 참여하게 되었다. 주제는 ‘대형 교회 문제점들과 종교인의 과세 문제’였다. 한편으론 한국 교회와 사회를 향해 하고 싶었던 말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방송에 나가기가 참 싫었다. 우선 그 자리가 몹시 부끄러운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세상이 교회를 향해 ‘좀 잘 해볼 수 없겠니? 그 정도밖에 못하겠니?’ 묻는 자리인 것 같았다.

국민들 앞에 불려나가 그런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갑론을박하는 것 자체가 참 슬프게 느껴졌다. 게다가 종교인 과세나 종교법인법 문제에 대하여 내겐 기술적 전문성이 별로 없었다. 피하고 싶은 자리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출연하게 되었다. 방송국에 도착했는데 그날 밤 따라 찬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따뜻한 건물 안에 들어왔는데도 몸은 계속 떨렸다. 추워서 떠는 건지 마음이 떨리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공적으로 밝히기 어려운 조그만 나만의 공간을 찾았다. 거기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저에게 죄와 거짓에 대하여는 예리한 분별력을, 사람에 대하여는 진실한 사랑을, 말할 때는 온유함과 담대함을 주십시오.’ 기도를 마치니 떨림이 없어졌다.

절망 속에 희망이

100분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지나갔다. 중간 중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의 십분의 일도 못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마음을 잘 다스린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저런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방청객과 시청자들은 어떤 결론을 내릴지 자신이 없었다. 그 후 이런저런 반응에 접하면서 죄송함과 감사함이 교차되었다. 가장 죄송했을 때는 한 달에 겨우 60여만 원을 받아가며 시골의 작은 교회를 섬기시는 한 목사님께서 전화를 걸어 ‘그런 자리에는 왜 나간 거예요?’라며 따질 때였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눈물과 땀을 흘려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이들에 대한 존중심을 왜 표현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 자리를 빌려 저의 불찰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깊이 사과하고 싶다.

반면 가장 감사할 때는 한 고등학생과 적지 않은 비기독교인들의 긍정적인 평에 접했을 때였다. 곧 고3 올라간다는 학생은 교회개혁실천연대 게시판에 다음의 글을 남겨 주었다.

“목사님 말씀 중 한국 교회 희망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을 적으면서 더 생각하게 되었지만 전 일부러 그러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희망이 없다면 그 자리에도 나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과 사는 주님이 정하시기에 저는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의인 한 명이면 소돔과 고모라를 살렸듯이 한국 교회도 아직 눈물과 애통하는 맘으로 기도하는 의인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눈물이 흘렀다.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한국 교회 희망의 새 싹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과 교회에 대한 호감과 희망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고 말할 때 참 기뻤다. 안티 기독교 흐름을 막는 길은 그들을 공격하고 교회를 변호하고 방어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우리의 드러난 잘못을 시인하고 통절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변화의 몸부림을 칠 때, 하나님께선 그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움직여주실 것이다. 물론 그래도 반대할 이들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치욕이 아니라 영광이다. 진실로 주님 때문에 오해와 핍박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반응을 검토하면서 기독교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나의 마음을 깊이 파고드는 노래가 있었다. 최명자 씨의 ‘나보다 나를’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 노래를 계속 듣고 있다. 곡조를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가사의 일부를 옮겨보고 싶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네요. / 내 이름 부르시며 십자가 달리셨네요. / 그 은혜 못 이겨 주 앞에 섰으니. / 주 뜻대로 주 위해 살게 하옵소서.’

연약하고 죄 많은 우리를 그리고 한국 교회를 지금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너무나 은혜가 되었다. 우리 이름 부르시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한 없이 흐른다. 정말 나부터 시작해서 우리 한국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 한 분 한 분이 이 은혜 못 이겨 주 앞에 설 수 있게 되길, 그리고 ‘주 뜻대로 주 위해 살게 하옵소서!’ 진실로 기도하며 실천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해진다.

