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목사의 고민은 무엇인가?
이 시대 목사의 고민은 무엇인가?
  • 황병모
  • 승인 2008.03.10 1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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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는 목사의 모습…'소통'에 집중하자

대개 목사들은 과거 남다른 열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식하고 신학교에 입학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각 교단에서 실시하는 고시를 거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 뜨거운 열정 하나로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의 길에 입문한다.

물론 형편이 넉넉하여 시작부터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화려하게 목회를 시작하는 이도 있다. 또 주변에 돕는 분들이 많거나 수단이 좋아서(?), 소위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보란 듯이 출발하는 목사도 있다. 하지만 많은 목회 초년생들은 집 전세금을 개척 자금을 써야 할 정도로 어렵게 목회를 시작한다. 나 역시도 어렵게 목회를 시작했고,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여러 가지 시련을 견뎌야 했다. 

이 시대의 목회자는 많은 현실적 고민을 안고 사역을 하고 있다. 물질과 가족, 자녀 문제 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고민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생기는 고민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러나 나는…"

하나님은 나에게 감동을 주시는데, 나는 세상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은 나에게 들은 대로 말하라고 하시는데, 세상은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에게 회개를 외치라고 말하는데, 세상은 나에게 평안의 복음을 주문하고, 하나님은 나에게 옳은 길, 좁은 길을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길을 가기보다는 편하고 안전한 길을 가려고 한다.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부름 받은 우리가 자신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반목하고 대립하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현실에서 목회하는 목사의 가슴을 짓누르는 고민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날의 교회와 목사 그리고 성도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바라는 모습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스라엘에 큰 지진이 일어나기 2년 전에 남쪽 유다에서 평범하게 양을 치고 있던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는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생업을 청산하고 북이스라엘로 갔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부활을 위해 생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움직였다. 아모스는 남쪽 유다 사람으로서 북이스라엘로 운명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택했다. 나와 같은 목사들은 아모스처럼 정말로 아무런 사심 없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로 가서 이스라엘의 죄를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자기가 보고 들은 말씀을 전하지만 이스라엘은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다메섹·가사·두로·에돔·암몬·유다 등등 남의 나라 이야기를 할 때는 귀를 쫑긋하지만 정작 자기들의 이야기할 때는 귀를 막았다.

그러다가 선지자가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선지자의 입을 막았다. 입을 막아도 또 입을 벌리면 선지자를 때리고 핍박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이스라엘 땅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보게 됐다. 의사소통의 단절은 참으로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모스의 권고를 거부했던 북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권고를 귀담아 듣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과 의사소통하고 있나

이러한 의사소통 단절의 역사는 비단 아모스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역 당시에도 나타났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사사건건 대들고, 시험하고, 비난했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인들이 예수님과 소통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의사소통이 안 되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하면서 예수님에게 핀잔을 주었다. 또 자기들끼리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을 벌였다. 또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머니를 이용하여 예수님에게 은밀한 청탁을 하는 모습 등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전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목사와 성도들이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잘 되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며 찾아왔다.

긍휼히 여겨달라는 그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들어주시면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완치되었다는 확인서를 받은 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라고 말씀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가는 도중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되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 깨끗한 몸으로 회복된 그들은 한결같이 제 갈 길로 갔다. 

그러나 그중 유독 한 사람만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셨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을 향하여 의미심장한, 어쩌면 지금까지 감추어 두셨던 보배와 같은 말씀을 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한국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열 명의 문둥병자가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는 자리에 있는가? 주님의 은혜로 치유를 받고 좋아하면서 이제는 또 다시 제 마음대로 사는 자리에 있는가?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깊이 깨닫고 다시 예수님께 돌아와 무릎을 꿇고 감사하는 자리에 있는가?

이제 우리는 아무런 사심 없이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하는 목사와 성도로 가득 찬 진정한 부흥을 꿈꿀 수 있다.

황병모 / 오산 새소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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