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성도를 굴려야 교회가 잘 되는 법이여'
'자고로 성도를 굴려야 교회가 잘 되는 법이여'
  • 신광은·박삼종
  • 승인 2008.07.26 00: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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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사로잡힌 교회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크리스천들만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기업'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박사라도 보지 못한다. 그것은 교회가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델센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라 실화다. 오늘날 교회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오늘날 교회는 신약 시대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층에 장로교, 2층에 감리교, 3층에 침례교, 그리고 지하는 나이트클럽. 백화점 바겐세일과 같은 총동원 전도, 교인 뺏기 경쟁, 집짓기 경쟁. 도대체 어디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할 것이며, 도대체 어디서 로마 제국을 굴복시킨 신약교회와 초대 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교회는 벌거벗었다. 이 사실을 남들은 다 아는데 교회만 모른다.

교회가 벌거벗은 모습 중 하나는 오늘날 교회가 자본주의의 질서에 편입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앞글에서 논의한 대중의 출현, 도시화, 테크놀로지의 발전, 시장의 발생 등과 같은 세속적인 현상들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현상의 결과로 교회가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종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메가처치는 교회 안에 자본주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 메가처치는 교회의 자본주의화가 낳은 열매다.

   
 
  ▲ 어느 교회의 총동원 전도 주일 포스터.  
 
1) 고객의 탄생

고객이 탄생했다. 시장 상황에서 오늘날 구도자들은 고객으로 존재한다. 고객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구도자는 자신들의 삶을 전적으로 새롭게 바꿀 생명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은 다만 일용품으로서의 종교에 관심이 있다. 일용품 종교란 무엇인가? 파스칼이 말한 대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지옥의 불행을 피할 수 있는 ‘보험증서’를 말한다. 또 일용품 종교란 한 주간의 긴장된 삶을 잠시 이완시켜 줄 ‘기분전환’을 말하며, 바라는 바를 ‘빌 대상’을 말하며, 자신감으로 충전시켜 줄 ‘격려자’를 말하며, 자신의 삶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자기 성찰’을 말한다. 그리고 마음이 동하면 몇 푼의 헌금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제 사업’을 말한다. 오늘날 구도자는 이곳저곳 교회를 전전하며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일용품 종교를 구매하고 다닌다. 고객이 탄생한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교회에 고객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 고객이 출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피터 버거식으로 말하자면, 과거에 신앙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초대 교회는 교회 입문에 참된 제자도의 열매를 요구했기에, 또 중세 교회는 기독교 제국의 지배력을 행사했기에 선택권은 교인이 아니라 교회에게 있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선택권이 교인을 고객으로 만들다

신앙이란 처음에는 지역별로, 더 나아가 도시, 개인별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물론 이 시발(始發)은 교회의 분열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신교냐, 구교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 신교는 독일 루터란이냐, 프랑스 위그노냐, 영국 성공회냐, 화란 개혁주의냐, 스코틀랜드 장로교냐, 재침례교냐, 그냥 침례교냐, 퀘이커냐 등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채 사람들은 보다 자유로운 선택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대륙으로의 이주를 촉발시켰다.

때문에 미국은 처음부터 자유의 나라였으며, 그리하여 선택의 나라였다. 수정헌법 1조는 미국이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임을 명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모든 교단이나 교파들은 철저한 자유 경쟁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교회나 교단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점점 더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유럽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앙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 혹은 ‘사상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자유권은 하늘이 부여한 인권 중 가장 중요한 권리로 정당화되었다. 유럽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신생 국가인 미국은 새로운 하나님, 곧 ‘자유의 여신’을 숭배하기에 이른다.

자유권, 곧 자유로운 선택권은 19~20세기를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대중의 지위 향상과 관계가 있다. 19~20세기에 시민권의 확대를 위한 지속적인 투쟁이 있었으며, 이와 함께 민주주의는 꾸준히 발전하였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참정권, 특히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이제 대중은 ‘표밭’이 되었다. 대중에게 권력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은 또한 각 개인을 ‘소비 주체’로 승격시켰다.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곧 돈이 모인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이제 숫자는 힘이 되었다.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된 대중은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숫자의 힘’을 주장하게 되었다. 대중은 여론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대중 독재가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대중은 교회의 최고 고객이 되었다.

