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사람 마리오' 대신 '새들백 샘'만 찾는 메가처치
'옆집 사람 마리오' 대신 '새들백 샘'만 찾는 메가처치
  • 신광은
  • 승인 2008.10.02 14: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격 부재 현상', 메가처치의 최대 병폐

계시론이란, 진리가 무엇이냐, 그리고 우리가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보존하고, 또 어떻게 전하느냐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다. 때문에 진리가 기독교회 안에서 올바르게 보존되고, 선포되고, 실천되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진리를 잃어버리면 기독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메가처치 안에서 기독교 계시, 곧 진리는 우연적으로나 필연적으로 왜곡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번 글에서 메가처치 내에서 빚어질 수 있는 진리의 왜곡 문제를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 메가처치의 인격 부재 현상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진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리스적 진리 vs. 히브리적 진리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세계는 신보다 앞선다. 그리스 사상의 오랜 전제는 세계가 영원하다는 것이다. 먼저 세계가 있고 그 다음 신이 있다. 따라서 진리는 신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세계의 질서, 구조, 근원과 관련이 있는 어떤 것(something)이다.

이 때문에 최초의 철학자들은 세계의 근원, 곧 아르케(Arche)를 찾았으며, 소크라테스는 만물들의 본래스러움으로서의 덕(Arete)을, 플라톤은 본래적인 존재와 세계로서의 이데아(Idea)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 속의 존재로서의 본질(Essentia)을, 그리고 스토아주의자들은 온 세계에 충만한 세계 이성(logos)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언제나 ‘진리는 무엇이냐?(What is the Truth?)’라고 묻고 다녔다. 때문에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진리란 본성적으로 비인격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는 변증, 추론, 사유, 관조 등과 같은 도구와 수단으로 캐낼 수 있는 어떤 것(something)이다.

한편,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신은 세계보다 앞선다.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전제 중 하나는 세계는 창조되었으며, 야훼는 영원하시다는 것이다.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먼저 야훼가 있고, 그 다음 세계가 야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진리는 세계가 아니라 야훼에게서 찾아야 한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야훼의 ‘뜻(will)’이다.

때문에 진리는 본성적으로 인격적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진리는 누구냐?(Who is the Truth?)’고 물었다. 진리는 인격이다. 진리란 야훼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요, 감정이며, 의지며, 진리는 야훼 자신이다. 때문에 진리는 어떤 수단을 가지고 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야훼가 알려주시는 것이다. 야훼께서 알려주시기 전까지 진리는 알 수 없다. 때문에 진리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며, 사람들은 야훼께서 알려주신 진리를 일컬어 계시(revelation)라고 한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찾아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야훼께서 알려주실 때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은 그저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가 야훼께서, '들으라(shema)'라고 하실 때가 온다. 이때가 야훼께서 말씀하시는 시간이고, 은총의 시간이며, 구원의 시간이요, 생명을 얻는 시간이다. 그때 인간은 엎드리며,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이 진리를 아는 방법이고, 계시를 받드는 올바른 태도다.

진리가 인격적이기 때문에 유대-기독교는 큰 곤경에 처한다. 그것은 진리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확실하지 않다기보다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야훼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내려다보거나 조망할 수 없다. 우리는 엎드려서 위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듣는 종교’로서의 유대-기독교는 야훼께서 들려주시는 것만 알 수 있으며, 그래서 인간은 바울의 말대로 언제나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다. 마음은 움직인다. 그래서 진리도 고정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진리가 수시로 바뀌거나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야훼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야훼의 신실하심은 고정불변의 원칙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불순종할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도 다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도대체 진리는 고정적이지 않고, 정확하지도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인간은 늘 오해한다. 이것은 바른 이해를 싫어하는 완악한 인간의 마음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진리가 인격이고, 또 진리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이기도 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하물며 야훼의 판단과 그의 길을 뉘라서 감히 다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

진리가 인격적이기 때문에 히브리적 진리와는 대화와 상호교통이 가능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인간의 반응에 따라 좌우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는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어떤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일방적이다. 진리는 스스로 명백하며, 자명(自明)하다.

