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천국이 예수가 말한 그 '천국'인가
우리가 아는 천국이 예수가 말한 그 '천국'인가
  • 신광은
  • 승인 2008.12.29 04: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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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메가처치 구원론 논박 3 … 잃어버린 천국

'오늘 밤에 죽으면 천국 가실 수 있겠어요?” 허걱! 전도인의 이 한마디에 사람들은 말을 잃는다. “글쎄요…” 당황해하는 전도 대상자를 향해서 전도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위 ‘천국 가는 방법’을 유창하게 소개한다.

요즘은 이런 전도 방법이 예전만 같지 않지만 필자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이런 저돌적인 방법은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예전에 필자는 이런 내용을 극화해서 천국과 지옥에 관한 연극을 만들어가지고 청년들과 함께 전도 여행을 다닌 적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연극이 섬이나 도서 지역, 산간벽지, 심지어 해외에서까지 놀라울 정도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이었다. 거의 모든 지역과 나라, 민족의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물음 앞에 말을 잃고 주저하면서 복음을 순순히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복음의 능력 때문인가. 복음의 능력이 대체 얼마나 강력하면 성서의 ‘성(聖)’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전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한단 말인가. 과연 기독교의 ‘기(基)’자도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조차 전부다 알고 있는 이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은 예수가 전하셨던 그 ‘천국’이 정말 맞는가. 필자는 점차 이 둘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필자는 하나님나라의 신학을 통해서 우리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천국에 대한 이미지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것이라기보다는 융(Jung)이 말하듯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 속에 내재된 심리학적 원형(Psychological Archetype)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오늘날 우리가 전하고 듣는 복음은 놀랍게도 성서의 계시로부터 한참 벗어나 있다는 말이 된다. 참으로 오늘날 개신교 복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그것이 비계시적 근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일차적으로 천국은 에버랜드 같은 어떤 ‘놀이동산,’ 혹은 어떤 ‘땅’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천국(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나라(kingdom of God)’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적 성과 중 하나라면 하나님나라의 신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나라의 신학이 알려준 귀한 메시지 중 하나는 천국(kingdom of heaven)이 ‘하늘에 있는 나라(kingdom in heaven)’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 그러니까 ‘하늘나라’라는 말은 거의 대부분 마태복음에서만 발견된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마태가 유대인들을 위해서 쓴 복음서다. 그래서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를 받아 볼 유대인을 배려하여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 ‘하늘’이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왜냐? 이유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직접 거명하는 것을 참람하게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 지칭하여 ‘하늘’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나라는 실상 하나님나라인 것이다. 천국은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다.

그렇다고 천국이 하늘에 있지 말란 법은 없다. 많은 성서의 구절들은 하늘에 존재하는 종말론적 실체를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공중에 떠 있는 에어로 호텔도 있다는데, 하나님나라가 하늘에 떠 있지 못할 이유도 없다. 다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서 기자가, 특히 마태가 ‘천국’이라는 말을 썼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하늘에 떠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다!

천국을 하나님나라로 이해하면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크게 달라지는 것은 천국을 어떤 유토피아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어 ‘다스리시는’ 나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통치’와 ‘천국’을 같은 단어, ‘바실레이아’로 쓴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일차적으로 천국은 에버랜드 같은 어떤 ‘놀이동산,’ 혹은 어떤 ‘땅’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거의 모든 문화권마다 극락, 엘도라도, 유토피아, 무릉도원과 같은 쾌락의 동산의 신화가 존재한다. 그런데 적지 않은 신도들은 천국을 이런 식의 유토피아로 이해한다. 그리고 믿음을 유토피아 입장권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가 전한 천국은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새로운 나라요, 신세계였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하나님보다 살짝 못한 존재로 만드시고"

