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행이 불여일성(百行而不如一成)과 교회 개혁
백행이 불여일성(百行而不如一成)과 교회 개혁
  • 최종운
  • 승인 2008.03.10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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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번을 행하는 것보다 한 번 완성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글을 시작으로 시리즈식으로 점층적 논리 전개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필자의 이러한 시도는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단계별 중요성을 한자 단어로 전개하는 데 있습니다. 백행이 불여일성(百行而不如一成) 이란 말은 즉 백 번을 행하여도 한 번 완성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백 번 듣고, 백 번 보고, 백 번 깨닫고, 백 번 행하더라도 한번 완성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영적 연관성이 깊은 말입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가난한자와 고통을 받는 자를 치유하고 유무형의 질병을 고치고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려고 오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일을 다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율법의 완성을 하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적 말씀은 인간을 죄악의 연출로 악순환하게 하는 율법이므로 그러한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온전히 다 이루셨다는 것이지요. 율법의 고통 아래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들을 십자가를 통하여 다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복음을 다시 율법화하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들은 복음이 가져다주는 은혜로운 복된 삶을 풍성히 누리기보다는 또 다시 죄악의 추억을 더듬으며 구약의 율법주의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목회방침이란 신종 율법, 교회헌법이라는 화석적인 율법, 이 세상의 성공, 출세 가치관으로 믿음을 포장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복음의 형질을 변경하고 있는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완성하신 복음을 퇴색하게 하는 불경의 죄를 저지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복음의 핵심적 가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고 행하는 것 보다는 복음대로 한번 행하는 것이 낫다는 말로 이해가 되는 말입니다. 즉 컴퓨터를 작동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작동법만 알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의 프로그램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그대로 행하면 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 환경은 새로운 율법적 요소가 많이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신종 율법을 백 번 지키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한 번이라도 진실 되게 행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겨집니다.

백행이 불여일성(百行而不如一成) 이란 말은 백 번 율법을 지켜도 한 번 이웃을 미워하면 율법을 지킨 게 허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목회 성공해도 한 번 형제를 실족케 하거나 동역자의 어려움을 외면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목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복음의 원리를 우리의 죄성이 가득한 생활구조 속에 얼마나 지혜롭게 할 수 있는지가 목회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행(行)은 소극적 작위라면 성(成)은 적극적인 작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行)이 하위적 카테고리라면 성(成)은 상위적 카테고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행(行)이 율법적 패러다임이라면 성(成)은 복음적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行)이 하위법이라면 성(成)은 상위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위법은 하위법보다 우선합니다.

궁극적 목회 성공이란 세상의 사탄적 요소를 거부하는 것

궁극적 목회 성공이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주는 특혜와 측량적 가시적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달콤함을 얼마나 저항하고 복음이 사탄의 문화를 파괴하는 역동적인 삶의 투쟁을 목회 현장에서 설교하고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살다간 자발적 가난의 실천에 달려 있습니다. 이게 진정 복음의 진수를 의미하는 백행이 불여일성(百行而百行不如一成)이란 의미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면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율법을 그리도 잘 지키는데도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을 완성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셨을까요?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죽은 의문의 허울로 장식하는 율법을 지키는 데만 열심을 내었습니다. 사문화된 껍데기를 지키는 데 즉 외식하는 데 집중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면서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죽일 수 있고, 시기하고 성전에 수종을 드는 시녀와 간음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외식적인 율법은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율법을 개혁하고 완성하려고 하는 에너지에 대해서 태클을 걸고 반대를 하는 집단이 항상 당시의 기득권 지배세력들입니다. 당시의 종교 계급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중세의 종교지도자, 그리고 현재의 귀족 목사들의 행태를 보면 공통분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전술은 항상 하위직을 포섭하는 게 아니라 최상위직을 포섭하면 줄줄이 사탕으로, 고구마 줄기같이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대형 교회와 귀족 목사를 자본주의 꿀물로 포섭하여 교회를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략전술에 이미 유럽 교회와 미국 교회가 넘어가고 한국 교회가 그 뒤를 이어 넘어가고 있습니다.

율법적 주일 성수의 의미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을 지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육체적, 생물학적 위해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살인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물건을 팔고 노동을 하지 않는다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지요. 살인을 하지 않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고 주일 성수한다고 해서 율법적 주일 성수를 지키는 것이 될까요?

사람이 안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작은 예수로 복음의 전도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복음의 전도자는 속박되지 않습니다.

로마서에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아무에게도 사랑 외에는 아무 빚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이라고 하지만 필자도 여기에 대하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재물을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 역시 그러합니다. 허지만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자유케 하는 진리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잘 새겨야 합니다. 진리 안에 있으면 아무것도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거추장스런 방해물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모든 허울을 지나칩니다. 모든 율법과 전통과 하위의식을 간파하고 사랑으로 에워싸는 사랑의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지요. 모든 진리는 죄에서 해방되는 참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게 복음의 권세이지요.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종 율법에 구속되고 목사의 목회 방침에만 순종하고 목사를 우상적 존재로 섬기는 것은 결코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성도들이 왜 목사의 부하가 되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하지 왜 목사의 똘마니가 되어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조폭의 보스의 영향력, 즉 물리적 폭력이 두려워진다면 교회의 보스인 목사의 영적 폭력인 나의 말을 불순종하고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신다는 영적 공갈, 협박이 두려워 교회를 떠나지도 못하고 조직생활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무에게도, 어떤 인간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가 진정 복음의 자유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직접 기도하고 예배하는 민인사제론이 지금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성도들에게는 복음이 주는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단지 지엽적인 조직생활이 주는 기쁨과 극도의 제한된 자유가 있을 뿐입니다.

부뚜막에 있는 소금도 넣어야

‘부뚜막에 있는 소금도 넣어야 짜다’라는 속담은 행동의 중요성을 잘 말 해주고 있습니다. 왜 소금이 생겼으며, 소금은 어떻게 만들며, 소금의 화학분자식을 어떻고, 천일염이니 생소금이니, 죽염이니, 소금이 요리에 사용하는 법과 인체에 작용하는 약리적 기능 등등의 소금 정보를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정작 소금을 음식에 넣어 간을 맞추지 않으면 말짱 꽝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속이 시원해지는 유교적인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 한민족입니다. 역시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수백여 교파가 갈라져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복음으로서의 소금은 집어넣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 입만 살아서 쪼아대기만 하지 복음대로 행하는 데는 소극적입니다.

복음대로 행하면 자본주의 세상의 경제 원리로 구축한 이 세상의 모든 기득권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걸 두려워해서 목사는 굳이 강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대로가 좋사오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적당히 강조하고, 타협해서 목회 성공하는 데만 복음을 적당히 요리하여 하나님 뜻인 냥, 복음인 냥, 개혁 교회인 냥 포장하는 기술만 발달한 것이 지금의 교회 모습이 아닐까요? 

최종운 / 기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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