유행처럼 번지는 분열…‘예수’와 ‘그리스도’가 갈라져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교회의 분열이 자유를 확대했고, 자유의 확대는 다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촉진시켰다. 마음에 안 맞으면 그냥 갈라서 버렸다. 교회의 분열은 분파주의와 이단의 폭발을 초래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신종 이단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밀러라이트·몰몬교·안식교·크리스천사이언스·여호와증인 등 피터 버거의 말대로 바야흐로 ‘이단의 시대’다. 하지만 누가 이들을 막을쏘냐? 무슨 권리로 신앙의 자유권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같은 현상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6·25를 전후하여 교회를 가르는 붐이 일어났다. 조금만 의견 불일치가 생기면 그냥 찢어버렸다. 신사참배 문제로 장로교에서 고신파가 떨어져나갔다. WCC 가입 문제로 통합과 합동이 나뉘고, 합동은 다시 교단의 전횡에 반대하여 개혁교단이 떨어져나갔다.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로 기독교 장로회가 예수교 장로회로부터 또 떨어져나갔다. ‘예수’와 ‘그리스도’가 갈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행이 되었다. 감리교도 기감과 예감이, 성결교도 기성과 예성이 갈라졌고, 침례교는 이단 때문이기는 하지만 역시 기침에서 예침이 떨어져 나왔다. 순복음교회도 갈라졌다. 교회 분리는 이단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황국주·박태선·문선명·나운몽 등에 의해 수많은 이단들이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지금도 구원파·안산홍·신천지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교회의 분리가 교회의 성장을 낳았다는 것이다. 교회가 갈라지면 맨 먼저 신학교를 세우고, 목회자들을 양산하여 내보내면, 목회자들은 목숨을 걸고 교회를 세우고 사역을 하니 교회가 성장할 밖에…. 1960~70년대 유래가 없는 엄청난 한국 교회의 부흥은 그리스도의 몸을 갈가리 찢어 얻은 대가였다.

교회 분열이 교회 성장의 밑거름?

그러나 교회의 핵분열로 말미암는 신학교의 난립과 목회자의 대량 양산은 점차 교단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교단이 개교회에 일일이 책임 있는 지원을 해주지 못하게 된 것과도 연관이 있고, 또 교단 하나를 갈라 세우는 것이 밥 먹는 것만큼이나 쉬우니 그만큼 교단의 치리 권능이 약화된 것과도 연관이 있으며, 교회들이 점점 더 치열한 생존 경쟁을 겪게 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완벽한 시장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교단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이제 교회는 순전히 시장 상황 한 복판에 ‘개교회’로 내동댕이쳐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개교회주의’의 모습이다. 바야흐로 교회의 무한 분열의 종착점에 도달한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무한 분열은 고객에게 그만큼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하게 되었다. 교단이나 교파, 신학이나 전통은 아무래도 좋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자유인가? 이 얼마나 풍성한 선택의 기회인가? 사실 이러한 선택의 폭은 기독교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전 종교에게로 확장되고 있다. 모든 교회와 교파, 그리고 모든 사상과 종교는 종교 시장에 자신들의 특성화된 상품을 내밀며 고객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시장 상황은 신학이나 전통은 부차적인 것이 되게 만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판매와 구매다! 신교나 구교 그리고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사상과 종교는 이러한 시장 상황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믿는다는 것은 마치 백화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게 되었다.

무한 분열이 낳은 열매, 복음의 왜곡

이와 함께 교회의 메시지도 심각하게 변화하게 되었다. 오르띠즈 목사의 말에 의하면, 현대 교회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예수님을 믿어보지 않으시겠어요?”라는 호객 행위로 뒤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변질된 메시지는 성서나 초대 교회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초대 교회는 믿고 싶다고 해도 절대로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격한 심사와 기나긴 예비자 교육을 통과하지 않고서 신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천박한 복음주의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며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다.