'하나님나라'라는 말은 구약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 토대가 되는 사상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성서에 온통 가득 차 있다. 우선 창세기부터 살펴보자.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다스리실 하나님나라가 건설되는 건국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창세기 1장이 중심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대목은 군주의 위상을 가진 야훼가 단지 ‘명령(order)’만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는 장면이다. “빛이 생겨라!” “물이 윗물과 아랫물로 갈라져라!” “바다 속에 있는 육지는 기어 나와라.” 그러자 빛이 생기고, 물 가운데 공간이 생기고, 바다와 육지가 갈라졌다. 그리고 난 다음 거기에다 이름을 붙여 주셨다. “너는 빛이다.” “너는 하늘이다.” “너는 해다.” “너는 달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이름이 정해졌다. 이것은 참으로 극적인 하나님의 통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이 전개된다. 6일째 되던 날, 뭍의 육축들까지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갑자기 창조 과정을 멈추신다. 그리고 하늘의 천군(天君)들을 불러 모으시고 천상회의(天上會議, heavenly council)를 개최하신다. 이날 의제(agenda)는 인간이라는 동물 창조에 관한 것이었다.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인간 창조가 결정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존재의 미스터리와 함께 하나님나라의 놀라운 본질과 마주하게 된다.

이날 결정된 결의안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대단히 독특한 짐승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인간은 다른 짐승과 다를 바가 전혀 없이 흙으로 지어진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짐승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인간을 지극히 높이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정도까지.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8:5) 전에 개역성경에는 ‘하나님보다’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로 번역했지만 원어는 ‘엘로힘’으로 쓰여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맞다. 인간은 어떤 존재냐. 하나님보다 살짝 못한 그런 존재였다. 

여기서 인간 존재의 모순이 발생한다. 그의 근본은 흙이고, 이 점에서 인간은 짐승과 똑같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큼이나 높여졌다. 한마디로 고평가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고평가는 하나님의 평가이니 정당하다. 그래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진토이자 짐승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적(神的)인 존재다. 짐승 중에서 출생했으나 하나님만큼 높임을 받았으니 나머지 짐승들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발 아래 놓이게 된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시8:6-8)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아름답고 귀한 하나님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를 대신 다스릴 자로 인간을 지으셨다. 인간은 본래 흙에서 지음 받았으나 통치자에 걸맞은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하나님의 신성이 아낌없이 그에게 불어 넣어졌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왕이자 신처럼(Godlike) 되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 이것이 최초의 하나님나라의 모습이었다. 

'먹이사슬 대신 섬김의 사슬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에게 통치 명령이 주어졌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오랫동안 이 명령은 문화 명령으로 불렸다. 그리고 이 문화 명령은 개발 명령의 동의어처럼 여겨졌다. 예컨대 대로우 밀러(Darrow L. Miller)의 <생각은 결과를 낳는다>는 문화 명령을 개발 명령으로 이해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큰 오해다.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은 본래 하나님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인간에게 대신 맡기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세계의 분봉왕이다. 따라서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를 모방(imitation)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는 어떤 것인가?

첫째로 그것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창조하신 뒤 꼭 그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셨다.(렘40:26) 1장에서만 하나님은 최소한 다섯 개의 이름을 지어주셨다. ‘낮,’ ‘밤,’ ‘하늘,’ ‘땅,’ ‘바다’ 등이다. 아담도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다. 그런데 아담도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다. (창2:19-20) 이 점에서 아담은 하나님을 닮았다. 그러니까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을 모방하는 통치 행위였던 것이다 . 

이름을 짓는 행위는 한편으로는 권위와 주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발 아래 있는 것들의 이름을 지으시고, 사람 역시 자신의 발 아래 있는 것들의 이름을 짓는다. 그렇지만 이 이름 짓는 행위는 무슨 독재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름을 지으시고 그에게 자신의 모든 영광을 주셨다. 이름 짓는 것은 사랑의 행위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은 데서 사랑의 행위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2:23) 

이름을 짓는 것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존재의 인정이요, 사랑의 행위다. 김춘수의 <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서 몸짓이 꽃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받은 명령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의 동산을 불도저로 밀어 거기에 길을 내고, 건물을 세우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동산 안에 모든 풀과 나무, 새, 짐승, 풀벌레까지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르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 명령은 사랑의 명령이요, 세심한 정원사가 되라는 명령이며, 시인이 되라는 명령이었다.

