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여, 억울하면 세상을 위해 기도하라
교회여, 억울하면 세상을 위해 기도하라
  • 김재일
  • 승인 2008.02.27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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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질타에 맞서 싸우지 말고 자기 여미는 기회로 삼아야

<위트니스>라는 영화는 아미쉬들의 삶을 조금 알 수 있는 영화입니다. 저는 원래 그런 영화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아미쉬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가 얼마 전에 DVD로 우연히 보았습니다.

제가 아미쉬에 대해 공부하고 그들의 삶을 배우려고 하고 있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영성을 따르는데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구나’ 생각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모함에 걸려 아미쉬 마을에 피신한 부크 형사(해리슨 포드)가 전화를 하기 위해서 아미쉬 사람들과 읍내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읍의 젊은이들이 아미쉬 사람들의 마차를 가로 막고, 먹던 아이스크림을 한 아미쉬 젊은이의 얼굴에 바르면서 희롱을 합니다.

아미쉬들의 생활 신조는 철저한 비폭력 무저항이기 때문에 아미쉬 사람들은 꾹 참고 있고, 젊은이들은 더 기고만장하여 희롱의 강도를 더해가는 긴장 상태가 유지됩니다. 이때 아미쉬의 옷을 빌려 입고 있던 해리슨 포드가 주위의 아미쉬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다가가 강력계 형사답게 한방에 격퇴해버립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지켜보는 주변의 한 할아버지가 ‘살다가 별 일을 다 본다’는 표정을 짓는 모습이 나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실제로 아미쉬 사람들이 비폭력 무저항을 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농산물을 팔고 돌아가는 아미쉬 사람들에게 강도 행각을 저지르는 젊은이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장면에서 느낌 감정은 ‘통쾌함’이었습니다. 그들의 핵심 가치인 비폭력 무저항 정신을 머리로는 배우려고 하면서도 잘못된 폭력에는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기 스스로 잘못된 폭력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미쉬가 징병 거부를 하기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없어 보이고, 아미쉬가 끄는 마차가 찻길에서 천천히 가는 바람에 차를 몰기도 어렵고, 그래서 그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아미쉬들이 비폭력 무저항을 삶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삶과 신앙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과 남에게만 성경의 문자주의를 강조하는 기독교 근본주의나 보수주의와는 달리,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갖은 모략과 조롱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것을 그대로 행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주님을 따라서 복수가 아닌 용서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크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순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억울한 일이 생겨도 그것에 저항하거나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그들은 문자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미쉬들의 역사에서 순교와 삶으로 수없이 반복되고 증거되며,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 <아미쉬 그레이스>라는 책에 소개된 ‘피터 밀러의 복수’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밀러가 조지 워싱턴의 캠프에서 도망 나온 ‘허기진’ 탈영병을 돌보고 있을 때, 탈영병은 위트만이 교수형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전해준다. 밀러는 위트만의 교수형을 막기 위해 워싱턴 장군을 만나려고 깊은 눈길을 헤치고 사흘 길을 걸어간다. 워싱턴 장군은 인내를 가지고 밀러의 이야기를 들고 나서는 위트만이 공정한 재판과 정당한 판결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장군은 ‘당신의 친구를 용서해주면 나도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내 친구요?’ 밀러는 대답했다. ‘그는 나의 가장 쓰라린 원수입니다!’

장군은 자기의 원수를 위해 관용을 요청하는 밀러의 간청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은 사면장을 써주고 밀러는 그것을 시간에 맞게 처형장에 제출했다.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아미쉬 교훈-말하기 전에 행동을 먼저하라-과 함께 끝난다. 위트만은 ‘내가 당신을 늘 괴롭혔는데도 어떻게 당신은 나를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며 흐느껴 울었다. 밀러는 아무 말이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외부의 질타에 감사하고 회개하라

MBC의 ‘뉴스후’를 보면서, 그리고 신문에 실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기독교언론회의 성명서 광고를 보면서, 답답하고 안타깝고 우울했습니다. 물론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야 억울함과 변명의 여지와 이유가 어디 없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말처럼 ‘왜 우리만 가지고 그래? 니네는 얼마나 깨끗하냐?’라는 말을 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인이나 조직이 아니라 교회라고 한다면 분명히 그러한 변명과 방법은 적어도 주님께는 통하지 않는 말입니다. 구원은 교회에만 있다고 하면서 그리고 교회만 옳다고 늘 주장하면서, 세속적인 부분은 세상의 기준과 똑같이 하겠다고 한다면 누가 그것을 옳게 보고 좋게 보겠습니까?

지옥과 천국의 구분은 죄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죄를 인정하는 자들이냐 아니면 죄를 인정하지 않느냐, 공을 자기에게 돌리고 잘못에는 핑계를 대느냐 아니면 공은 기억도 못하고 핑계를 대지 않느냐의 차이에서 생깁니다. 작년에 한국 교회는 평양대부흥 100주년이라고 하면서 대각성운동을 벌인다고 했지만, 교회가 하는 대부분의 운동이 늘 그러하듯이 회개조차도 지도자들이 아닌 교인들에게 강요합니다. 교회의 충성을 강요하는 이벤트로 만들어버린 것이 안타깝고도 슬펐습니다.

MBC의 질책과 사회의 질타를 듣지도 않으면서 축복과 번영만을 설교하던 거짓 선지자들과 백성 위에 군림하여 힘으로 다스리는 제사장들, 그리고 그것을 좋게 여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도저히 회개와 회심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이교도인 느브갓네살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치셨듯이,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오늘날 개신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싶어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미쉬들은 타인으로부터 당하는 박해와 모멸과 조롱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받아들입니다. 그러한 핍박과 모멸이 있을수록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고, 그런 후에 그것을 비폭력과 평화 그리고 화해의 방법으로 이겨나가고, 결국 용서의 손을 내밉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MBC의 보도에,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교회에 대한 비난에 혹시 억울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저에게는 그것들의 대부분이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을 계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들의 말과 행실을 살피고 뉘우치면서 자기를 여미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성명서를 내면서 ‘시청 거부 운동’이나 ‘민영화’ 운운하면서 협박할 일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안티 기독교 운동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대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사이트에서와 같이 안티 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고 조롱하고 변증할 것이 아니라, 스데반 집사님처럼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함을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순절을 지나면서, 십자가의 주님을 늘 묵상하면서, 아미쉬 사람들에게서 다시 한번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배웁니다. 그가 근본주의자이든, 보수주의자이든, 복음주의자이든, 진보주의자이든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남이 우리 기독교를 비난할 때, 우리는 그것을 변명하거나 맞서 싸우지도 말고, 또 그와 반대로 같이 돌팔매질하지도 말고, 자기들의 교회와 자리에서 주님의 길을 가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몸부림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재일 / 예장생활협동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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