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독일말도 할 줄 알아?
하나님이 독일말도 할 줄 알아?
  • 강남순
  • 승인 2008.08.31 19: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하고 익숙한 것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늘 강조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고 익숙하게 느끼는 세계로부터 과감히 나오라"는 것이다. 자신이 일상적으로 익숙하게 사고하는 세계를 넘어선 '탈일상성의 공간'은 자기 자신은 물론 이 세계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명명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네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한다. 지금처럼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서 인터넷을 통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다양한 교통수단이 있는 현대 세계에서도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여전히 한 사람의 인생에서 커다란 사건인데,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적 조건에서 "네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익숙한 공간을 떠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시대에서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생존의 극심한 위기와 대면해야 하는 사건이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했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탈일상성의 시간과 공간'과 치열하게 대면했어야 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에 대하여, 세계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형성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고향 떠남'의 사건은 한 사람의 인생의 여정에 여러 가지 의미와 경험을 안겨다주며, 그 사람은 더 깊고 넓은 시각을 비로소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탈일상성의 시간과 공간'을 의도적으로 갖는 것, 이것이 진정한 배움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에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우리 부부는 만 2살과 4살짜리 아이 둘을 데리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에는 어린아이부터 받아주는 유치원들이 있어서 아침이면 자고 있는 두 아이들을 깨워서 아침을 먹이고, 씻기고, 옷을 입혀서 자전거에 태워서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나는 학교에 가곤했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서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것은 어른이든 아이든 여러 가지 어려움과 대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 아이들은 이성보다는 먼저 몸의 언어로 다른 아이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인지 독일어로 겪는 어려움은 어른들보다는 덜 심각한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큰 아이가 아주 시무룩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다른 날은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명랑하게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 날은 유난히 시무룩했다. 

   
 
  ▲ 오늘은 독일말로 기도해서 하나님이 알아듣지 못했을 거야.  
 
나는 속으로 '유치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보다' 염려하면서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서 "자, 오늘 유치원에서 어떻게 지냈지? 엄마에게 말해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엄마, 오늘 유치원에서 점심 먹으며 기도했는데 독일어로 했어. 이제 하나님이 내가 기도하는 것을 못 알아들을 거야. 하나님은 이제 내가 기도도 안 하는 줄 알 거야, 그치 엄마." 이 말을 듣고서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아이의 심각한 얼굴을 보니 가볍게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심각한 '신학적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에게 "아니, 그것 때문에 그렇게 걱정을 했어?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하나님은 한국말뿐 아니라 독일말도 할 줄 아셔."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아이의 표정이 환해지며, "엄마, 정말이야"하고 다시 되묻는다. 나는 "그럼"하고 단호히 확신감에 찬 목소리로 안심을 시켰다. 이 세상에 한국말만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아이에게 한국말이 아닌 독일말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은 참으로 새로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한국말뿐만 아니라 독일말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는 얼굴이 아주 환해졌다. 하나님이 알아듣는 언어는 도대체 몇 가지나 될까. 그 당시 아이는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이 세상이 한국말이 아닌 독일말이 있다는 것만을 아는 것만 해도 '인식론적·신학적 충격'을 받게 된 커다란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오래 전 일어났던 이 일이 다시 생각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또는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가 우리 자신의 작은 렌즈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종종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든, 타자에 대한 이해든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만든 작은 상자 속에서 그들을 제한시킨다. 하나님의 축복, 심판, 은혜 등은 우리의 편이와 상식 속에서 재단되어 '무한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제한된 경험과 사유 속으로 제한되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쉽사리 보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되고 협소한 이해를 절대화시킬 때,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올바른 종교 신앙을 갖는 데에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종종 자신과 다른 성별, 인종, 종교에 속한 사람들에 대하여도 지극히 협소한 이해를 가지고 편견에 사로잡힌 이해를 절대화시키곤 한다.

우리가 편하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생각들을 과감히 버리고, 전적으로 새로운 시선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와 다른 이들을 만나는 것, 이것은 '육체적인 고향 떠남'만이 아니라, '정신적 고향 떠남'을 하는 것이며, 이러한 '고향 떠남'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커다란 자신, 세계,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세계를 확장하게 된다. 무수한 편견과 독선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겨야 하지 않을까.
 
강남순 /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 이 글은 <코넷>에 실린 글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