지금은 ‘변명’할 때가 아니라 ‘사죄’할 때다

이제 MBC ‘100분 토론’을 전후해 한국 교회와 관련하여 다시 한 번 내 마음속에 정리된 된 점들을 나누고 싶다. 첫째, 한국 교회는 회개의 시늉을 즉각 중단하고 진정한 회개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 작년 한 해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회개해 보려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회개의 시늉만 했기 때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가나안 땅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밤새 울고는 새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에 하나님은 신앙적인 입장을 취했던 갈렙과 여호수아만 제외하고 20세 이상의 성인은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선고한다.

그제야 정신이 버쩍 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했다고 하면서 이제라도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모세는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두 번 불순종하는 것이기에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만류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고집을 부려 진군하려다 패하고 만다(민 13:26-14:45). 그들은 회개의 시늉만 낸 것이다. 회개의 형식은 갖췄지만 실상은 그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보장을 다시 받아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사울 역시 비슷한 길을 걸어갔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욕심에 사로 잡혀 사울은 좋은 짐승과 아각 왕을 살려둔다. 사울은 처음에는 잡아떼다 사무엘의 도전을 받자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짐승 중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두었다고 둘러댄다. 사무엘이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한다고 단호하게 밝히자 그제야 사울은 자신이 범죄하였다고 시인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회개의 시늉일 뿐이었다. 그의 진정한 관심은 사무엘의 도움을 받아 왕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여 그는 사무엘의 옷이 찢어질 정도로 붙들며 자신을 백성들 앞에 높여 자신과 함께 돌아가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한다(삼상 15장).

한국 교회가 작년 한 해 동안 한 일은 바로 이러한 회개의 시늉이었다. 인적·물적 자원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대형 집회들을 열어 큰 소리로 잘못했다고 외쳤다. 그러나 진짜 관심은 회개의 열매를 맺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의 위상과 세력을 회복하는 데 있었을 뿐이었다. 투명 경영의 압박과 기득권 박탈에 위협을 느낀 교계 지도자들은 선교의 자유, 사적 재산권 확보라는 미명하에 사학법 재개정을 관철시키기 위해 삭발 투쟁을 불사하였다.

대표적 기독교 기업인 이랜드의 비정규직 노동자 박대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프간 피랍 사태를 통해 드러난 한국 교회의 오만함과 무모함에 대하여도 뼈아픈 회개는 하지 않았다. 한국 교회는 여전히 다양한 세속적인 힘을 확보하고 그 힘으로 교회의 영향권을 확대해나가려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대중적 회개 집회를 연들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진정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한국 교회와 목회자의 영향력 회복에 대한 열망을 깨끗이 접어야 할 때이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우리의 구체적인 죄에만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기려 했던 거짓된 신앙, 예수님처럼 사랑의 힘없음보다는 세속적 힘으로 전도하고 선교하려 했던 자세, 이웃 사랑의 실천과 따로 노는 죽은 믿음이 얼마나 뼈 속 깊이 우리 안에 박혀 있는가를 발견하고 통곡해야 한다.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야 한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어떤 징계라도 달게 받겠다는 심정으로 바짝 엎드려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우실 때까진 일어나지도 말아야 한다. 국민들이 손가락질 하면 ‘일부의 잘못 가지고 왜 그러냐’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아선 안 된다. 그냥 ‘잘못 했습니다’고 고백하며 엎드려 사죄해야 한다. 뒤 돌아서며 한없이 울어야 한다. 우리 때문에 주님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음을 한탄하며, 아, 나로부터 시작하여 진정한 회개의 역사가 한국 교회에 일어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라

둘째,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근 MBC TV ‘뉴스 후’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이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는 한 기자가 3억 원을 호가하는 스포츠카인 벤틀리를 타고 다니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자 자기 교회 성도인 벤틀리 자동차 판매 대리점 사장이 선물로 준 것이라고 간단하게 항변한다. 선물로 받은 이상 아무리 호화롭게 살아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논리이다. 세상적인 의미에선 당연히 선물 받은 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우리에게도 스스로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라 하지 않으셨는가? 성도들의 사랑의 선물이라는 것에 기대어 예수님의 정신과 뜻을 거역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회개해야 한다.

