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4)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4)
  • 구교형
  • 승인 2008.09.1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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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을 닮은 공의로운 제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Ⅲ. 성경을 통해 보는 경제 사상

1. 성경은 특정 체제나 제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2. 개인의 책임이냐, 구조적 모순이냐?
3. 이스라엘 제도를 통해보는 성경의 경제 사상

(1)제국의 영광은 하나님나라와 다르다.
(2)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을 닮은 공의로운 제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 하나님은 유독 땅은 내 것이므로, 한번 분배된 것을 너희 맘대로 사고팔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복음과상황 자료 사진)  
 
하나님은 개인을 의롭게 하실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당신의 성품과 의지를 본받는 공동체(이스라엘, 교회)를 이 땅에서 만들어 가신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가 반영된 공의로운 제도를 세우신다. 구약 이스라엘을 세우셨을 때 하나님은 다른 나라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제도를 만들어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지키도록 명령하셨다(신 6:1~3, 31:9~13).

(2-1)하나님은 절대 신앙과 사회 정의를 지키는 국가 기초를 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한 후(수 6~12장), 그것을 신적 권위로 분배하셨다.(수 13~22장) 땅은 개인적 선호도나 권력의 우선순위에 따라서가 아니라, 각 지파별로 하나님 앞에서 제비뽑아 나누어졌다. 각 지파는 다시 가족별로 더 세분해서 땅을 나눠 대대로 그 땅을 기반으로 살게 된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이렇게 한번 분배된 땅은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맘대로 사고파는 매매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정도로만 해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하나님은 유독 땅은 내 것이므로, 한번 분배된 것을 너희 맘대로 사고팔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레 25:23) 그리고 분배된 땅의 경계를 아예 확정 짓기 위해 경계표를 만들어 누구든 보고 알 수 있게 박아 놓으라고 하신다.(신 19:14)

하나님은 왜 유독 땅에 대해서 이토록 강하게 집착하실까? 또 땅의 공평성이 새로 건설하실 이스라엘 정체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땅이 갖는 특징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람이 생명체로 살아가는데 땅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동서고금, 남녀노소, 빈부귀천, 신앙유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땅에 거하며 산다. 땅을 기반으로 먹고, 자고, 생산 활동을 한다. 벤츠 자가용을 몰거나 최고급 귀금속으로 장식하지 못해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 없으나, 땅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땅은 필요하다고 인간이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생산물도, 문명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땅이 그저 맘대로 사거나 팔 수 있는 일반적 사유재산이 아닌 이유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상업이나 금융 등 각종 서비스업이 발달하기 이전인 고대 시대에는 농사를 짓든지, 목축을 하든지 기본적인 생산 활동에 땅이 직접 사용되었기에 고대인들의 토지 의존성은 우리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했다. 그러므로 결국 땅은 생명이다. 땅이 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다.

(2-2)안식일·안식년·희년 제도를 통해 공의로운 이스라엘을 지키셨다.

이처럼 하나님이 새로 만드시려는 공의로운 선민국가 이스라엘과 주신 땅을 붙잡고 복을 누리는 것은 일맥상통한 것이다.(창 17:7~8) 그런데 이렇게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뜻하지 않게 땅을 사고파는 일이 생겨났다. 농사지을 젊은 장정들이 전쟁에 나가 죽었다든지, 사고가 나거나 병이 들어 노동력을 상실했다든지 하는 다양한 사정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또 땅에 붙어 일하며 살기보다는 먹고 놀기만 즐기다가 탕진하는 사람들은 왜 없겠는가?(눅 15:13~14)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이 각 지파와 가족별로 분배하신 자기 땅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뜻밖의 사태가 발생할 것을 미리 예측하신 듯이 대책을 마련하셨는데, 그게 바로 안식일·안식년·희년법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세상이 병들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선한 창조(출 31:14~17)와 완전한 해방(신 5:12~15)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그 안식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계산해 지키는 안식년도 바로 하나님의 안식과 해방의 선물이다.(레 25:3~7) 그 해방의 해 7년을 다시 완전수 7로 곱한 49년이 지난 이듬해 50년 째 되는 해에는 온 민족이 크게 지켜야할 해방과 안식의 해, 바로 희년이다.(레 25:8~10) 희년이 되면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의 기본 체제가 많이 무너졌을지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①우선 본래 사거나 팔지 못하는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간다.(레 25:28) 갚을 능력이 있든 없든 이에 상관없이 무조건이다. 물론 희년이 오기 전에라도 원주인이나 그의 친족이 찾아와 물러 달라고 돈을 가져오면 새 주인은 두 말없이 언제든 물러 주어야 했다.(레 25:24~27) 우선권은 언제나 인간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 주신 은혜(토지 분배)에 있었다.