헤르만 헷세가 정원 일의 즐거움 속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환희와 기쁨의 세계로 인간들을 초청하셨다. 이것이 다윗이 시인일 수 있었던 이유다. 하나님의 눈은 시인의 눈이다. 그리고 다윗은 그 눈을 가졌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시인의 눈을 가지라고 부르셨다. 

둘째, 하나님의 통치 행위는 섬김(service)의 통치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본을 보이셨다. 인간을 창조하신 것 자체가 섬김이다. 왜냐? 왕으로서 세계를 직접 다스릴 수도 있었으나 그 자리를 인간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그냥 자리만 내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부어주시면서 그리 하셨다.

하나님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인간을 그 자리에 앉게 하심으로써 섬김의 모범을 보이셨으며, 인간은 그것을 보고 배워 땅과 생물들을 섬기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왈쉬와 미들톤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섬기고, 인간은 세계를 섬기기를 원하셨던 것, 이것이 최초의 하나님나라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통치가 사랑을 만들어낸다면 섬김의 통치는 평화를 만들어낸다. 이사야 11장은 최초의 하나님의 동산에 있었음직한 종말론적 평화의 광경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6-8)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통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먹이사슬(food chain)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먹이사슬 대신에 섬김의 사슬(serving chain)이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는 평화, 곧 여호와의 샬롬이 있다. 

역삼각형의 질서가 정삼각형 질서로

그런데 하나님의 이 놀랍고 아름다운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뱀 때문이었다. 뱀은 인간을 꼬드겨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만든다. 뱀이 인간을 꾄 유혹의 말은 이것이었다.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You shall be like God.)” 이 한마디에 인간은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미 인간은 충분히 신과 같은 자가 아니었던가. 그 근본이 진토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던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성총을 입어 군주의 위상을 가지게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무엇이 모자라서 뱀의 유혹에 넘어갔단 말인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뱀의 유혹 안에 실로 엄청난 기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본래 하나님나라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세계’였다.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고, 인간이 세계를 섬기는 세계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세계는 섬김의 사슬(serving chain)이 지배하는 역삼각형의 세계다. 그러나 뱀은 이것을 먹이사슬(food chain)이 지배하는 정삼각형의 세계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뱀의 말을 들어보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5)

여기에 존재하는 치명적 유혹은 역삼각형의 질서를 정삼각형의 질서로 바꾼 것이다. 뱀에 의하면 세상은 피라미드의 모습인데 맨 꼭대기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다. 그런데 그 자리는 부당하게도 하나님께서 차지하고 계신다. 인간이 오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선악과는 피라미드의 최정상에 오를 수 있는 열쇠인데 비열하게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서 이를 못 먹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먹어서 피라미드의 최고 정점에 올․라․서․라!’고 한 것이다.  

세계를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만드는 이 치명적 유혹에 접하자 인간의 눈은 순식간에 뒤집히고 만다. 자고로 눈은 마음의 창이다. 역삼각형의 세계관이 순식간에 정삼각형의 세계관으로 바뀌었다. 이제 인간은 ‘조금만 더(a little more)’ 앞으로 나아가면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고약한 하나님께서 비열하게 막고 있지만 무슨 상관이랴. 바로 눈  앞에 열쇠가 있는데…. 순간 선악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창3:6)  

참으로 놀라운 세계상의 역전이다. 섬김의 사슬은 먹이사슬로 바뀌었으며, 역삼각형의 세계는 정삼각형의 세계로 바뀌었다. 그러자 하나님에 대한 관점도 바뀌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섬김의 본보기가 아니라, 질투심 많은 독재자로 보였다. 하나님의 세계 속으로 탐욕의 세계관이요, 지배의 세계관이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절대반지'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던 푸르도처럼 인간은 무너지고 만다. 기어이 선악과를 따먹었고 끝내 그는 피라미드의 최정상에 오르고야 만다. 그러나 그 순간 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는 사라지고 만다. 정상이 아니라 바닥으로 추락한 것이다. 부끄러움이 엄습하고 그들은 치마를 만들어 입는다. 

