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광기에 저항하는 신앙고백
세상의 광기에 저항하는 신앙고백
  • 김회권
  • 승인 2008.10.08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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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소통하는 그리스도인(2)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계 역사는 사상과 이념의 건축 과정이다. 세계사에 출현하였던 전제 군주들은 피와 폭력으로 그들의 성채와 호화로운 궁궐들을 건축한다. 인간 건축가들과 반대되는 방향이긴 하지만 하나님도 당신의 집을 건축하신다(엡 2:20-22; 이사야 28:16).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건축가들이 버린 돌을, 즉 강력한 로마제국의 총독이 처형시킨 그 남자를 새로운 건물의 모퉁이돌로 사용하셨다(벧전 2:7). 그 위에다 그는 인간의 궁궐이나 성채들과는 전혀 다른 한 신령한 집을 세우신다. 그 신령한 집은 살아있는 돌, 즉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들의 인격(신앙고백)들로 건축된다. 이 영적인 집을 세우시는 방법은 인간의 건축 방법과 완전히 반대된다.

버린 돌로 역사를 건축하시는 하나님

여기서는 세상의 건축물과는 달리 인간 벽돌이 서로 겹쳐(連絡) 쌓여진다. 세상 건축가들의 눈에 볼 때는 지극히 위태로워 보이는 겹쳐 쌓여진 돌들의 연락(連絡)으로 지탱되는 건물은 땅 밑에 박혀 있는 거대한 기초석에 의하여 지탱된다.

전체 건물을 떠받치며 가장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석층 주위를 선지자와 사도들이라는 마름돌이 에워싼다(엡 2:20-22; 요한계시록 21:14). 여기서 기초석 위에 건축된 신령한 집의 견고성은 살아있는 돌(신앙고백자)들의 연락, 즉 인격적인 신뢰와 위탁에 의하여 확보된다. 겹쳐 쌓여져 있지만 인격적인 신뢰와 상호 위탁으로 연락될 때 이 신령한 집은 가장 견고한 구조물이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인간적 조직이나 결사체와는 판연하게 구별된다. 교회가 주식회사, 동창회, 향우회, 가족, 국가 등 어떤 자연적 혹은 인위적 결사체들과 구별되는 까닭은 교회의 머릿돌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직할 통치를 받는 거룩한 식민지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고백 위에 건축되어 있다. 한 지역 교회가 부패하여 치리를 받고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수는 있어도 보편적인 공교회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교회의 머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현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현실 교회가 비록 아무리 실망스럽고 흠결이 많은 인간적인 모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직할 통치를 받고 있는 거룩한 식민지다. 이 세상 한복판에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3일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신앙고백 위에 건축된 교회는 로마 제국보다 강하고 어떤 지상의 초강대국보다 더 강하다. 이처럼 교회의 본질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당하신 나사렛 예수가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승천하셔서 세계를 통치하고 계시는 현재의 주라는 것을 믿는 신앙고백이다.

마태복음 16:13-15에서 예수님은 로마 황제 가이사(Caesar)를 주(主)요 신의 대리자(혹은 신)로 고백하는 가이사랴 빌립보(가이사의 은총으로 유지되는 도시 빌립보)에서 "누가 이 세상의 참된 주(主)인가"를 물으신다(참조. 눅 3:1-3). 이 본문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항상 이 가이사랴 도상의 질문으로 소환된다. 누가 과연 이 세상과 개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주재하는 주인가. 대한민국을 다스리는 주는 누구신가. 21세기를 주재하고 세계 운명을 향도하실 만왕의 왕은 누구신가. 대학의 미래를 결정하실 결정적인 주권이 누구에게 귀속되어 있는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다. 먼저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알고 있는지 물으신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제자들은 무리들의 예수 이해를 요약하여 답변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절). 참으로 정확한 관찰이었다. 세례 요한과 같은 폭풍 치는 듯한 격한 회개 요구 설교와 하나님나라운동 때문에 예수는 세례 요한과 겹쳐 보였을 것이다. 또한 예수는 일찍이 나사렛 첫 회당 설교를 마친 후 경악과 불신앙을 드러낸 청중들에게 자신을 외국인 사르밧 과부에게 인정받고 영접 받은 엘리야와 비교한 적이 있다.

엘리야는 시대의 중심 세력과 갈등을 빚던 고독한 예언자였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기적으로 민중들의 희망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아마도 이스라엘의 부패와 탄식, 특히 성전 체제의 부패와 타락을 두고 예레미야처럼 반성전적인 설교를 토해내셨을 것이며 눈물로 중보 기도하셨을 것이다. 이 모든 면모가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프로파일을 완성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대중적인 단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은(강조 2인칭 복수대명사)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라고 물으셨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다(아포크리데이스 데 시몬 페트로스 에이펜. 쒸 호 휘오스 투 데우 투 존토스=당신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God of the living]). 베드로의 이 고백은 “당신 자신이야말로 그 그리스도,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마태복음 16:16의 베드로의 고백을 쉽게 풀면 다음과 같다.

신앙고백 위에 세워지는 교회

“당신은 성경에서 오랫동안 약속되어온 하나님의 대리자(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을 완전하게 대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순종해드리는 신적인 왕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주 중요하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이며 세계는 그의 명령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다(눅 2:1-2; 참조 행전 16:31)는 점을 고려하면,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로마 제국 지배권에 대한 대항 명제였던 셈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계의 주라고 고백한 것이다.