②집도 희년법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집은 차등이 있어 성벽에 둘려 그 성안에 거하는 집은 단 1년만 무르기를 할 수 있고, 1년이 지나면 완전히 산 사람의 소유가 되어 희년이 되어도 돌려받지 못한다.(레 25:29~30) 그러나 성 밖에 있는 시골(촌락) 집은 토지와 같은 것으로 보아 희년법의 절대적인 적용 대상이 된다.(레 25:31)

③동시에 이스라엘은 본래 자기 동족을 종으로 사거나 팔 수 없지만 또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혹시 종이 되었을지라도 50년 째 해에는 희년법을 적용받아 무조건 해방된다.(레 25:39~41)

이러한 희년법 정신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①무차별적 토지 사유화는 죄로 사회를 병들게 한다.
하나님은 분명 사유재산을 인정하셨다. 기본적인 시장의 기능을 인정하고, 자유 매매와 사유재산이 허용되었고, 따라서 빈부의 차이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사유재산과 자유 매매는 무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공동체적 필요에 따라 제한을 받았다. 개인의 자유가 소중한 동시에 공동체적 생존권도 인간의 기본권으로 보장되었다. 그래서 심지어 성 안의 (도시적) 주택은 사유재산으로 보았지만, 성 밖의 (시골)집은 부속 토지로 보고 희년법을 적용시킨 것이다.

우리나라는 잊을만하면 토지공개념을 갖고 논란이 벌어진다. 시장과 사유재산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부동산(땅과 건물)을 맘대로 사거나 팔고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것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위반한 것이요, 공산주의적 사고라는 것이다.(1994년 헌재에서 토지초과이득세법 위헌 판결) 그러한 부동산 부자들의 고충(?)을 참작하여 이번에 정부, 여당은 부동산 관련 세금을 대폭 낮추고, 거래 제한을 완화하겠다고 나섰다. 특히 지금까지 공시가 6억 원 이상 부동산(공시가는 통상 실제 매매가의 50~70% 수준이니 실제 가격은 10억 정도)에 한정하여 누진과세인 종합부동산세를 매기던 것도 너무 과중하다고 여겨(이는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겨우 2%에 불과한데도), 종부세 과세 대상을 과표 9억 원 이상으로 올려 잡고, 부부합산 과세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 주택 보급률이 벌써 100%를 넘었지만 아직도 집 한 채 갖지 못해 월세로, 전세로 전전긍긍하는 서민들이 허다한데, 정부와 여당은 겨우 2%에 불과한 부동산 부자들의 병아리 눈곱만한 세금도 깎아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택 보급률이 벌써 100%를 넘었지만 아직도 집 한 채 갖지 못해 월세로, 전세로 전전긍긍하는 서민들이 허다한데, 정부와 여당은 겨우 2%에 불과한 부동산 부자들의 병아리 눈곱만한 세금도 깎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혜택을 바로 우리 대통령 및 대부분의 장관, 국회의원들부터 고스란히 받게 된다. 대통령과 주요 장관급 고위층 19명이 가진 부동산 재산 가격은 무려 299억 원에 가깝고 현행 세법으로도 겨우(?) 3억 326만 원의 종부세를 내야하나, 약화되는 세법을 적용하면 1억 4203만 원을 내게 돼 1억 6123만 원을 절감하게 된다.(<한겨레21> 722호 참조)