태초부터 자명한 진리이기 때문에 대화나 교통이 불가능하다. 진리는 홀로 진리며, 인간은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인들의 진리와 대화하거나 교통할 수는 없다. 때문에 진리를 발견한 인간들은 ‘유레카!’를 외치며 기뻐할 뿐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진리가 선포될 때 ‘아멘’이라고 화답한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대화다. 진리는 인간의 반응을 요구하며, 요청한다. 진리는 자명하다기보다는 상호적이다. 진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그래서 진리의 가장 온전한 형태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인간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고, 사랑의 응답을 요구하신다. 때문에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명제’의 형태를 띠지만,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항상 ‘언약’의 형태를 띠는 것이다.

   
 
  ▲ 토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다. 이 목소리가 돌에 새겨지고, 책에 기록되어 토라가 되었다.  
 
행동으로 계시된 구약의 하나님

구약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역사, 토라, 그리고 선지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세 가지 수단을 통해 진리, 곧 자신을 계시하셨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역사(history)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어떻게 역사를 통해서 계시하시는가.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행동하셨으며, 이 행동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6일 만에 창조하셨고, 홍수를 일으키셨으며, 바벨탑을 무너뜨리셨고,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셨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자기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발하실 때마다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의 행동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며,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토라를 통해 훨씬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역사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토라는 분명하고 확실하다. 왜냐하면 토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선포되기 때문이다. 토라가 선포되던 날 천지는 어두워지고, 땅은 갈라지며, 천사들의 경축 나팔소리가 온 세상을 뒤흔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토라를 선포하시기 위해서 ‘몸소’ 시내산 꼭대기로 강림하셨고, 산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히 ‘육성으로’ 당신의 뜻을 말씀해 주셨다. 이것이 토라다.

토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다. 이 목소리가 돌에 새겨지고, 책에 기록되어 토라가 되었다. 하지만 토라의 본래 모습은 야훼의 목소리였다. 하나님께서는 토라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다. 토라는 명제집이나 규범집이 아니다. 토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쌍방이 맺은 언약이고 계약이다. 즉 토라는 일종의 혼인 서약이다. 하나님께서는 토라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셨고,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에 반응하여 자신들을 내어놓음으로 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토라 안에 두 인격의 만남이 있다.

세 번째로, 선지서다. 선지서는 토라를 재해석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재해석했을까? 그것은 토라가 오해되었기 때문이다. 토라는 금세 명제집이나 규범집으로 오해되었다. 계시의 인격성과 언약적 상호관계성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토라는 법조문으로 오해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니라 토라 자체를 숭배하게 되었다. 성전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성전의 돌들과 기구들을 예배하게 되었다. 제사 자체가 신성한 마법이라도 있는 양 제사만 드리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하고 제멋대로 살았다. 하나님을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만든 것이다. 선지자들은 이 오해를 바로잡고자 토라를 재해석해주었다.

선지자들은 토라가 ‘하나님의 목소리’요 ‘하나님의 인격’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제사나 성전, 법조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촉구했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마음의 교통을 원하신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선지자들은 외쳤다. 그들은 토라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담긴 하나님의 속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선지자들은 토라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본마음을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목소리로 토라 속의 하나님의 속뜻은 ‘공의(tseh'-dek)’와 ‘자비(kheh'-sed)’라고 선포했다. ‘체데크’와 '헤쎄드', 이것이 토라의 진짜 내용이고, 토라를 통해 말씀하고자했던 하나님의 본래 의도라는 것이다. 공의롭고 자비롭게 '사는 것'이 토라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 그들은 말했다.

