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능력보다 '선전'에 의존하는 메가처치
'진리'의 능력보다 '선전'에 의존하는 메가처치
  • 신광은
  • 승인 2008.10.08 20:2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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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처치 계시론 논박 (5)

인격 부재는 기독교 진리를 프로퍼간다(propaganda), 곧 선전으로 만든다. 선전이란 무엇인가? 아주 넓은 의미로 선전은 ‘사람의 태도(attitude)를 변화시키는 기술’이라고 정의된다.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어느 정도로든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선전이 활용된다.

이러한 점에서 선전은 지배의 한 형태다. 고래(古來)로부터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선전의 힘에 관심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선전은 군사력이나 물리력을 쓰지 않고도 손쉽게 통치와 지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선전이 기본적으로 심리적인 호소와 설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선전의 위력, '정신적 폭력이자 영적 강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선전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몇몇 위대한 선전의 천재들에 의해서 극적으로 개발되었다. 일단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서구의 자본주의가 대공황과 같은 온갖 구조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붕괴되지 않는 이유를 대중문화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에 의하면 대중문화는 서구 자본주의의 선전의 도구로써 그것으로 대중들에게 자본주의의 가치와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지탱되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온갖 모순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견고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선전 때문이라는 것이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온 나라를 선전의 도가니로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지성적인 독일 국민을 세계에서 가장 야만적인 국민으로 만들어버렸다. 1940년대 독일이 인류에게 전해 준 교훈은 악한들뿐 아니라 선량한 사람들도, 심지어 한 나라의 전 국민이 통째로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선전으로 말이다. 모택동은 한 줌의 당원으로 거대한 중국 정부와 장개석 체제를 굴복시켰다. 이것은 바로 모택동이 구사한 탁월한 선전의 결과였다.

   
 
  ▲ 히틀러와 괴벨스는 온 나라를 선전의 도가니로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지성적인 독일 국민을 세계에서 가장 야만적인 국민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선전은 모든 국가와 체제, 기관의 기본적인 지배 수단이 되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선전이 우리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는 그 선전에 치명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육을 통한 민족과 국가의 이념의 주입으로부터 CF, 드라마, 영화, 뉴스, 포스터, 라디오, 플래카드, 전광판, 간판 등 모든 것이 선전이다.

현대 사회에서 선전은 우리의 전체 생활 영역을 포괄하며, 무의식 깊은 속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우리는 선전을 피할 수 없다. 선전은 점점 더 조직적이고, 치밀하고, 교묘하게 발전되어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의식, 말, 행동을 조작하고,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선전은 정신적 폭력이요, 영적 강간이다.

메가처치 내에서 기독교 진리가 선전이 되는 이유

그런데 메가처치 내에서 기독교 진리는 이런 선전을 닮아가고 있다. 어째서인가? 메가처치 안에서 기독교 진리가 선전이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교회가 대중(mass)을 상대로 커뮤니케이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선전은 기본적으로 대중(mass)을 상대로 하는데, 메가처치의 교인들은 하나의 거대한 대중을 이룬다. 메가처치 목사들은 개인이 아니라 바로 그들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메가처치 목사들은 자신이 믿고 깨달은 것과 똑같이 전 교인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지게 만들고자 한다. 이때 선전이 발생한다.

둘째, 거대한 조직을 질서 있고, 일사분란하게 통합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선전이 발생한다. 거대한 규모의 무리들이 흩어지지 않고, 혼란과 혼돈을 겪지 않고, 소속감을 가지며, 질서 있게 움직이고, 활동하게끔 하려면 뭔가 수단이 필요하다. 이때 선전은 조직 통합 수단으로 활용된다. 사실 정보의 전달만큼 강력한 선전도 없다. 차 시간을 알려주는 고속버스 터미널 여직원의 코맹맹이 소리도 선전의 일종이라고 할 것이다.

셋째, 메가처치 커뮤니케이션은 설득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선전이 발생한다. 예수께서는 대중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자신의 현존만으로 충분히 진리를 전하신 것처럼 행동하셨다. 예수는 그저 제자 후보생을 향해 '나를 따르라'고 선포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메가처치에서는 다수의 군중을 설득하고 싶어 한다. 설득만큼 강력하게 사람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설득의 기술, 곧 선전을 쓰게 된다.

