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를 다녀와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를 다녀와서
  • 구교형
  • 승인 2008.06.24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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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내내 풍기는 조 목사 영향력…그 그늘 벗어나 성숙한 교회 될 때

지난 4월 교회 사역을 사임하고, 매 주일마다 모처럼 자유롭게 평소 가보고 싶었던(?) 교회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 중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이하 여의도교회)가 있었다. 사실 나는 여의도교회와 조용기 목사와 악연(?)을 맺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의도교회를 꼭 가보고 싶었고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꼭 듣고 싶었다.

그것은 긍정하든 부정하든 여의도교회와 조 목사는 분명히 한국 교회사의 한 정점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그런 면에서 나는 특히 목회자로서의 호기심 같은 게 발동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조만간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더욱 서두르게 했다.

지난 6월 7일 주일 오후 1시, 생전 처음 여의도교회 본성전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마치 비싼 입장권을 사서 역사적 경기를 관람하는 행운을 얻은 것처럼, 예배 시작 10분 전쯤이었지만 이미 제대로 볼 수 있는 자리들은 모두 차버리고, 한참 뒤 기둥 뒤지만 그나마 다행스럽게 단상 앞자락이 보이는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바로 앞에 모니터가 있었기에 예배 진행 상황을 따라 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은퇴를 했지만 여의도교회는 여전히 조용기 목사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음이 예배 내내 짙게 느껴졌다. 대표기도를 한 어느 장로의 기도에서도 특히 조용기 목사에 대한 축복기도는 힘이 있었다. 마침내 조용기 목사 등단. “믿으려고 해도 안 믿어질 때”(막 9:17-24)라는 제목으로 다른 교회보다 조금 긴 듯한 50분 정도의 설교였으나 물 흐르듯 유창하고 재미있는 예화 등으로 지루하다는 느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설교는 대충 이랬다. 본문의 귀신 들린 아이 아버지처럼 믿고는 싶으나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약함이 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최소한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은 있지 않겠느냐? 그걸 믿고 구하고 또 구하면 무엇이든 마침내 얻고야 말 것이다.’ 그 사이사이에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 여러 가지 예화 등을 인용하며 50분 설교는 결국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이루어지고야말 믿음의 확신을 역설했다.

줄거리만 들어도 은혜스럽지 않은가? 실제로 교인들의 반응도 그랬다. 갈수록 첨예해져가는 세대와 성별의 차이가 여기에는 없었다. 정말 남녀노소 모두가 설교 내내 “아멘”으로 뜨겁게 화답하며, 은혜의 도가니에 푹 빠진 듯 했다.

그러나 내게는 50분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혼란스러움이 하나 있었다. ‘우리 신앙인들이 기도한대로 무엇이든 얻는다’는 복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면 마침내 소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후자가 그저 자기 신념라면, 전자는 하나님께 구함으로 얻게 되는 은혜가 아니냐?”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 내내 반복되었듯이 건강이든, 사업이든, 취직이든, 입학이든 성도가 믿고서 구한 모든 제목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취해주시는 것인가? 괜히 딴지를 걸어보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근거 구절을 들면서 위와 같은 신념을 순전한 신앙으로 승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이 본문의 바로 앞에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조건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하나님은 일정액만 투입하면 당연히 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자동판매기도, 인간의 욕심을 뻔히 아시면서도 일부러 속아주시는 축복 기계도 아니다. 인간의 어떠한 욕망도 하나님의 이름만 빌려 구하면 그대로 받게 된다는 신념은 기독교 신앙이라기보다는 자동판매기 사용설명서 형식과 흡사하다. 적극적 사고방식은 결코 신앙이 아니다.

나는 열광하는 여의도교회 교인들을 생각해보았다. 왜 저렇게 열광할까?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감히 말한다면 여의도교회 교인들의 상당수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러 나온다기보다는 복을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그게 그것 아닌가? 그게 뭐가 잘못인가? 누군들 복에 관심이 없나?

그러나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예배의 자리로 나오는 자들은 이미 가장 큰 복인 구원의 선물을 얻은 자이기 때문에, 추가적인 복은 결코 신앙생활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이미 복은 받은 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경배하고 선한 일꾼으로 살아가려고 나오는 것이지, 결코 복 받으려고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러나 내게는 50분 내내 여의도교회 교인들을 열광시킨 힘은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아니라 복에 대한 열정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러한 여의도교회와 조 목사의 모범은 교회와 교단을 넘어 한국 교회 전체를 휘감은 성장에의 모델이 되었다.