이처럼 구약성서에 따르면 진리는 하나님의 뜻이고, 마음이고, 인격이며,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진리를 알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추론이나 변증, 사유, 성찰, 비판, 관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함으로써만 진리를 알 수 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를 사는 것이다. 토라 안에는 하나님의 인격이 담겨 있으며, 그 토라는 우리의 인격 안에 들어와 우리의 몸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성서는 읽는 책이 아니라 먹는 책이다. 구약시대의 말미에 성서를 먹고 성서가 완전히 자신의 몸이 된 사람이 나타났다.

예수의 몸으로 계시된 신약의 하나님

구약성서는 반복적으로 진리가 인격이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신약은 아예 진리가 사람이라고 증언한다. 진리가 누구인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가 진리다! 예수가 진리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단순히 예수의 ‘말(word)’이 진리라거나, 예수 안에 진리가 있다거나, 예수가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뜻을 넘어선다. 예수가 진리라는 말은 예수 자신이 진리라는 말이다. 예수가 진리라서 예수의 말도 진리가 된다. 예수는 단순히 진리의 운반자가 아니다. 운반자와 진리는 구별되지 않는다. 운반자가 바로 진리다. 마샬 맥루한식으로 표현하자면 미디어(media)가 곧 메시지(message)인 것이다.

예수가 진리라는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예수의 몸(body)이 진리라는 말이다. ‘예수의 몸이 진리’라는 것은 영지주의자들과 치열하게 싸웠던 요한의 중요한 신학이다. 요한일서 1장 1절은 이렇게 말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은 말하기를, 자신은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주목하고, 심지어 진리를 ‘손으로 만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생명의 말씀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몸’인 것이다.

요한일서 4장에서 요한은 영분별의 기준을 제시한다. 진리의 영과 거짓 영을 분별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느냐의 여부다. 그리스도에 대한 온갖 가르침과 깨달음도 그리스도의 몸보다 중요하지 않다. 가령 마르시온이라는 초대 교회의 이단자는 ‘예수는 사랑이시다’는 가르침을 누구보다 강조했다. 예수의 사랑의 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그는 예수가 구약의 야훼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가서 이단이 되었다.

그런데 마르시온의보다 심각한 오류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누구보다 예수의 신성을 강조했고, 예수의 가르침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결정적인 오류는 예수의 ‘몸’을 부인한 것이다. 가현설주의자들은 예수가 ‘실제 몸(real body)’이 아니라 ‘이미지’ 그러니까 ‘가짜 몸(unreal body)’로 오셨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예수의 진짜 몸을 부인했기 때문에 이단이 되었다.

예수의 몸이 메시지요, 진리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예수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원하셨다. 예수는 이 한 말씀을 하시고자 몸으로 오신 것이다. 굳이 ‘몸’으로 오실 필요가 있었을까? 굳이 어린 아이로 태어나실 필요가 있었을까? 굳이 세상에서 33년간이나 사실 필요가 있었을까? 뭣 때문에 굳이 예수께서 ‘몸소’ 사람의 몸으로 오셔야 했을까.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정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친히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보내실 수밖에 없으셨다는 것이다. 선지자나 천사가 아니라 독생자께서 ‘몸소’ 오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전하기 원하셨던 메시지의 핵심이다. 그래서 예수의 ‘몸’은 메시지의 핵심이 된다.

예수의 ‘몸’은 복음의 기초다. 만일 예수가 진짜 몸이 아니라 단지 이미지로 오셨다면 어떻게 되는가? 아마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근사한 영화 작품으로 전락할 것이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타인을 위한 희생의 숭고함을 주제로 한 멋진 드라마요, 아름다운 예술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한 십자가와 부활 드라마는 감동과 교훈은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실제 삶의 곤경과 고통, 질병, 죽음, 죄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 그저 교훈과 감동, 메시지로 만족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몸으로 오셨고, 몸으로 사셨고,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또 몸으로 부활하셨다. 이 모든 것은 진짜다. 쇼가 아니다! 예수의 몸이 ‘진짜 몸(real body)’이라는 사실은 십자가와 부활을 실제가 되게 하며, 실제로 능력 있게 한다. 그래서 예수의 몸이 복음이다.

