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1)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1)
  • 구교형
  • 승인 2008.09.02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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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경제는 거듭 묻고 추구해야만 찾을 수 있다'

   
 
  ▲ 경제는 우리 생활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누구의 경제냐가 더 중요하다. 주식이 폭락해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시민.  
 
I. 우리는 지금, 왜 경제를 물어야 하는가?

경제 문제를 앞에 두고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한쪽은 경제야말로 인간 생활의 전부요, 그것만 풀리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처럼 여긴다. 다른 편에서는 세상에 더 중요한 가치가 얼마나 많은데 기껏 먹고 살아가는 정도에 집착하느냐며 무시하기도 한다. 경제는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굳이 관심 가질 필요도 없는 주변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경제는 매우 중요하며, 갈수록 더 중요해져 간다.

예수님은 경제 문제를 한 번도 무시한 적이 없다. 그는 '사람이 떡(경제)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 4:4)고 하였고, 또 '하나님과 재물(경제)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 6:24)며 경제 문제가 과장되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다른 한편 예수님은 항상 서민들의 경제생활에 관심이 많았고, 어찌하든 도우려하셨다(막 6:35~43).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경제관은 경제가 있어야 할 바른 자리를 찾아주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나라의 공의와 백성들의 삶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더 나가자. 경제면 그냥 경제고, '미시'냐 '거시'냐만 따지면 됐지,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가 어디 있나? 아니다. 분명히 있다. 경제라고 다 같은 경제가 아니다. 경제에도 질이 있고, 격이 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제에 예수님의 마음(혼)을 담지 않으면, 그저 재테크 이론에 다름 아닐 것이다. 흥미롭게도 예전과는 다르게 한국 교회가 갈수록 경제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 교회의 내로라하는 목회자들도 부강한 나라, 부자 국민, 성장한 교회 만드는 게 마치 지상명령이나 되는 듯 목소리를 돋우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느껴지지 않고, 바알적 경제지상주의가 엿보여 걱정스럽다. 그런 염려와 걱정이 이 글을 쓰는 동기가 됐다.

나는 경제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비전문가다. 그러나 청년 시절 이후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낀 후(마 9:36), 주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학의 원리도 막연히 느껴보고(마 14:16), 어깨너머 독학하듯 경제를 공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본격적인 또는 일반적인 경제학 이론서가 아니다. 내 관심사는 '경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경제는 마땅히 어디로 향해가야 하는가?', '경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같은 문제들이다. 서점에 가보면 경제·경영학 서적들이 넘쳐나지만 이러한 본질적 질문에 답해 주는 책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Ⅱ. 경제의 기본 구조

모두 '경제', '경제'한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흔하게 들려오기에 정말 중요한 원리를 모를 때가 많다. 내가 아는 한 경제란 모두를 유토피아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마법의 원리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그러한 환상을 빨리 깰수록 경제(학)는 모두의 행복을 무작정, 그리고 무한정 쏟아야만 한다고 믿는 미신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경제란 무엇인가? 인터넷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데서 머물면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가보자.

1. 경제 영역에 '윈윈(win win)'은 없다.

영적 세계는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맛보며 살아간다고 다른 사람이 그 은혜를 빼앗기거나 손해 보는 일은 없다. 그러나 물리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는 엄밀히 말한다면 '윈윈의 세계'란 없다. 어느 학습지 광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400만 초등학생이 모두 우등생이 되는 그날을 위해서' 그러나 사실상 그런 날은 결코 없다. 우등생이 있으면 반드시 열등생이 있어야 하는 우리 교육 현실에서 어떻게 모든 학생들이 다 우등생이 될 수 있겠나. 그것은 '모든 수험생들이 다 경쟁에서 승리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정치의 세계도 그렇다. 모든 후보자들이 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모두 당선되고, 모두 집권하고, 모두 여당이 될 수 있나. 불가능하다.

경제도 마땅히 그렇다. 웃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우는 사람이 있는 게 경제의 세계다. 모두가 웃는 경제란 없다. 그러므로 누구의 경제냐를 물어야 한다. 누군가 자기 수고에 비해 더 많은 소득을 얻었다면 반드시 그만큼 더 손해 본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우등생의 혜택도, 금배지의 기쁨도, 그리고 경제에 있어 재화도, 서비스도 수요에 비해서 총량은 항상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부터 우리가 경제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바로 잡아야할 본질이다.

경제는 반드시 분배의 문제로 연결된다. 어차피 재화(서비스도 마찬가지)는 한정된 것이므로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이 분배되었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양이 더 빠져나갔다는 것을 뜻하지, 모두에게 동시에 이득이 돌아가는 재화 분배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앞서도 말했지만 물리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세상에서 '모두 우등생이 되'거나, 로또 복권이 선전하듯이 '모두가 웃는 그 날'은 결코 오지 않으며, 그런 표어들은 잘못된 현실을 억지로 가리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말들이다. 착각을 버리고, 지금부터 '누구의 경제'인지를 묻자.

2. 목마른 사람에게 식수와 비데의 물은 값어치가 다르다.

경제를 생각할 때 우리가 두 번째로 기억해야할 사실은 같은 재화(서비스)라도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값어치)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똑같은 물 한 양동이라도 남부 아프리카 아이들은 매일 몇 시간을 걸어서 길어다가 식수로 쓰고 있는 반면, 다른 지구촌에서는 비데라는 편리한 상품을 만들어 용변 후 뒷물로 써버리는데, 같은 양의 물이라고 그 값어치를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양심을 갖고 객관적으로 말한다면 누구나 분명 물 한 양동이의 값어치는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자. 실제 경제의 세계에서는 전자의 그 절실한 값어치를 위해 후자를 결코 희생시키지 않는다. 경제학에서의 가치는 그 재화가 누구에게 더 긴요하고 필요한지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오직 시장 가격으로서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제는 자선이 아니다. 경제가 자선이 되는 순간 그것은 도덕이 된다. 자선은 개인적 호의에 의존하지만 경제는 가장 합리적인 분배의 원리를 찾아야 한다.

구교형 / 목사·성서한국 사무총장
※이 글을 몇몇 매체에 함께 기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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