넷째로, 효과(effect)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설득을 목표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불가피하게 설득 효과를 측정하기를 원한다. 목표로 하는 바가 성취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효과의 측정과 평가를 통해서 보다 더 효과적인 선전 기술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런데 예수의 커뮤니케이션은 이와 달랐다. 예수께서는 최대 다수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으셨다. 주님은 자주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이는 일상적인 소재를 사용해서 청중들을 이해시키기 쉽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마가에 따르면 예수의 비유 사용의 의도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그러나 메가처치는 가능한 최대 다수에게 먹혀들게끔 설교하고, 말씀을 전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효과 측정을 시도한다. 얼마나 모였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었고, 분위기는 얼마나 뜨거웠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심 초청에 응했는가, 집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가 등. 그러나 가능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하고자 애를 쓸 때, 교회는 점차 선전을 쓰게 된다.

다섯째로, 교회가 선전을 활용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세상에 선전 기법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선전에 감염되고 중독된 피선전인들이다. 소위 세련된 커뮤니케이션 기법에 장기간 동안 노출되어 도무지 무엇이 선전이고, 무엇이 선전이 아닌지 알 수도 없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선전 기법은 점점 일상화되어 요즘은 웬만한 사람이면 영상 편집쯤은 문제도 없이 해낸다. 그러다보니 원격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지도 않는 중소 규모의 집단에서도 순전히 멋지게 보이려고, 실력을 뽐내려고, 그러니까 폼을 잡으려고 선전 기법을 활용한다. 사방에 선전이 넘쳐나는데 교회라고 쓰지 않을쏘냐.

선전의 늪에 빠져든 메가처치

메가처치가 사용하는 선전의 실태를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설교다. 수천, 수만의 군중들 앞에서 한 사람의 설교자가 그들에게 말을 하는 그 순간 선전의 유혹은 뿌리치기 어렵다. 수 만 명의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그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며, 그들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설교자의 욕망은 그를 설교와 선전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게 만든다. 말(word)만큼 강력한 선전 도구는 없으며, 열정적인 연설만큼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도 없다. 거대한 군중들 앞에서 말로써 뭔가를 이루려고 할 때 선전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결신자를 많이 만들어내라는 부탁을 받은 수련회 강사, 목표로 하는 교회 사업의 추진 및 자금 확보, 갈등 해결 등을 부탁을 받은 부흥회 강사, 수련회에 더 많이 참석하게 만들고 싶은 담임목사. 이러한 사람들이 청중 앞에 서서 말로 그들을 설득하고, 원하는 행동들을 하게 만들고자 할 때 설교는 선전으로 변질된다. 히틀러의 열정적인 연설에 독일 국민들은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했듯이, 충격적이고, 강력하고, 힘이 넘치는 설교 앞에 메가처치 성도들은 선전에 감염되기 시작한다.

그 다음은 대규모 군중집회다. 사람들이 종종 간과하는 사실은 수 만 명이 운집한 거대한 집회 자체가 이미 선전술이라는 사실이다. 5만 명 이상이 관람할 수 있는 콜로세움의 검투 경기, 20만 군대가 도열하고 연인원 40만 명이 참가한 1935년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15만 명을 수용하는 능라도 경기장에 연인원 10만 명이 동원되어 펼쳐지는 북한의 ‘아리랑 축전’ 등은 군중 집회 그 자체가 선전술이 될 수 있다는 훌륭한 사례들이다.

거대한 규모로 운집한 거대한 모임은 그 자체로 강력한 선전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점에서 메가처치는 매주의 집회 자체가 선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보다 효과적인 집회를 위해서 음향, 영상, 음악, 조명, 기계 장치 등 하나씩 들여올 때 선전은 더욱 정교해진다. 심지어 정치 구호까지 난무하는 시청 앞 기도회나 상암 월드컵 경기장 대규모 집회는 기독교의 대중 집회를 통한 선전술이 이미 정치적 성격까지 띠는 현상을 목도케 한다.

   
 
  ▲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미국의 모 교회처럼 피아노줄을 이용하여 예배당 천장을 천사들이 날아다니고, 엘리야가 불마차를 타고 승천하는 스펙터클까지 연출하고야 말 것이다.  
 