땅 없이 살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땅을 통해 누리는 혜택이 많아질수록, 땅값은 점점 더 올라 서민들은 땅으로 인해 더욱 살아가기 힘들어질 것이다. 부동산 관련 세금을 낮추는 것은 단지 땅 부자들에게 혜택을 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서민들의 부담이 커지게 된다.  그래서 시장 경제와 사유재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우리나라도 헌법 제123조, 민법 제2조, 민법 제212조를 통해 토지공개념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②사회 정의, 경제 정의가 무너지면 하나님 절대 신앙도 반드시 무너진다.
하나님이 신, 구약을 통해서 사회 정의와 경제 정의를 그토록 강조하셨던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인간 사회의 공의가 근본적으로 무너지면 더 이상 하나님을 바로 믿는 신앙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난해 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가난해졌든(심지어 자신의 게으름으로 인한 것일지라도) 사람이 최소한의 생존 기반을 스스로 얻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그는 단지 생활로만 예속되는 게 아니라, 그의 모든 생각, 감정, 당연히 신앙까지도 예속되고 만다(삿 6:2~6→6:30~31). 자신과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주인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주인이 진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특히 고대 시대에는 땅이 절대적이었다. 땅을 잃으면 인신이 예속되고 신앙도 지킬 수 없다(삿 17:9~12, 18:18~20, 대하 31:4, 느 5:1~13). 그래서 이스라엘 제도와 희년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토록 땅을 지켜주려 했던 것이다.

현대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사람이 벤츠를 타든, 마티즈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자존심은 상할지라도 예속되지는 않는다. 최신형 에어컨을 가졌든, 선풍기를 가졌든, 부채 밖에 없든 사람은 그것으로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에 수 백 만 채의 집이 있어도 내가 들어가 살 집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집 가진 사람들에게 휘둘려 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동산을 바로 지키는 것은 하나님 절대 신앙을 지키는 것에 직결된다. 그래서 선지자는 양심 없는 부동산 부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사정없이 저주를 퍼붓는다.(사 5:8~9) 땅을 사사로이 사고파는 지도층 인사들에게 진노하신다.(호 5:10) 땅은 모두를 위한 선물이며, 하나님은 분명히 토지공개념을 가르치신다.(전 5:8)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절대 신앙은 그저 종교적인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 평등과 인권의 인간적 가치를 지키는 사회/경제적인 의미로 연결된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한편에선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수 24:14, 23)는 배타적 절대 신앙을 부르짖으면서도, 동시에 공평과 사회 정의를 실천할 것을 그토록 부르짖었다.(사 58:6~7, 암 5:21~24) 이 두 목소리는 선지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이 동시에 부르짖어야할 것이었다.

제도로 뒷받침되지 않는 말만의 해방은 헛것이다.(약 2:14~17)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이 법적으로는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땅도, 재산도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없는 흑인들은 어제의 주인에게 예속되어 다시 남부에서 농업 노동자가 되거나, 북부로 가서 산업 노동자로 새 주인을 섬겨야 했다. 풍요와 자유를 찾아 남녘으로 찾아온 탈북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서도 예속될 수밖에 없음을 느끼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남한의 자본주의 일변도의 통일이 되면 북녘 형제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지극히 선언적인 것일 뿐 결국 남쪽 1등 국민에게 예속되는 2등 국민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 하나님은 그가 어떤 이유로 가난해 졌든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가난의 대물림이나 구조적 양극화는 막으신다. 또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이 무너지는 것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사진 출처 한국 카리타스)  
 
