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각이 불여일행(百覺而不如一行)과 교회 개혁
백각이 불여일행(百覺而不如一行)과 교회 개혁
  • 최종운
  • 승인 2008.03.10 17: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번을 깨닫는 것보다 보다 한번 행하는 것이 낫다

백각이 불여일행(百覺而不如一行)이란 말은 백 번을 깨닫는 것보다 한 번 행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실천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느냐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지금 이처럼 안티들의 노골적인 기독교 폄하와 교회에 도전장을 내고 사회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가 이처럼 욕을 얻어먹고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 말만 있고 깨달은 은혜의 간증만 있었지 교회 밖에서 진실된 실천과 행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필자 역시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백 번 보고 깨달았다고 해도

10년, 20년, 30년 교회에 출석하고, 신학대학 교수, 목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면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필자 역시도 그렇습니다. 믿음은 목사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 한국 교회에서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듣는 일이란 쉬운 것 같지만 그리 행하는 현장을 보기란 어렵습니다. 백 번 보고, 깨달았다고 해서 믿음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백 번 듣고, 보고, 깨달은 목사, 장로, 집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목회 현장 ,삶의 현장에 행함이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대형 교회의 브랜드 목사와 부흥사들의 설교는 하나 같이 우리 하나님을 무당들의 저급신으로 이미지 컨셉을 하여 복과 성공 마케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무당들의 덕담, 예언이며 아니면 세련된 성공학, 리더십 강사 역할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무엇으로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을 한 것인지 되돌아봐야

세계 최대의 교회가 있는 우리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은 결국 성공학, 리더십 강사, 무당 목사 마케팅의 승리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속에서 믿음의 측정적 축적은 있었지만 믿음의 질적인 행함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위기와 신뢰를 자초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끼리만 동네 골목에서 소꿉놀이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역할에만 충실하여 교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애써 외면하고 사탄의 소리로 무시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1,200만 명의 성도와 5만 여 교회와 수만 명의 목사가 있지만 한국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 등등 사회 전반의 부패지수가 극에 달하고 국민의 정신은 오로지 돈을 섬기는 유물론의 추종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가 사회의 양심적 심장 역할 즉 엔진 역할을 하게 되는 믿음의 행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들의 잘못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먼저 교회 지도자들이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삭발을 하고 회개를 하여야 합니다. 삭발을 사학법 저지 투쟁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때 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구약의 역사는 지도자들의 불경건함과 불신앙적인 행위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큰 화가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비뚤어진 종교적 욕구 충족을 위한 방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게 되는 구조가 반복되는 것이 구약 성경의 전체적인 사건 전개일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무엇으로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을 한 것인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사학법 개정 저지 운동보다 회개 운동을

지금도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바 미스바 대회개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그로 인해 교회가 살고 민족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부정부패와 투기와 온갖 죄의 목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스바 대회개운동 집회가 이스라엘 나라를 건지는 집회인 것처럼 오늘날 한국 교회도 미스바 집회를 개최하여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미스바로 모이도록 하여야 사무엘과 같은 위대한 목사가 메시지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우리끼리만 은혜 받고 춤추고 할 것이 아니라 전 국민과 함께 회개 운동을 벌여 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럴 때 고질적인 양극화 현상은 봄눈 녹듯 녹아지고 계층 간 갈등과 반목은 사라지고 사도행전적 초대교회의 성령의 불길이 타오를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부정과 비리와 투기로 번 돈을 사도들에게 자발적으로 내어놓아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 나눔과 같은 행함의 은혜가 지금도 재현되어야 한국 교회의 복음의 정체성이 회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어느덧 이익집단과 압력단체화 되어버렸습니다. 선거 때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성명서나 내고, 낡은 기득권 보수의 이익을 위해 삭발투쟁이나 하는 전근대적인 후패한 모습을 보이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언론 방송에서 교회부패의 현상을 지적할 때 협박성명서를 낼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는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범적이고 희생적인 아이디어와 실천하는 복음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탐욕으로 가득 찬 계층에게 탐욕의 사탄적 속성을 일깨워 주고, 소망이 없는 계층에게 소망을 제시하고, 부동산 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공유된 행복을 도둑질해가는 것으로 설교를 하여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곧 세상의 죄악 속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에 따라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실제 행위로는 복음대로 살지 않는 자는 죽은 믿음으로 판단됩니다. 실제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 고생하는 자에게 말로만 사랑을 베풀고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과 행함의 일치를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깨달음에 있습니다. 특히 불교가 그러합니다. 불교는 그러기에 자력 종교라고 합니다.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지만 우리 기독교는 구원을 그저 얻는 타력종교인 탓으로 깨달음에 대한 노력은 불교에 비해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구원의 복음도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율법적 구원론이 되기가 쉽습니다.

복음의 깨달음이 행위로 이어지면 이상적이겠지만 우리로서는 그리 실천하기 어려운 구조적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것은 한 벌만 남겨두고 남에게 주기란 어렵습니다. 오리를 가기도 어려운데 십리를 가기란 불가능합니다. 한 쪽 눈을 남겨두고, 한 쪽 팔을 남겨두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팔을 잘랐다는 소문이나 한 쪽 눈을 파내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실지 한 쪽 팔을 잘라낸 분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우리가 취사선택하고 있는 반 쪽 복음입니다. 온전한 복음을 행하기에는 우리의 믿음이 너무도 역부족입니다. 그런 역부족의 콤플렉스를 삼박자 축복으로, 긍정의 힘으로, 야베스의 기도로, 대형 교회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그저 친목 공간으로 변질하여 복음인 것처럼 포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 복음의 원리대로 삭개오가 한 것처럼 그리 행한다면 평양 대부흥운동은 지금도 가능합니다. 총체적 부패와 비리의 구조가 바뀌어 하나님의 공의가 숨 쉬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간극이 좁혀질 것입니다. 이런 행함의 화두가 한국 교회 앞에 놓여 있음을 자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만 깨닫고 행하여야 할 때입니다. 깨달음과 행함의 일치가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