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2)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2)
  • 구교형
  • 승인 2008.09.07 21: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합리적 분배를 결정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1. 경제 영역에 '윈윈(win win)'은 없다.
2. 목마른 사람에게 식수와 비데의 물은 값어치가 다르다.
3. 합리적 분배를 결정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결국 문제는 합당한 분배에 달려있다. 그러면 이처럼 중요한 분배를 결정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전통적인 경제학자들의 믿음은 이 같은 재화(서비스)들을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하고, 그 분배의 대가로 얼마의 가격을 지불해 주어야 하는지 등 모든 경제 문제를 결정하는 유일하고 전능한 힘이 바로 시장(市場)에 있다고 한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더 많은 사람의 간절한 수요가 있는 곳에 더 많은 공급이 따르고, 적절한 생산이 있는 곳에 더 많은 대가가 지불되는 것은 당연하고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한정된 재화(서비스)를 배분하는 데는 당연히 수요와 공급의 함수 이외에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들 사이의 힘 관계와 사회적 설득력이 큰 몫을 차지한다. 다시 말하면 긴요함과 적절성에 상관없이 목소리가 더 크고, 힘이 셀수록 더 많은 재화(서비스)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합당한 분배는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이고 초월적인 원칙이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때로는 갈등하며, 도출해야할 사회적 약속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요구가 있는 곳에 더 많은 공급이 주어지고, 그에 따라 더 많은 대가가 지불된다는 경제적 합리성을 막연히 믿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의 (사실은 더 긴요하지도 않은) 요구에 더 많은 공급과 대가가 따라가곤 한다. 아까 말했듯이 목마른 자의 생수와 비데의 물 사이의 현실은 그것을 증명해 준다. 다시 말하면 경제는 단순한 수치나 객관적 이론을 넘어서 무엇을 향해, 어디에 우선적으로 집중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물어야하는 가치적 문제이다.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 먼저, 무엇을 먹여야할 것인지를 정해야 하는 자리에 가치는 개입되지 않아야한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의 질의 문제를 도외시한 객관적 경제란 없다.

이번에는 소득 분배를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근로 소득의 크기는 그 노동에 대한 시장의 평가와 노동량에 달려 있다'(<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119쪽)고 한다. 우선, 노동량을 보면 5시간 일 한 사람보다 8시간 일 한 사람에게 더 많은 소득이 주어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문제는 소위 ‘시장의 평가’라는 것에 따라 소득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노동량 측정은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반면, ‘시장의 평가’라는 것은 객관적 평가가 매우 모호한 용어인데다가 현재의 기득권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크다.

'시장의 평가'란 이런 것이다. 우선 같은 노동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숙련도와 다양한 능력의 차이가 나타나므로 똑같은 시간을 일해도 더 우수한 숙련가와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은 보수가 지급된다는 것이다. 일단 합리적이다. 문제는 보통의 사람들 사이의 능력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반면, '시장의 평가'라는 임금 격차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가령 노동부 조사에 의하면 2007년 6월 기준 고졸 노동자 평균 급여액은 178만 원으로, 대졸 이상 노동자 281만 원보다 무려 103만 원이나 적었다. 특히 1년 미만 노동자 첫 임금을 비교하면 2000년 12.4%에 불과하던 대졸과 고졸 격차가 해마다 늘어나 2006년에는 36.7%, 2007년에는 47%로 더 크게 벌어져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2004~2007년 사이에 대졸 이상 경제 활동 참가율은 소폭이나마 증가하는 반면(77.9%→77.9%→78.1%→78.1%), 고졸 이하는 확연히 줄어들고 있다(56.9%→56.5%→56%→55.6%). 또한 우리나라 남녀 임금격차는 36%로 세계 최악 수준이다(세계 평균 15.6%, 아시아 평균 17.6%). 과연 우리나라 고졸자는 대졸자에 비해, 여자는 남자에 비해 그토록 숙련도와 업무 수행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가?

또 '시장의 평가'는 각기 다른 노동에 대해 시장의 선호도(평가)가 다르기 때문에도 생겨난다. 즉, 일반적인 사람들은 삼성 회장 이건희의 경영능력, 베컴의 환상 프리킥, 이효리의 미모와 재능을 빌딩 청소원 아주머니의 노동보다 훨씬 높게 평가해 준다는 것이다. 일단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단순하게 알려진 연봉의 차이를 보면 이건희 45억 원, 베컴 63억 원, 이효리 55억 원인데 반해, 청소원의 경우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00만 원을 넘기지 못한다(이효리 연봉은 청소원의 275배다). 그러나 전자의 유명인들은 공식 연봉보다 각종 배당금, 부동산 수익, 각종 금융 소득, 강연료, 출연료 등 기타 수입이 훨씬 큰데 반해, 일반 노동자의 경우 그런 기타 수입은 거의 없거나 미미하므로 양자 사이의 격차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크다(한 예로 2007년 주식 최고배당금을 받은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는 현금으로 615억 원, 이건희 삼성 회장은 216억 원을 벌어들였다).

어차피 획일주의나 절대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기에 개인 능력의 차이나 성실성, 시장의 평가 등 모든 차등적 요소를 감안한다고 해도, 이들 사이의 차이가 그렇게 엄청날 정도로 크다고 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사이의 격차를 누가 정확히 평가해 줄 수 있는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다시 말하지만 경제(학)란 한정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합리적 분배의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한정된'이라는 원초적 제약과 '합리적'이라는 현실적 판단 사이에 경제(학)가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떤 원리를 기대할 게 아니라, 시대 상황 앞에서 구체적인 고민을 바탕으로 공공적인 합의에 의해 더 나은 조건들을 도출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절대적 '윈윈'은 없다.

다만 좀 더 공정한 방식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대한 공의로운 방식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적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 다양한 갈등과 조정의 과정(세계↔국가↔기업↔개인)을 거쳐야만 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이제는 여기에 인간적 관계를 넘어서 자연과의 관계도 포함시켜야 한다. 자연은 그저 우리 인간들이 우리의 단기적 필요에 의해 언제든, 그리고 무한정 써먹기만 할 수 있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교형/ 성서한국 사무총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