하나님은 그가 어떤 이유로 가난해 졌든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가난의 대물림이나 구조적 양극화는 막으신다. 또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이 무너지는 것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희년법과 구약의 많은 공동체법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어떤 사람들은 희년제도가 그저 영적 상징이거나 이미 흘러간 옛 사상일 뿐이라고, 또는 이스라엘에서 지켜진 것이 없는 죽은 제도일 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확인해 보면 그건 어불성설이다. 나봇은 하나님의 법(희년법)을 근거로 자기 자손들에게 분배된 토지를 팔 수 없다고 아합 왕에 말하였고, 그것을 알고 있는 아합 왕도 아무리 폭군일지라도 감히 그것을 맘대로 빼앗을 수 없었다(왕상 21:1~4). 선지자 예레미야도 자신의 예언 사역 가운데 희년법에 근거를 둔 친족의 무를 권리를 행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으며(렘 32:6~15) 동족들을 종으로 잡는 것이 희년법의 위반임을 들어 백성들을 책망하였다(렘 34:8~17). 느헤미야도 포로 귀환 후 예루살렘을 재건하면서 최초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안식일·안식년·희년법의 근거 위에 사회 기초를 놓을 것을 서약하였다.(느 10:31) 무엇보다 희년법의 배경이 없었다면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룻과 보아스의 극적인 이야기는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룻 2:20, 3:9~13, 4:1~10) 우리 예수님도 희년정신을 근거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고치셨다.(눅 4:16~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유재산 제도가 희년법보다 앞선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지금껏 교회를 많이 부흥시켰든, 유명한 설교자든, 한국 교회사에 빛나는 원로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유일 신앙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키기 싫으니 영적 상징이다, 그저 교훈일 뿐이다, 이미 없어진 법이다, 우기는 것이다.(렘 35:14) 우리에게 하나님나라 사상이 흐려질 때 사회적 불의와 공평이 깨어진다.(왕상 21:5~14) 하나님의 법은 믿음으로만 지킬 수 있다. 그러므로 희년의 토지법은 단지 사회 정의법에서 그치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영적인 원리다. 하나님나라의 공의 선언은 신앙 선언이다.

(2-3)공의로운 구약 율법들을 통해 선민 이스라엘을 지키셨다.

우리는 구약법 하면 심술궂은 조물주의 불필요한 간섭, 속박 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구약법의 실상을 살펴보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인간 해방이며, 자유의 법임을 알 수 있다. 사회의 도덕성과 공의로움은 단지 개인들의 착한 성품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절대 신앙을 정점으로 만들어지는 공동체적 고결성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율법은 개인적 도덕법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공동체적 언약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선민 이스라엘의 건강성을 유지시킨다.

고아나 과부, 떠돌이 나그네 같이 기댈 데 없는 이웃을 억울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울부짖음을 반드시 듣고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출 22:21~23) 재판하는 사람은 숫자나 권력, 뇌물 등에 흔들리지 말고 공명정대하게 판결해야 할 것이다.(출 23:6~9) 오늘날 우리는 공동체적 축제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모든 종교적 절기는 혼자서만 즐기는 개인적 기념일이 아니라, 모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해야하는 약자 배려의 축제날이었다.(신 14:26~27, 16:11,14~15).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든 말든 내 기분에 달린 게 아니라, 반드시 하지 않으면 도리어 죄가 될 것이다.(신 15:7~11)

요즘 한창 사형 폐지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지금부터 수 천 년 전에 기록된 구약법에는 사람을 죽인 사람에 대한 인권적인 보호 조처까지 언급하고 있다. 바로 도피성 제도다. 벌목을 하러 갔는데 뜻하지 않게 도끼날이 빠져 하필 동료를 맞춰 죽게 되는 일이 생긴다. 범인(?)은 고의가 아니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을 때는 죽은 이의 가족 등에 의해 사사로이 살해당할 수도 있다. 그럴 때 그는 도피성으로 가서 그 사정을 털어놓고 보호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가 있을지라도 도망가는 길이 멀거나 험하거나 찾기 어려우면 가는 도중 잡혀 죽을 수도 있으니,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도로를 넓게 닦고 전국 각처에 널리 분산시켜 놓을 것을 명령하고 있을 정도다.(신 19:1~13, 수 20:1~6)

수 천 년의 시대, 문화적 격차가 무색하게 오늘날에도 시사성을 충분히 갖고 있는 금융과 대부에 대한 규례를 신명기 24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오늘날 대부나 금융 기관의 담보 대출은 가난한 자의 형편을 도우려는 본래 목적에서 심각하게 벗어나, 빚의 함정에서 허덕이게 만드는 가난의 악순환 고리가 되고 있는데 구약의 정신에 따르면 그러한 제도는 원인 무효다. 기업주가 기억해야할 규례도 있다.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정당한 품삯을 주도록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하나님에 대한 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동일 노동에 대한 차별 대우(비정규직 문제, 남녀차별 문제,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와 체불 임금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할 것인지 시사 받을 수 있다. 다시 강조하건대 공평성이 무너지고 빈부격차가 격화되면 공동체성과 사회적 건강성은 무너지고, 바른 신앙도 자리 잡을 수 없다.

구교형/희년토지정의실천운동 전문위원·성서한국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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