예수께서는 ‘몸소’ 구유에 나심으로 겸손을 가르치셨고, ‘몸소’ 죄인들과 식사를 나누심으로 용서를 가르치셨으며, ‘몸소’ 제자들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으며, ‘몸소’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 순종을 가르치셨고, ‘몸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희생을 가르치셨고, ‘몸소’ 피 흘리심으로 대속을 보이셨고, ‘몸소’ 부활하심으로 몸의 부활을 보이셨다. 이 모든 것들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몸으로 증거하신 진리들이다. 예수는 진리를 몸으로 사셨다. 그래서 예수의 몸이 진리요, 메시지다.

이제 이 진리는 제자들에게 위탁된다.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과 똑같이 예수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요17:18, 20:21) 제자들은 단순히 말하라고 보냄 받은 자들이 아니다. 예수와 똑같이 ‘몸소’ 진리를 드러내도록 보냄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이 전하는 말과 신앙하는 내용을 몸으로 증거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요, 지체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들의 현존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며, 그들은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을 드러내야 한다. 제자란 그리스도를 따르고 모방하는 자들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about)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몸으로 재육화(re-incarnation)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교회가 진리를 간수하고, 전수하는 방식이다.

   
 
  ▲ 예수의 몸이 ‘진짜 몸(real body)’이라는 사실은 십자가와 부활을 실제가 되게 하며, 실제로 능력 있게 한다. 그래서 예수의 몸이 복음이다.  
 
추상화의 오류에 빠진 교회

그리스도의 ‘몸’이 진리라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은 빠르게 오해되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추상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화되었다. 사물화의 경향은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초대 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를 굳게 붙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그리스도의 인격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몸’ 자체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특히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숭배하는 현상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났다. 예수께서는 높임을 받으시기를 거절하시고 사람과 똑같은 몸으로 오셨건만, 가톨릭교회는 반대로 예수의 몸을 신성화하고, 숭배하게 된다.

아주 일찍부터 ‘성체 숭배’ 현상이 나타나서,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부적, 불사의 약, 축귀의 수단이 된다. 라테란 공의회가 공포한 화체설 및 미사의 신학은 기독교 계시의 사물화의 극단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성체 및 미사와 관련하여 온갖 미신과 우상숭배, 타락이 중세를 휩쓸었다.

한편 추상화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해서 먼저 나타났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전한 가르침, 특히 산상수훈과 기타 여러 교훈들은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teaching)은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존숭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진리를 ‘말하는 자(messanger)’였다. 그들은 예수가 전해준 ‘말’을 숭배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몸은 중요하지 않았다.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의 진리는 책으로 기록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최초로 신약의 정경화 작업을 시도한 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들은 ‘책의 종교’를 신봉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통 교회마저 영지주의자들의 이러한 추상화 오류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점차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기독교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객관적인 교의(dogma)와 신조(creed)를 확립하고자 했으며, 항구불변의 ‘정통(orthodoxy)’를 확정하고자 했다. 신학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점차 히브리적 진리관은 그리스적 진리관으로 변모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진리는 명제로 표현되고, 수집되고, 보관되게 되었다. 이제 신학은 ‘참된 철학(true philosophy)’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주의(dogmatism)는 개신교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독교 계시론의 사물화와 추상화는 서로 반대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둘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격 부재’의 현상이다. 때문에 자주 이 두 가지 상반된 현상은 동시에, 서로 뒤엉키어 나타났다. 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일관된 가르침은 진리가 인격이라는 것이다. 진리란 인격으로부터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인격에서 분리된 토라(Torah)는 죽은 문자에 불과하며, 인격에서 분리된 성체(body of Christ)는 우상으로 전락하고, 인격에서 분리된 예수의 가르침(messange of Christ)은 비전(秘典)으로 미신화된다. 기독교 진리는 인격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인격을 통해서만 증거 되며, 인격 그 자체가 기독교 진리의 일부를 형성한다.