▲ 바벨탑은 세상을 지배하는 피라미드 시스템의 완벽한 상징물이다. 바벨탑 이후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과 건물을 세워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망은 아직까지 그대로다. (Tower of babel, 1866, Gustav Dore)
새로운 세계관의 확산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가장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열랍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아벨이 피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거나 가인의 정성이 부족했다는 것 등이 있다. 그런데 또 다르게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가인과 아벨의 생업에 주목한다. 가인은 농경을, 아벨은 목축을 했는데 상대적으로 가인이 더 부유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니까 가인은 장남에 부자이기까지 했다. 반면 아벨은 차자에 가난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더 낮고 비천한 아벨에게 은혜를 부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그가 더 낮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히브리 민족이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과 같은 이유다. (신7:7)  

뱀의 새로운 세계상이 도래한 이후 하나님의 시선은 늘 피라미드의 최정상이 아니라 맨 바닥에 위치한 낮은 자들로 향한다. 예수의 말씀대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보다 가난한 아벨을 돌아보셨다. 그러나 이것은 가인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피라미드의 세계에서 신의 은총도 강한 자에게 임해야 한다는 것이 가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은총이 낮은 곳으로 임했다. 가인의 세계관으로는 자신이 아벨보다 열등하다는 것으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가인은 최정상의 자리에서 추락한 것이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최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가 다시 정상에 오르는 방법은? 아벨을 제거하는 것뿐이다. 가인에게 와서 이제 뱀의 정신은 폭력과 살인을 낳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가인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나님을 죽인 것이었다.

옛 뱀의 정신은 가인의 후손을 통해서 빠르게 확산된다. 가인의 후예들은 훌륭한 문명의 개척자들이었다. 야발은 집짐승을 치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부는 자의 조상이었으며, 두발가인은 구리나 쇠로 온갖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에 비해서 셋의 후예들은 전혀 별 볼 일이 없었다. 그들의 손으로는 아무런 문명의 발전이 없었다. 기껏 그들이 한 것은 제사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가인의 후예가 아니라 셋의 후예를 향했다.

가인의 5대손 라멕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어느 날 그는 밖에서 한 청년과 다툼을 벌였다. 그는 즉시 그 청년을 죽이고 말았다. 참으로 무서운 완력이다. 그리고 집에 와서 자신의 죄를 자랑한다.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그러면서 그는 큰소리친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창4:24) 라멕은 자신이 ‘가장 큰 벌을 받는 자’가 되었다고 자랑한다. 최정상에 오르고자 하는 라멕의 욕망은 방향을 상실한 맹목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아무 쪽으로든 최고만 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배의 정신은 삽시간에 온 세상을 뒤덮어버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신다. 대재앙이었다. 그 사이 세상은 잠시 안식을 취한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금세 다시 새로운 세상이 독버섯처럼 빠르게 번식하고 만다. 더욱이 홍수 이후로는 육식이 허용된 시대가 열렸다. 바야흐로 먹이사슬이 모든 생태계로 번져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홍수 사건 이후 바벨탑의 이야기가 나온다. 바벨탑은 세상을 지배하는 피라미드 시스템의 완벽한 상징물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11:4)

바벨탑 이후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과 건물을 세워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망은 아직까지 그대로다. 바벨탑은 기자의 피라미드, 우르의 지구라트, 마야의 그랑 하구아르, 진나라의 진시황릉, 고조선의 단군왕릉, A. G. 에펠의 에펠탑, 르 꼴뷔제의 빛나는 도시, 뉴욕의 엠파이어 빌딩과 수많은 마천루 등 이 모든 것들의 원형이다. 오늘도 바벨탑을 계속 쌓고 있으며, 정상에 오르기 위한 약육강식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나라의 씨앗 