또한 곽 목사는 기자가 교회 내부의 잘못된 결정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자 ‘우리 교회 성도들이 바보가 아니야. 자네들보다 똑똑해’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자기기만의 한 예이다. 아무리 세상적 기준으로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카리스마 넘치는 목회자 앞에서 얼마나 무지하고 부패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는가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론 때도 밝혔지만 제임스 루터 애덤스는 액톤 경의 유명한 명제를 뒤집어 ‘무력한 이들(powerlessness)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에드가 Z. 프리덴베르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유약함(weakness)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무기력(impotence)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주장했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목회자의 카리스마에 눌려 무기력해지면 그 마음이 부패하게 된다. 악을 볼 수 있는 분별력을 상실한다. 무서운 악을 용인하고 변호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도덕적 불감증에 빠진다. 한국 교회는 자기기만의 무서운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 하나의 자기기만은 한국 교회의 부패를 인정하고 비판하는 듯 하면서도 실상은 여전히 부패의 길에서 철저히 떠나지 않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는 ‘한국 교회가 귀족화 되었다’, ‘작년 한 해 동안 한국 교회 안에 아무런 회개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탄한 지 2주간이 지난 주일에 십일조를 열심히 하면 반드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설교를 했다. 그런가 하면 그 설교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판자촌에 살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거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말은 모두) 사탄이 하는 거짓말이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자발적 혹은 복음적 가난을 왜곡하면서 사탄의 거짓된 가르침이라는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유하셨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가난한 길을 걸어가셨다. 사랑 때문이지 결코 금욕주의적 사고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고와 삶 때문에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귀족들의 클럽으로 전락되어 온 것이 아닌가? 성경적 역사관과 사회관에 입각해 볼 때, 주님 앞에서 바르게 산 사람일지라도 세상에서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십일조를 제대로 냈지만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 성경 몇 절만을 문자적으로 강조하면서 그들로 신앙적 혼돈과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잔인한 죄를 범해선 안 된다.

세속화 즐기면서 세속화 우려?

셋째, 왜곡된 성(聖) 속(俗) 이원론에 근거한 사제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목회자는 말씀을 잘 가르치고 성도들을 사랑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 지도자로서의 적절한 권위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만이 성직자인양 호도하는 사제주의는 큰 잘못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다시 뒤집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나 세상에서 일하는 성도나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성직자라는 점을 잘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목회자가 세금을 납부하면 다른 근로자와 동등한 존재가 되어 결국 교회가 세속화된다고 우려하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이다. 이는 시계를 거꾸로 돌려 종교개혁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말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세속화는 다른 데 있다. 목회자들이 성직자임을 빙자하여 물질적 풍요와 각종 권력을 누리고 싶어 하는 욕망에 빠져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려면 많은 성도들과 그들의 헌금이 필요하니,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값싼 은혜와 기복신앙으로 둔갑시켜 사람들을 교회로 유인하는 것이 무서운 세속화의 핵심이다. 그런 세속화는 오히려 즐기고 있으면서 목회자 세금 납부로 말미암은 세속화를 우려하고 있으니 참으로 심각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비판을 넘어서

마지막으로 교회 개혁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현재 교회 부패상에 대한 비판에만 머물지 않고 스스로 자신과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가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는 교회 개혁 저항 세력이 흔히 내세우는 소위 비판 무용론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비판운동은 비판운동대로 치열하게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건물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을 부수는 것보다 좋은 것을 세우는 일이 훨씬 힘들고 오래 걸린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건강한 자아와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교회개혁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자기 의와 교만에 빠져 스스로 망가지지 않고 은혜롭게 성장해갈 수 있다.

이는 성령 충만을 요한다. 교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야말로 성령 충만을 뜨겁게 사모해야 한다. 성령이 바람처럼 불처럼 임하는 것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교회 개혁의 일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들을 통해 치료책이 없는 상황으로 치닫던 한국 교회가 새롭게 일어서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박득훈 / 한국 언덕교회 담임목사·한국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 이 글은 LA기윤실 소식지에 실린 것입니다. (LA기윤실 홈페이지 www.cemkl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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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지문서 2008-02-23 03:36:32
아멘 아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