   
 
  ▲ 메가처치에는 사람도 없고 이웃도 없다. 이웃이 없으니 메가처치는 이웃에게 전도하지 못한다. 메가처치의 전도방식은 추상적인 구도자(seekers)를 타겟팅하는 것이 되었다. ‘옆집 사람 마리오’가 아니라 릭 워렌이 발견한 ‘새들백의 샘’이 메가처치의 관심 대상이다.  
 
메가처치의 인격 부재 현상

메가처치의 가장 큰 문제는 인격 부재 현상에 있다. 최소한 메가처치는 두 가지 이유로 인격 부재 현상을 피할 수 없다. 첫째로 메가처치는 ‘크기(size)’ 때문에 인격 부재 현상을 촉발시킨다. 통상 3,000명 이상의 교회를 메가처치라고 할 때, 이러한 규모의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그리고 성도와 성도들 사이에 거리(distance)와 간격(gap)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이 거리와 간격이 인격 부재 현상을 촉발시킨다. 메시지를 선포하는 설교자와 그것을 듣는 청중들 사이의 거리와 간격은 너무도 멀어져서 메시지의 전달은 점차 원격 커뮤니케이션(tele-communication)이 되어 간다.

목사는 멀리서 말씀을 전하고, 청중들은 멀리서 듣는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에서 목사와 성도들 간의 사적(私的) 관계는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는 노이즈(noise)로 여겨질 뿐이다. 메가처치 내에서 기독교 계시는 순수한 메시지로 정제되며, 이 과정에서 목사와 성도, 성도와 성도들 간의 사적 관계도 정제되어 걸러진다.

둘째로, 메가처치 내의 인격 부재 현상은 교회 밖의 영향 때문에 더욱 배가된다. 안톤 지더벨트는 현대 사회를 가리켜 추상적 사회(abstract society)라고 불렀다. 추상적 사회 속에서 모든 인간과 사물은 순수한 추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가령 방송국 PD의 입장에서 시청자란 실제 사람이 아니고, 시청률로 잡히는 순수한 숫자다.

엘룰 식으로 말하면 추상적 사회에서 ‘옆집 사람 마리오’는 사라지고, 시청자, 유권자, 소비자, 고객 등 추상적 존재만 남는다. TV나 영화 속의 연예인들의 경우도 추상적 사회 속에서 그들의 존재 방식은 ‘이미지’에 불과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메가처치는 걸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추상적 사회의 세속적 조류가 메가처치 안으로 그래도 밀려들어온다.

메가처치는 추상적 사회에 존재하는 교회다. 메가처치 안에 사람은 없고 추상적인 기호들만 존재한다. 그래서 메가처치에는 이웃이 없다. 메가처치가 인기 있는 이유는 이웃이 없기 때문이다. 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깔끔하게 신앙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메가처치를 찾는다. 참으로 쿨(cooooool)~한 교회다. 메가처치 안에서 교인은 거대한 몹씬(mob scene)을 연출하는 점들의 집합이고 웅장한 이미지다.

그러나 메가처치에는 사람도 없고 이웃도 없다. 이웃이 없으니 메가처치는 이웃에게 전도하지 못한다. 메가처치의 전도방식은 추상적인 구도자(seekers)를 타겟팅하는 것이 되었다. ‘옆집 사람 마리오’가 아니라 릭 워렌이 발견한 ‘새들백의 샘’이 메가처치의 관심 대상이다. 추상적 평균인으로서의 새들백의 샘이 메가처치의 교인들이다. 만 명이 모이는 메가처치에는 만 명의 새들백의 샘이 출석하고 있는 셈이 된다.

문제는 메가처치가 이러한 인격 부재 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인격 부재 현상은 ‘교회가 커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일’쯤으로 치부된다. 진리의 인격성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되어야 할 ‘값싼 감상주의’쯤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만일 진리가 인격과 분리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진리가 없다면 기독교도 없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가처치는 이런 심각한 결과에 대해서 거의 자각 증상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메가처치의 인격 부재 현상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진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신광은 / 열음터공동체 목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