천박한 복음주의에서 구원은 자동으로 전제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구도자의 선택뿐이란다. 고객의 선택은 곧 구원 자체란다. 맙소사! 현대 교회에서 더 이상 그리스도는 왕이 아니다. 고객이 왕이다. 현대의 구도자는 물에 빠져 ‘살려달라’ 절규하는 자가 아니라, 거드름을 피우며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는 쇼핑객이며 구매자다.

   
 
  ▲ 총동원 전도 주일 행사를 통한 교회 성장에 대해서 정리한 책도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  
 
교회가 매일 매일 만들어내고 있는 기발한 신앙 상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메가처치는 그야말로 신앙 상품들로 즐비한 대형 할인마트다. 메가처치의 성장 방법이나 경영 기법, 마케팅 기술, 선전 테크놀로지 등은 아무리 보아도 세속 기업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런 메가처치가 소위 ‘건강한 교회’의 모델과 표준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메가처치는 교회가 기업화된 최종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2) 자본과 시장의 논리

시장 상황 속에서 교회는 점점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종속하게 된다. 교회가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지배를 받고 있는 몇 가지 징후들만 살펴보자.

흔히들 요즘은 교회 개척이 잘 안 되는 시기라고 한다. 왜 그럴까? 그 실상인즉 목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말씀에 대한 열정, 영혼을 향한 사랑, 인품과 도덕적 자질이 아무리 훌륭해도 종교 시장 진입에 필요한 초기 투자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아예 교회 시장에서 도태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 아닌가? 같은 맛이라면 인테리어가 잘 된 식당을 찾는 것이 고객의 취향이듯, 오늘날 교회 고객들은 겉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교회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 취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이나 어느 교회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저 현실일 뿐이다. 그래서 최소한 100명 정도의 교인(특히 직업이 번듯한 어른 성도는 필수), 예배당을 세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재정, 십자가나 의자, 강대상 같은 가구 및 집기, 피아노나 드럼 같은 악기,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부, 성가대와 같은 기본적인 조직, 전도 및 양육 프로그램, 거기에 더하여 설교가 괜찮은 목사 등의 기본 아이템이 갖추어져야만 그 교회는 시장 상황에서 생존할 수가 있게 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일단 이런 식으로 개척을 하게 되면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지속적인 성장’이다. 이상하게도 자본주의는 멈추어 서 있을 수 없다. 꼭 자전거 같다. 그래서 앞으로 전진하든 아니면 넘어지든 둘 중 하나다. 자본의 힘으로 시작한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다. 계속 페달을 밟아야만 굴러간다.

어느 교회 목사가 한 말이다. “자고로 성도를 굴려야 교회가 잘 되는 법이여.” 그렇다. 목사는 끊임없이 일을 벌여서, 성도들을 굴려야 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조직의 간단한 생리일  뿐이다. 끊임없는 행사와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적당히 동력화시켜 주어야 조직에 활력이 생긴다는 것은 경영 리더십의 기초 중 기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교인들은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침체’해버린다. 이것이 시장질서 안에서의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피곤한 교회다. 교회력에 따른 절기뿐만 아니라 정기 심령 부흥회·사경회·총동원 전도 주일·바자회·선교 여행·체육 대회·야유회·특별 새벽기도회 등이 끊임없이 계획되고 시행되어야 하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행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성전 건축 프로젝트의 놀라운 효과

   
 
  ▲ 성전 건축 헌금 봉투. 건축 프로젝트는 눈물겨운 헌신의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업에 현실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대단히 훌륭한 전략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특히 ‘성전(?) 건축’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프로젝트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점점 커져가는 예배당은 교회 성장의 가시적인 징표요, 하나님나라 건설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전 건축 프로젝트는 개별 성도들의 여러 잡다한 요구와 불만들을 깡그리 청소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공통의 목표 의식을 설정할 수 있다. 또 눈물겨운 헌신의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업에 현실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대단히 훌륭한 전략이다. 무엇보다 근사한 건물과 인테리어는 새신자 전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더불어 근사하고 쾌적한 공간과 감각적 인테리어, 최신식 장비까지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금상첨환가!