하나님의 시선은 지구랏트의 나라 우르에서 우상을 제작하는 평범한 한 가족을 찾아내신다. 이 가족은 데라의 가족이다. 아브람은 데라의 장남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구랏트의 나라로부터 아브람을 불러내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새로운 세계상으로 점령되어버린 이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의 세계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은 언약은 이렇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3)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엄청난 복을 주신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주어진 복은 땅의 모든 족속에게로 흘러간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아담에게 주어진 통치 명령의 반복이다. 아브람과 맺은 약속의 핵심은 섬김의 사슬이 지배하는 역삼각형의 세계상이다. 세상 나라 한 복판에 하나님의 세계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마지막 족장인 야곱, 곧 이스라엘은 나중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들의 이름이 된다. 그런데 야곱이 복 중에 있을 때 주어진 약속은 무엇인가.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25:23)

그렇다! 바로 하나님나라의 질서가 그의 존재와 얽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해서 아담이 망쳐버린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재건하고자 도모하고 계신다. 그러나 세상 나라의 질서에 매인 이삭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에서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서 역시 가인처럼 동생을 죽이려 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하나님나라의 질서는 요셉의 삶에서 또 다시 반복된다. 그의 두 번의 꿈은 요셉의 모든 형들과 심지어 부모까지 요셉에게 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옛날 가인이 그랬듯이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가인이 그랬듯이 그들은 요셉을 죽이려 한다. 가인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나라의 질서는 세상 나라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나라의 질서는 언제나 동일하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길 때는 평화가 오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직 전쟁과 죽음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즘을 주제로 얼마나 많은 소설이 나왔으며, 영화가 만들어졌는가? 

요셉의 삶은 극적으로 변화된다. 그는 지극히 낮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제국의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 바로는 말한다.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창41:40)

요셉의 지위는 바로보다 조금 못한 자리까지 오른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시켜서 죄수의 몸이던 요셉을 바로보다 ‘조금 못하게’ 세우도록 하셨다. 이유는 그로 하여금 세상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나라의 질서가 요셉에게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요셉은 7년의 대풍년의 기간 동안 엄청나게 남아도는 양식을 거두어 들여서 7년의 흉년의 기간 동안 굶주린 사람들에게 되팔아 그들을 먹인다. 양식을 팔자 엄청난 돈이 요셉에게 몰려들었다. 땅과 가축도 전부 요셉의 소유가 되었다. 나중에는 사람들까지 요셉의 수하에 들어온다. 그러나 요셉은 그 부를 다시 되돌려준다. 요셉은 제 욕심을 위해서 돈과 재산을 착복한 것이 아니라 도로 그들에게 땅을 빌려주어 소작하게 한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창47:25)

요셉의 때에 잠시 동안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졌다. 천국이 그림자로 피라미의 나라에 임한 것이다. 그러나 곧 요셉을 모르는 왕조가 일어났다. 다시 하나님의 나라는 잊혀졌다. 

하나님의 왕국 vs. 세상 왕국 

시내산 언약과 함께 이 땅 가운데 하나님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큰 도약을 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제 민족 단위로 실현되게 된 것이다. 섬김의 질서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한 민족을 조성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 그대로 국민과 국가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애굽에서 종살이나 하던 형편없는 하비루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물로 택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택하신 이유는 이들이 강대해서나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가장 낮고 비천해서였다. 피라미드의 최하층부에 존재하는 이들을 불러 하나님의 가슴에 박힌 보석으로 삼으신다. 무엇 때문에? 세상을 섬기라고!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19:5-6)