선전의 도구가 된 설교, '쇼'로 전락한 예배

셋째로, 예배다. 포스트모던 사조의 영향을 받은 메가처치 예배와 집회는 점차 쇼(show)로 화하고 있다. 하나님을 보고 싶은 욕망, 뭔가를 느끼고 체험하고 싶다는 욕구는 모든 인간에게 심겨져 있는 종교적 본능이다. 메가처치의 예배는 이러한 종교적 본능을 충족시켜 주고픈 유혹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메가처치 예배는 일종의 종교적 환타지의 창조에 몰두한다.

점점 더 뜨겁고 강렬한 느낌과 체험을 주고자 애를 쓰는 통에 음악은 점점 더 심금을 울리며 감성적이 되고, 혹은 웅장하거나 선동적이 되어 간다. 또 환상적인 느낌의 율동과 춤, 거대한 성가대, 오케스트라, 웅장한 퍼포먼스, 퍼레이드, 깃발까지.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 메가처치가 얼마나 선전을 사모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미국의 모 교회처럼 피아노줄을 이용하여 예배당 천장을 천사들이 날아다니고, 엘리야가 불마차를 타고 승천하는 스펙터클까지 연출하고야 말 것이다.

넷째로, 시각 의존도와 영상매체 활용의 증가는 기독교 진리가 선전이 되어 가는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웅장한 예배당 안에 빼곡히 들어찬 거대한 군중의 무리들, 이 웅장한 스펙터클 자체가 하나의 시각적 선전이다. 설교 중계 영상으로부터 시작해서, 방송국을 따라 하는 유치한 교회 뉴스, 현란한 행사 CF 영상, 창립 기념 홍보 영상, 전도 영상, 시선을 사로잡는 다양한 포스터, 플래카드, 건축 및 인테리어, 기업이미지통합프로그램(CIP) 등도 모두 시각적 선전 기법들이다.

다섯째, 교회에서 1년에 최소 두 번 정도는 꼭 갖는 캠프와 수련회 등도 선전술이다. 이러한 모임이나 집회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이것이 일상과 단절되어 있다는 특성 때문이다. 자고로 일상은 비종교적 시공간이다. 이러한 세속적 성격의 일상으로부터 사람들을 분리할 때 심리적 저항 기제는 현저히 약화된다. 모 캠프에서는 아예 시계까지 빼앗아버리고, 핸드폰이나 전화 등의 사용도 엄금한다고 한다.

이럴 때 참여자는 현저하게 수동적이 되며 주최 측의 인도에 일방적으로 추종하게 된다. 혹자는 이를 복음을 받아들이기 좋은 마음 밭이라고 하는데, 이는 선전의 전형적인 메커니즘일 뿐이다. 히틀러가 유달리 청소년 캠프와 수련회를 많이 하게 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교회가 캠프를 선호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불신자가 교회의 캠프에 참석하면 그들은 역전된 분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밖에서는 전부 자기처럼 기독교를 믿지 않는데, 안에서는 모두 믿는데 자신만 안 믿는 분위기다. 이러한 분위기는 불신자에게 강한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집회에서 하는 말이 진짜인 것 같은 실제감(reality)을 부여하며, 심지어 자신은 말썽쟁이라는 죄책감까지 유발한다. 그래서 끝내 굴복하게 된다. 이 때문에 수련회는 불신자의 회심을 보다 용이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는 진리의 능력보다는 ‘수련회 효과’를 의존한 결과다. 그리고 이것은 선전이다.

여섯째, 성경공부 및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선전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정보의 전달과 교육이 사실 가장 강력한 선전술에 속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에서 시행하는 교육이나, TV 및 라디오, 신문으로 전달되는 뉴스가 선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전술이 힘이 있는 이유는 진실인 체, 객관적인 체 가장하기 때문이다. 전달되는 정보 자체는 진실이고, 객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정보가 선별된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부분적인 진실'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부분적인 진실은 완전한 거짓말보다 더 치명적으로 선전이 될 수 있다.

진리의 능력보다 수련회의 효과에 의존하는 교회

종종 교회에서 시행하는 성경공부나 교육 프로그램은 담임목사나 혹은 특정 관점을 선택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하달하고, 주입하는 형태를 취한다. 모든 관점과 다양한 의견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그리하여 주입식, 암기식 성경 지식을 전달하고, 성도들을 기계적으로 작용(반응)케 하는 데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들이 활용된다. 기독교 신앙은 의심이라는 혹독한 실존적 불안의 불길을 거치면서 연단되는 법인데 얄팍한 교육 프로그램은 '왜?'라는 질문을 원천 봉쇄하게 만든다.

