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하나님의 간절한 '소통' 의지의 결과
교회, 하나님의 간절한 '소통' 의지의 결과
  • 김회권
  • 승인 2008.09.3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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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소통하는 그리스도인(1)

현대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오늘날의 기독교 위기를 두 가지로 규정한다. 그것은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와 상관성 위기(또는 현실 적합성, relevance crisis)다. 몰트만에 따르면 이 위기는 십자가에 달려 세상의 죄와 고난을 초극하고 새 생명을 선사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난과 세상 관여적인 열정을 주목하는 십자가의 신학을 외면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써 구원을 받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함으로써 세상 구원을 위한 거룩한 수난 대열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위기라는 것이다. 교회는 옆구리에 뻥 뚫린 창 자국을 가진 채 물과 피를 쏟아내는 그리스도의 몸처럼 자신을 거룩하게 희생시킴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런데 신학과 교회가 ‘오늘의 문제들’에 관여하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그들 자신의 기독교적 정체성의 위기에 말려들며, 그들이 전통적인 교리들, 권리들, 도덕적 개념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주창하면 할수록 현실 참여는 더욱 더 어설퍼진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 같은 이중적 위기의 결정체인 ‘십자가 고통’에 대한 숙고와 그것에의 참여만이 기독교적 정체성과 현실 적합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정체성의 위기'와 '상관성의 위기'에 처한 현대 교회

몰트만이 말한 정체성의 위기란 세속 사회 안에서의 교회됨, 곧 그리스도인 됨의 위기다. 교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애매모호해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과연 특정 종교를 믿고 특정 교리를 추종하는 이해집단인가? 아니면 보편적인 진리의 기둥과 터인가? 다원주의적인 현대 사회에서 유일무이하신 거룩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돈키호테적인 유아 정신의 발로인가? 아니면 세계 만민을 구원할 비장한 고백인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기독교 유신론적인 세계관을 의심하고 대적하는 다원주의적 세속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하지도 못하고 기꺼이 내세우지도 못하는 형국에 놓여 있다.

그래서 세속 사회와 교회의 다름, 그리스도인들과 세상 사람들과의 다름이 불분명해지고 있다. 교회의 거룩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가 너무 세속화되어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에 작동하는 세계관의 법칙에 따라 지배당하고 있기에 정체성의 위기는 교회 자신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이 교회를 통해 구원에 참여하도록 예정된 세상으로서도 실로 손해가 크다.

이에 비하여 상관성의 위기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자기에게 맡겨진 신앙의 비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세상을 복음화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어려움이다. 교회는 세상과의 건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세상 관여적이 되어야 하고 세상 참여적, 세상 변혁적인 입장을 취하여야 한다. 상관성은 교회가 어떤 점에서 세상에 요청되는 기관이며 왜 세상은 교회의 복음 선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여기에서 바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믿지 않는 세상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정체성 회복'과 '소통 기능 회복'은 동전의 양면

이 두 가지 위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교회가 바른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만이 세상과의 소통과 상관성 구축에 가장 효과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다룰 '세상과 소통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는 '결국 교회의 정체성과 상관성의 위기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극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는 이 강의에서 먼저 세상 안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자리(위치, 사명)를 고찰한 후 세상과 소통하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세 가지 방식은 복음 전도적 소통(evangelical communication), 중보자적 소통(intercessory communication), 그리고 변증적 소통(apologetical communication)이다.

복음 전도적 소통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알리고 가르치고, 경험케 하고(치유 사역과 축사 사역), 청중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하여 회개로 응답하도록 만드는 소통이다. 중보자적 소통은 세상의 탄식과 아우성을 흡수하여 하나님께 중보하는 소통이다. 그것은 성육신적인 공감이요 체휼의 사역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철학과 세계관을 이용하여 기독교 신앙 진리를 변증하고 옹호하고 소통하는 변증적 소통이다. 변증적 소통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유포되어 있는 개념들이나 사상, 혹은 시행되고 있는 관습들과 제도들을 발판삼아 하나님나라와 복음을 증거하고 체험케 하는 과업이다.

먼저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소통을 중개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소통 사명을 살펴본 후, 교회 정체성의 본질인 신앙고백 혹은 신앙고백적 삶의 우선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소통의 핵심

이스라엘 백성이 세계 만민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았을 때 그것은 자신만의 구원을 위한 부름이 아니라, 온 세계 만민이 하나님의 구원과 복에 참여하도록 매개하는 구원 매개자(channel of salvation), 복 매개자(channel of blessing)로의 부르심이었다(창 12:1-3; 출 19:5-6; 레 11:44-45; 18:3-5; 19:2; 20:7-8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8절]; 요한복음 15-17장).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열방의 신들과 전혀 다른 거룩하신, 즉 질적으로 도저히 유비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이시기에(시 89:1-5) 당신을 피조 세계에 대표하고 반영할 한 거룩한 백성을 창조하셨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였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 세상에 증거 하기 위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했다. 모세오경 내내 거룩한 백성에게 요구된 과업은 그들이 이전에 살았던 애굽 풍속과 종교와 급진적으로 단절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들이 살게 될 가나안 땅의 풍습과 종교와의 과격한 분리였다.

그런데 이 분리는 전략적인 분리였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해 이 땅에 구현될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와 구원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점에서 거룩은 “전체로부터 분리되었으나”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백성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도 거룩한 공동체다(벧전 2:7-9).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 정체성이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대(對)세상적 소통 문제의 핵심이다.

거룩한 하나님은 지존무상하여 홀로 높은 데 거하시지만 또한 심령이 부서져 구원을 열망하는 가난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기 위하여 몸을 구부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육신적 자기 하강을 감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사 57:15) 거룩하신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초월적 무관심의 신도 아니요 스토아 철학에서 만나는 비인격적인 세계 이성도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죄인과 상처받은 피조물에 대하여 부성애적 보호와 모성애적인 돌봄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 사랑의 모험을 감행하시다가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 신성모독적인 폭력과 불순종에 의하여 상처를 입으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a vulnerable God)

   
 
  ▲ 김회권 교수.  
 
소통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넘치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소통을 원하신다. 소통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소통과 연합, 교제 속에 계신 삼위일체적 소통의 하나님이시다. 실상 이 세상과 인간 창조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소통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은 태초에 소통이 있었다는 말이다.(빌 2:6-11; 요일 1:1-4)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가 삼위일체적 소통이기에 이 소통에 참여할 피조물을 창조하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소통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의사소통을 대행할 예언자들을 파송하셨다. 마침내는 당신의 말씀(성자, 아들)을 육신이 되게 하셔서 이 세상에 파송하기까지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의지, 지성, 감정을 완벽하게 대변하는 대리자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정의를 담보한 말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신다. 이 간절한 하나님의 소통 의지의 결과 교회가 창조되었다. 육신이 되어 오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약에 약속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다. 이 신앙고백이야말로 교회의 핵심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 예수의 주되심과 하나님 아들되심에 대한 고백은 혈육의 분투로 이뤄지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 성령의 계시와 조명으로만 가능하다(마 16:16-19; 고전 12:3). 이런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성육신적 소통 의지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심으로 구체화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소통의 중추 기관인 셈이다. 교회의 본질은 나사렛 예수를 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은 세 가지 소통(복음전도적 소통, 중보자적 소통, 변증적 소통)을 통해 구체화된다.

김회권 교수 / 숭실대 인문대 기독교학과

* 이 글은 '세상과 소통하는 그리스도인’을 주제로 제49회 언더우드 학술 강좌에서 김회권 교수가 발표한 소논문입니다.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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