이 시내산 계약의 골자는 사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하셨다. 제사장 나라, 그러니까 하나님과 열국 사이를 중재하는 중재자가 되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극히 높여 자신의 보물로 삼으시고, 이제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 나라를 자신에게로 인도하기 원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나라의 질서, 곧 섬김의 사슬의 역삼각형의 세계 기획이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세계 변혁의 기획을 이제 민족 단위로 실현하기 원하신다.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다. 먹이사슬이 지배하는 정삼각형의 세계 속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하나님나라의 질서가 국가 단위로 실현되는 순간이니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최소한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 만큼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하나님나라의 질서가 실현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나라 안에서는 큰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진다. 이러한 전복적 질서에 대해서는 한나의 노래에서나 마리아의 찬가에서 잘 나타난다. 가난한 자가 부요해지고, 부자가 수치를 당하는 전복적 질서는 하나님나라 질서의 핵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웅대한 계획은 세상 나라의 질서에 막혀 금방 좌초되고 만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하는 대목은 하나님의 세계 재조정 기획의 결정적인 실패를 상징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한다.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8:5)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나라의 질서가 아니라 세상 나라의 질서를 본받고 싶어 한다. 그들은 혼란스럽고 나약한 섬김의 사슬이 아니라 힘 있고, 효율적인 먹이사슬 속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알려주시는 왕의 제도를 보라. (삼상8:11-17) 왕의 제도는 폭력의 질서요, 먹이사슬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요, 피라미드 시스템이다.  

이 얼마나 완벽한 배신인가. 이 세상에 크고, 강하고, 효율적인 나라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창조 세계를 이스라엘 안에 재현하기 원하시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은 세상 나라의 질서를 구하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것은 반역이요, 역모요, 쿠데타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괘씸하게 여기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신다.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세상 왕국 속에서 이루시기로 작정하신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왕국은 이중적이 된다. 한편은 세상 나라의 질서가,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나라의 질서가 서로 교차하며 나타나게 된다. 다윗 왕국은 이러한 이중성이 잘 드러난 나라다. 다윗 왕국은 한편으로는 세상 나라의 질서가 과거의 어느 때보다 극명하게 드러난 나라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 왕국은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나라의 질서가 잘 나타난 나라였다. 가령 다윗이 아둘람 동굴로 모여든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을 거두었을 때, 또 오랫동안 더러운 이방 민족 여부스 족속의 소유였던 예루살렘 도성을 지극히 높여 그곳을 왕국의 수도로 정했을 때, 또 그가 멸문한 왕가의 후손 므비보셋을 지극히 높여 왕의 식탁에 앉게 하였을 때, 그는 정확히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충신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강탈했을 때, 또 그가 인구 조사를 시도했을 때 그는 세상 나라의 법칙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솔로몬 때에 와서 그나마 이 균형은 완전히 깨어지고 만다. 점차로 세상 왕국의 질서는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몰아낸다. 우리는 그에게서 위대한 세상 나라의 지도자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세속적인, 참으로 세속적인 카리스마를 만나게 된다. 그는 이스라엘 나라를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온 세상 나라 가운데 우뚝 세운다. 그리고 자신은 우뚝 선 제국의 최정상에 오른다. 솟아오른 왕권은 심지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 제도조차 사유화하기에 이른다.

브루그만이 잘 지적했듯이 솔로몬의 시대에 예언자적 비판 정신은 말살되고 왕권을 칭송하고 제국을 찬양하는 어용 신학이 꽃을 피운다. 야훼 신앙마저 솔로몬의 피라미드 시스템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가고 만 것이다. 이와 함께 세상 왕국은 결코 하나님나라를 구현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하나님나라는 세상 나라를 통해 구현될 수 없다.  <계속>

신광은 / 열음터공동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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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아저씨 2009-01-01 15:20:34
"뉴스엔조이엔 개나 소나....글을 쓰"신다는 말씀 동감이외다. 광야로님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나, 그 짐승중에 하나인 지를 아시나이까? 인터넷 상의 글은 저자가 누구인 지를 알 수 없는 장단점이 있으니, 부디 경어체로 쓰시길 권하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