요즘 목회자들은 예수님보다 능력이 많은 모양이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그토록 어렵게 허무신 성전을 단 돈 몇 푼으로 간단히 다시 세워버리니 말이다. 그것도 예루살렘에 한 채가 아니라, 수백, 수천 채의 성전이라니….

이른바 ‘총동원 전도 주일’이라는 교회 성장 전략은 백화점 정기 바겐세일을 닮았다. 날짜가 정해지면, 그 다음은 교회 전체의 목표 인원수를 정하고, 교구별·구역별·개인별 목표 인원이 할당된다. 각 개인은 나눠준 용지에 후보자인 VIP명단을 기입하고 전도 주일 당일까지 새벽마다 기도하며, 온갖 선물 공세, 전화 공세, 식사 공세, 심지어 현금 공세까지 제공하며 예배당으로 끌어당기는 행사를 소위 총동원 전도 주일이라고 한다.

총동원 전도 주일 = 정기 바겐세일?

물론 전도 주일 당일이 되면 교회는 축제의 날이다. 화려한 장식에 적당히 들뜬 분위기, 초특급 강사, 연예인 초청, 각종 영상과 특별 프로그램, CCM 가수, 파워풀한 복음 설교, 거기에 경품까지! 이것은 보험 세일즈나 백화점 바겐세일, 신천지 등 이단의 전도 수법이 훌륭하게 버무려져 있는 퓨전 스타일의 복음주의다.

교회는 이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동원하는 수법을 가리켜 ‘영혼 구령’이니 ‘지상 명령에 대한 순종’이니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이런 저런 변명으로 합리화하려고 해도, 영락없이 기업의 판매 촉진 수법과 닮았으니 이 일을 어쩌랴!

정리하면 이렇다. 교회의 분리가 경쟁 구도를 만들었고, 경쟁 구도가 시장 상황을 초래했다. 물론 이러한 교회의 시장 상황은 대중의 출현, 도시화, 테크놀로지의 발전, 시장 자본주의의 탄생과 같이 때맞춰 조성된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들과 결합되어 더욱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문제는 교회가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 대안적 공동체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교회는 마치 후천적으로 면역 결핍증에 걸린 AIDS 환자처럼 외부 환경의 독소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점차 본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장 상황에서 구도자들은 고객으로 변신했으며, 교회는 기업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러한 탈선의 종착역은 교회의 무한 분열, 완전한 시장 상황의 도래, 자본주의 질서의 정착 등이다. 고로 메가처치는 교회의 탈선이 맺은 풍성한 열매다.

신광은·박삼종 / 열음터공동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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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lldog 2008-08-17 10:32:30
약육강식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주는 혼탁한 세상에 교회만이라도 그렇지 않아야 하는데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교회 덩치 키워서 소위 Megachurch 만들기에 all in 하는 교직자와 그 주변인사들(주로 장로들)의 행태를 보노라면 절로 눈쌀이 찌푸러집니다. 어떤 경로를 거치든 일단 Megachurch가 되면 어디 그것만으로 만족합니까 ? 지교회, 분교회, 협력교회 등등 온갖 형태로 이루어진 Super 아니 Hyperchurch Groupdmf 만들고 싶어 안달을 하지d요. 주변의 작은 교회들이나 교단 등의 관련단체 또는 언론에서 이러한 행태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 상투적인 반론으로서 "교회가 커지지 않고 작은 교회로 머무는 것은 그 교회 목사의 자질, 능력, 목회방식,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기도가 약해서 그렇다 . . .." 를 되풀이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현실입니다. Megachurch 가 Minichurch를 귀히 여기는 날이 어서 오기를 고대합니다. 신.박 두 목사님 교인 한명 한명을 귀하게 돌보시는 목회자가 되시고 두분 만큼은 Megachurch 중독자가 되지 않으시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