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기복주의에 푹 빠지다
한국 교회, 기복주의에 푹 빠지다
  • 박철수
  • 승인 2008.05.16 12: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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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오해하는 우리…'기도는 알라딘 램프가 아니다'

   
 
  ▲ 불행하게도 기복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기복주의야말로 가장 타락하고 저속한 기독교다.  
 
"예수 믿으면 잘 된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얼마나 비성경적인 말인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인 사람을 보았는가. 성경 안이나 밖이나 예수 믿고 만사형통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모든 것이 잘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만사형통을 고백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왜 사람들을 욕심쟁이로 만들어버리는가. 성스러운 기도가 어찌 욕심쟁이들의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 기도는 알라딘 램프가 아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피상적이고 즉물적 인간이 되었는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과 구원받은 자로서 생명과 풍성한 인생을 산다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이 세상의 모든 현자들, 그리고 모든 종교적 천재들, 그리고 오늘날 심리학자들까지도 물질과 풍요와 성공은 '행복의 덫'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더 성공을 하고, 큰 차를 사고, 더 큰 집에서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이 한없이 탐욕적이고 야수적인 인간의 이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이 되었다.

지금 어떤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가. 큰 교회, 교인 숫자가 늘어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기복주의를 강조해야 한다. 그런데 그 기복주의란 것이 무엇인가. 성경은 기복주의를 가르친 적이 없다. 기복주의는 구약의 바알이즘이요, 신약에서 맘몬이즘이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지금 미신화, 마술화, 심리화, 인본주의화가 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성공과 선전을 그대로 이루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과 엄연히 다르다.

진리의 신앙이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주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불행한가. 진정한 위로와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너무 철학적이라 생각하는가.
 
성경은 이 유한한 인생, 허망한 인생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비결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이 그런 것이라면 가장 저속한 샤머니즘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필자는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축복의 혁명>(뉴스앤조이)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웬만한 목사님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 풍성한 삶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부자와 성공을 말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 이것이 소위 '소비자 중심 교회'다.

황금 송아지 만드는 한국 교회

이 시대의 영성 지도자인 유진 피터슨은 <그 길을 걸으라>에서 '소비자 중심 교회는 적그리스도다'고 말하고 있다. 찰스 콜슨도 <이것이 교회다>에서 비슷한 말을 한다. '소비자 중심적'인 전형적인 사건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아론의 황금 송아지 사건이다. 아론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다. 작금의 한국 교회 여기저기에서도 황금 송아지 상을 볼 수 있다.

2007년 평양성령강림 100주년 기념행사 설교에서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는 "사대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를 본문으로 '한국 교회는 죽었다'는 요지의 설교를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자신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설교했음을 고백했다. 금년 1월 강변교회에서 열린 목회자 모임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목회자가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 장로와 교인이 걸려 성경이 전하는 말씀을 반 토막 잘라내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영광의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 고난의 메시아로 오셨다. 놀랍게도 지금이나 그때나 영광의 메시아를 찾고 있는 것은 같다. 오늘 한국 교회는 십자가로 돌아가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 1:29)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롬 5:3)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2)

이 시대에 기복주의가 불행하게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필자는 기복주의야말로 가장 타락하고 저속한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기복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의 욕망에 불을 지르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기도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과 교제가 가장 큰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복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목회자들은 기도를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순진한 성도들에게 독약을 먹이는 행동과 다름이 없다. 얼마나 천박한 기독교인가. 그러기에 1,000만 명의 교인을 자랑하지만 이토록 무력한 교회가 되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도덕적 백치들이다. 인문학적 시각에서 도덕적 저능아로 취급 받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 신앙만이 기복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지난 3년 동안 1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긍정의 힘' '적극적 사고방식'을 중시하고 있다. 필자는 그 책이 나오자마자 <축복의 혁명> 개정판에서 그 심각성을 말하였거니와 2007년에는 이동원 목사가, 2008년에는 옥한흠 목사가 이 책의 비기독교성을 지적하였다. 두란노서원은 이 책으로 100억 원 이상의 돈을 벌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버젓이 비기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이 소위 기독교인들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없다

복음서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다. 예수님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으신 십자가다. 이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십자가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분명히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서는 또 하나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자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십자가는 우리가 받을 고난의 십자가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거룩한 십자가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십자가를 알고 복종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자기 십자가 중에 어느 한 가지만 알아서는 안 된다. 두 가지 십자가를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진정한 기복주의에 대한 대안과 제자의 모습이 있다.

미국의 유명한 '윌로우크릭처치'의 빌 하이벨스 목사는 자기 교회 전문가들로 하여금 3년 동안 교회의 상황을 전반적으로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이야기했지만 결론으로 '뭔가 잘못되어 있다. 우리가 실수했다' '숫자로는 성공했지만 예수의 제자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빌 하이벨스에게 보고되었고, 그는 그 내용을 시인했고, 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많은 교인 숫자보다 제자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필요한 시대가. 제자는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능력을 위로부터 덧입어 자기 비움과 자기 부인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혈과 육으로 하나님나라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바울의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은 성화를 향하는 바울의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간절한 기도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와 회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자기 변혁적이고 사회 변혁적인 급진성과 혁명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의 급진성과 혁명성을 잃어버리고 있지 아니한가. 오히려 많은 교회들이 점점 보수화·각질화되는 안타까움을 보고 있지 아니한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롬 12:2)

교회는 이 땅의 모든 가치를 상대화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 물신을 향한 도덕적 집단 투항이 일어나는 이때, 교회는 창조적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공격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로핑크가 쓴 <예수님은 어떤 공동체를 원하셨는가>에서 교회는 이 땅의 빛과 소금과 같은 '대조사회'를 이룸으로써만 '대안세력'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요, 하나님나라의 제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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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 2008-05-25 02:33:37
한 손에는 천국 티켓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세상 복을 쥐고 있는 모습이 세상에 비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 세상의 희망이 되고 해답이 되어야 할 기독교가 오히려 세상의 걱정거리와 조롱거리가 되버린 현실이 마음 아프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말씀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