사실 성도들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담임목사 입장에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한번 상상해보라. 수 만 명의 메가처치 성도들이 너도나도 '왜'를 물으며 실존적인 불안을 겪는 상황을 말이다. 난리가 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메가처치는 잘 정리된 매뉴얼 북을 나눠주고 교인들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편을 택할 밖에 없다. 그러자니 교육형 선전이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일곱째로, 최근 각광 받고 있는 소그룹 운동 역시 탁월한 선전술이다. 국민군에게 쫓기던 모택동이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이 바로 이 소그룹을 통한 선전이다. 엘룰은 이러한 소그룹을 통한 선전을 ‘수평적 선전(horizontal propaganda)’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위에서 아래로 하향 전달하는 ‘수직적 선전(vertical propaganda)’과 구분하여 붙인 이름이다. 수직적 선전과 수평적 선전이 동시에 사용될 때 보다 효과를 발휘하는데, 최근 대집회와 소그룹의 두 날개를 강조하는 움직임은 정확히 선전의 논리를 따르는 듯하여 씁쓸하다.

수평적 선전은 소그룹을 통해서 구성원들 간의 관계 역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전을 말한다. 수평적 선전은 적절하게 조직된 소그룹에서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점차 모임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자신에게 내면화시키는 선전이다. 소그룹 선전의 가장 중요한 룰(rule)은 자유를 제한하라는 것이다. 토론과 나눔은 자유롭게 진행하지만, 미리 정해진 방향에 맞지 않는 자유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자유는 자유로되 제한된 자유인 것이다. 신입 멤버들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이 무언(無言)의 규칙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 규칙을 따라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소그룹의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바로 이 분위기 안에서 신입 멤버는 적절하게 안배된 자유 토론과 나눔을 통해 적대감을 철회하고, 저항 기제를 약화시키며, 우호적 관계를 맺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모임의 주장을 추종하게 된다. 이것 역시 선전이다.

   
 
  ▲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고 양자로 받아들이는 손양원 목사.  
 
손양원 목사가 보여준 진정한 반(反)선전적 삶

그렇다면 도대체 선전 아닌 것은 무엇인가? 선전의 반대는 진리다. 그리고 진리는 예수다. 오직 예수만이 진리고, 그래서 예수는 반(反)선전(anti-propaganda)이다. 예수는 어떤 전략이나 방법, 수단으로 사역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진리를 계시하셨다. 그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바로 계시다. 아울러 예수는 삶으로 계시를 직접 살아 보이셨다. 그리고 이웃이 되시어 진리를 말로 가르치셨다. 예수의 몸, 예수의 삶, 그리고 예수의 말이 모두 합쳐져 진리가 계시되었다. 몸, 삶, 그리고 말은 진리의 삼위일체다. 이것은 제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제자들도 자신의 몸, 삶, 말로 진리를 드러내야 한다. 물론 이때 드러내는 진리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라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모방자로서 늘 예수를 가리키는 자들이라야 한다.

한국 교회의 자랑, 손양원 목사는 탁월한 예다. 손양원 목사는 설교가와 부흥사로서 탁월한 활동을 펼쳤다. 그의 설교는 많은 성도들에게 감화를 주며, 은혜를 끼쳤다. 특히 그가 재판장에서 심문 받으면서 똑똑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체형조서는 손양원 목사가 얼마나 강력한 말씀의 증언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손 목사는 말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형장에서 살려내어 자신의 양아들로 삼음으로써 자신의 삶으로도 복음의 진리를 드러냈다. 그가 한센병 환자들을 기피하지 않고, 그들 삶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한센병 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며 간호했을 때, 그는 자신의 몸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웅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결국 자신의 몸, 삶, 말로 예수를 드러냈다.

그가 자신의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고백했다고 알려지는 ‘아홉 가지 감사’는 몸, 삶, 그리고 말로 증거할 수 있는 기독교 진리의 정수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감사.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 넷째, 한 아들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다섯째,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당함이리요.
여섯째,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심을 감사.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신애(神愛)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신광은 / 열음터공동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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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ly 2011-12-28 14: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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