그렇게 될 때 개인의 영적 성숙, 목회자의 도덕성이나 교회 운영의 합리성 같은 것은 처음부터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사람이 누군들 완벽할 수 있나?’ 마치 경제만 회생시킨다면 도덕성이야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CEO 대통령에게 몰표를 던졌던 작년 대선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과 흡사하다.

복 받으러 나오는 교인들이 많을수록 그 교회는 교회의 본래 존재 목적에서 벗어나기 쉽다. 그러나 복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처음부터 베풀어 오신 것이고, 이젠 우리의 경배와 순종의 삶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여의도교회와 조 목사님을 폄하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정말 없다. 오히려 나는 한국교회사 속에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 신앙이 갖는 의미가 크다고 믿는 사람이다. 소위 신학이라는 게 갈수록 딱딱해지고 인간의 경험과 이성만을 굳게 붙드는 시대가 되어가면서 하나님께서 때마다 베푸시는 다양한 은사들과 기적들을 더 이상 믿지 않거나 과거의 유산으로만 치부해버리고 만다. 예수가 베푼 기적들은 항상 가난한 민중들을 먹이고(마 14:15~21), 고치고(마 14:14), 살리는 것(요 11:35~44)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도, 흔히 우리 배웠다거나 사회적 의식이 좀 깨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일수록 기적이나 은사의 체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아는 한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 신앙의 공로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가 한참 가난했던 50~70년대 병원이 있어도 가난해서 치료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낫기를 간구하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계속된 가난과 굶주림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용기를 주고, 다시 일어날 것을 기원하는 것은 이 땅에 임한 천국 복음의 증거임이 분명하다(마 12:22~28). 그런 면에서 세계적 신학자 몰트만이 그러한 조용기 목사의 목회에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한 것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능력의 현재적 역사를 다시 복권시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것만이 하나님나라 임재의 핵심인 것처럼 과장하여 결국 순복음 신앙이 탈사회적이고 탈이성적인 기복적인 개인주의로 흐르게 되는데, 이에 조용기 목사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건강한 신앙상식과 올바른 신학적 이해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은 가운데서 방언과 치병 등 눈에 드러나는 현상들이 일어나니 사람들의 관심은 이끌어가시는 성령의 주권보다 눈앞의 목사에게 집중되고 말았다. 그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놀라운 현상을 체험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안수한 목사가 더 크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50년을 지내다보니 어느새 교인도, 교회도, 교단도 말로는 “하나님께 영광!”이지만, 온통 조용기 목사의 말과 행동만 바라보고 의존하는 매우 건강하지 못하고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반면 예수님은 필요한 경우 언제나 기적을 베푸시면서도 무리들의 관심이 그저 잘 먹고, 병 낫고, 부유해지는 데 빠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고 절제하셨다(마 12:38, 39, 요 6:15, 26). 그러나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교회에서는 이러한 적극적 절제와 건강한 신학적 뒷받침 작업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 결과 밖으로부터는 지금까지 우상화니 북한식 숭배니 하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흔히 여의도교회는 여러 가지 인간적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열정과 믿음이 충만한 교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여의도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화려하고 부유한 교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연약하고 가난한 교회라고 생각한다(계 3:17, 18).

이번 설교에서 조용기 목사는 우리에게 적어도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은 있어서 결국 기도마다 응답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법적으로 은퇴한 목사를 한사코 영적 아버지로 부르며 설교를 비롯해 거의 모든 부분을 여전히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과연 겨자씨만큼의 믿음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여의도교회는 조용기 목사에게서 젖을 떼고 이젠 정말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만 의지하여 성숙한 일꾼으로 자라가려는 의지가 몹시 필요하다.

나는 여의도교회와 조용기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조용기 목사는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숭앙의 열정들을 적극적으로 벗어버리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고, 여의도교회는 힘들겠지만 더욱 과감히 조용기 목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성령만 의지하여 성숙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질문 : 목사님이 나가시면 재정적으로 후원이 어려워지지 않겠나? 답변: 확실한 것은 걱정하면 안 된다는 거다.…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다 주신다는 것이 정말이다.…내가 떠난다니 식구들이 걱정한다. 믿음 없는 소리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 하는 사람이 그런 걱정을 하나? 하나님이 출장 안 가셨다.” (<복음과상황> 2008년 6월호, 윤공부 목사 인터뷰 중에서)

구교형 / 성서한국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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