초대 교회는 이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왕권을 공공연히 선언하다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요한계시록 4-5장, 13-14장). 지상 권력자들이 기독교적 가치와 양심을 부정하고 유린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고백으로 맞서며 순교로서 신앙을 지켰다. 구약의 예언서들이나 다니엘서 등은 신앙고백으로 당대의 신앙적 위기를 대파국으로부터 건져냈다.

주전 8세기의 네 예언자들인 아모스·호세아·이사야 그리고 미가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고백함으로써 어떤 나라나 왕조와도 동일시될 수 없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명성과 이름이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국의 존립이나 번영, 몰락이나 패망 여부에 상관없이 초월적으로 유지될 수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세계를 제패한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제국의 취약성, 임박한 멸망을 예언하고 야웨 한 분 만이 참 하나님임을 고백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의 요구에 직면하여 주기철 목사·한상동 목사 등은 일제의 군국주의가 천년만년 갈 것처럼 위세를 떨치던 바로 그 시점에도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며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지켰다.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의 칼 바르트·디히트리히 본회퍼 등은 독일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만 복종하는 고백 교회를 창설하여 나찌즘의 광기에 도전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왕권을 고백함으로써 지상 권력자들의 교만과 자기파멸적인 광기에 맞섰던 것이다.

이 신앙고백적 현실 돌파는 유대교와 로마 제국 당국을 상대로 예수는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의 계승이었다.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적 전통은 악한 정사와 권세,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에 대한 저항과 맞섬을 확정짓는 전통이었고 그것이 일제하의 신사참배에 저항한 한국 교회의 신앙고백 속에 계승되었던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이런 신앙고백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본문들이, 마가복음 8:38, 로마서 10:9-10, 고린도전서 12:3, 빌립보서 2:6-11, 그리고 요한계시록 22:20 등이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대리 왕)라는 이 부단한 신앙고백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며 이런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는 단순한 자선 기관이나 교양 강의를 들려주는 종교 학원으로 전락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드리는 모든 사도적 신앙 계승자들은 개교회의 마름돌과 같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매순간 우리의 신앙고백(가이샤라 고백)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는 살아있는 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대(對)세상적 소통 양식

기독교의 상관성(현실적합성) 위기의 뿌리는 정체성의 위기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정체성 위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신앙고백의 불철저성과 피상성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정체성 인식이 심화될 때 세상에 대한 소명감도 심화될 것이다. 교회가 정체성을 잃으면 세상에도 손해가 되고 교회가 교회다운 것이 세상에도 복이 된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데 실패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버려진 소금이 되고 등경 안에 감춰진 등불이 된다.

교회가 교회다울 때 비로소 세상과의 상관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우리 직장, 가정,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모든 인간 활동의 영역에서 바치고 그것에 접근하는 세상을 만들려고 분투할 때 세상은 교회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이 세상은 비록 하나님의 뜻으로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에 속박되어 있으나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현을 통해 속량되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도달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롬 8:20-24).

세상과 야합하거나 교회로 숨거나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세상과 짝하여 세상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다. 소통은 세상의 영향력에 일방적으로 교회가 영향을 받는 내통이 아니다. 소통은 교회가 자신의 짠맛을, 빛 됨을 세상에 알리고 과시하고 선포하는 행위다. 이 행위를 통해 세상은 교회의 구원에 이차적으로 참여하도록 초청받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과 직업 활동 혹은 시민 활동을 통하여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보다 더 넓은 사회와 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소통 의지는 세상을 향한 구원 의지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 파송 받은 증인임을 망각하고 즉 자신이 거룩한 교회의 일원임을 망각하고, 세상에 대하여 적대적으로 자폐하여 교회라는 영역으로 퇴각하거나 아예 세상과 야합한 세상의 벗이 됨으로써 지극히 세속화되는 위험에 처한다.

이것은 심각한 이원론이다. 세상의 모든 영역에 파송되어 일하는 증인의식을 결여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경제, 대중문화 예술, 과학기술 등의 영역에서는 기독교적 주장이 먹혀들지 않거나 통하지 않는다고 지레 겁을 먹고 만다.

특히 신령주의적이고 내면주의적인 신학 풍토가 지배하는 교회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선을 쌓으려고 분투하는 노력에 비하여 세상변혁적인 기개를 결여하고 있다. 품격 높은 신학 소양 교육이나 성경공부와 기독교세계관 공부를 통해 현대 사회를 분석할 줄 아는 실력이 구비될 때 그리스도인들의 세계변혁적 활동 참여도 왕성해질 것이다.

세상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의 종류

결국 현대 사회에서 교회와 세상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의 이해 결핍, 둘째, 세상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관철시키려는 개혁주의적 신앙관의 결여, 셋째, 세상의 강경한 쟁점들을 다룰 수 있는 신학적 소양 결핍,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변혁적 직장 생활이나 시민 활동의 역사와 전통의 결핍이다.

이런 장벽들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의 기독교적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는 세 가지 소통 양식을 통해 이런 결핍 상황을 돌파할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신앙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전도적 활동, 중보적 활동, 그리고 변증적 활동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게 된다.

김회권 /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 이 글은 '세상과 소통하는 그리스도인’을 주제로 제49회 언더우드 학술 강좌에서 김회권 교수가 발표한 소논문입니다.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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