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만나러 오신 여러분?
하나님 만나러 오신 여러분?
  • 김명곤
  • 승인 2008.12.2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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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삶의 와중에서 만나야 할 하나님'에 대한 소고(小考)

연전에 어느 교회에 출석하면서 겪은 일이다. 그 교회 목사님은 매 주일예배 시작 전에 신도들에게 항상 "하나님 만나러 오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며 인사를 하는 것으로 예배를 시작하곤 했다.

그 목사님의 이런 인사말은 '다같이 머리 숙여 기도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로 시작되는 '기념식형' 예배를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여겨져 일견 따뜻한 느낌과 함께 신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의 "하나님 만나러 오신"이라는 앞 구절 멘트에는 영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현재 교회당에서 치루는 성찬식과 예배 의식, 기도 등은 일상적 삶과 관련되기보다는 삶과 유리된 일정 공간에서 치루는 '종교 의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 만나러 오신 여러분?

한국 교회 풍토상 성경 해석과 신도들의 신앙 훈련에 절대적 권위를 가진 목회자가 한두 번도 아니고 매 주일예배 때마다 이 말을 강단에서 사용하게 될 때 신도들의 신앙 의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되어 마음이 무겁기까지 했다.

혹 이러한 종류의 멘트와 설교에 의해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은연 중 이 세상을 '하나님이 없는 썩어질 곳'으로 이해하고, '교회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 출석에 그다지도 열심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본회퍼는 일찍이 '세속적 거룩(Worldly Holiness)'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통해 기독교인의 신앙 영역은 단지 종교 영역이 아닌, '일상 속에서의 거룩' 또는 '삶의 와중에서의 초월'에 관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회퍼가 말한 '초월'의 의미는 세속적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떤 신비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일상적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사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교회당에서 치루는 성찬식과 예배 의식, 기도 등은 일상적 삶과 관련되기보다는 삶과 유리된 일정 공간에서 치루는 '종교 의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 의식, 예배, 기도 등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 영역은 세상과 분리된 특정 '장소'에 제한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일단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철수하려고 노력해왔던 흔적이 많다. 이들 기독교인들은 일상적 삶의 영역을 거룩하지 않은 영역으로 치부했으며,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소는 일상적 삶의 현장이라기보다 종교 의식이 행해지는 교회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예배란 무엇인가

이러한 협소한 이해 때문에 기독교인의 예배는 세속에서 떨어져 나와 종교적 영역 속으로 들어가거나, 또 다른 저 세상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의식'이 되어왔다.

진정한 예배는 내적 만족에 머물게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의식적 예배가 아닌, 우리 삶의 와중에서 초월을 경험케 하는 예배여야 한다. 즉, 세속적 삶의 고통과 환난 가운데 있는 우리 이웃의 고통과 눈물 속에 들어와 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케 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예배의 궁극은 무엇인가. 기독교인의 예배의 궁극은 예배자로 하여금 일상적 삶속에 예배자 스스로를 내던지게 하여 일정한 공간 안에서 이루는 예배의 '추상성'을 극복하게 하는 데 있다.

예배의 목적은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 그에게 배례를 드리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서 살게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자 자신의 세속적 삶의 깊이를 하나님께 드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에 방향이 맞춰지지 않은 예배는 기독교적 예배라기보다는 '종교적' 예배에 불과하지 아니한가?

진정한 기도란 무엇인가

   
 
  ▲ 좋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자가 세속적 삶에로의 적극적 자기 투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 세상과 단절된 특별한 장소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기도를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세상과 담을 쌓고 돌아서서 하는 어떤 거룩한 행위로 인식해왔다. 이러한 인식은 전통적 수도원식 영성 훈련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바, 기독교는 오랫동안 이러한 기도에 매력을 느껴왔다.

수도원 신앙에서 기도의 핵심은 세상으로부터의 철수라는 토대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은 분명 일상적 삶속에서의 초월을 경험해야 할 평신도들의 기도라기보다는 빗나간 성직자 그룹의 기도 양태였다.

그렇다면 거룩한 종교 영역과 물질주의 세속 영역의 날선 칼날 위를 걸으며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빛 속에서 생각해볼 때, 기독교인의 기도는 세상으로부터 철수해서 하나님께로 향하기보다는 일상적 삶의 부단한 몸부림의 와중에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세상에 들어간 것 이상으로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과 몸을 던져 살면서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지 않았던가?

풀어야 할 과제들, 도움을 받아야 할 이웃들이 즐비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살아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좋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자가 세속적 삶에로의 적극적 자기 투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기도는 세상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보기도는 우리 스스로를 중보기도 대상자에게 열어젖히는 삶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중보기도 대상자와 함께 뒤섞여 사는 삶(코이노니아)이 바로 중보기도의 핵심이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일상적 삶속에서 그 누군가와의 관계의 깊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현재 우리의 기도 형태는 진정한 기도를 향한 연습이거나 그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진정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뒤엉켜 있는 '도시'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만나지 않고,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만나는 일 없이, 어떤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만 드려지는 기도는 하나님을 제한된 영역 속에 가둬두고 '잠깐 면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극복되어야 할 '실험실적' 신앙 양태

결국 우리의 삶과 연합되지 않은 예배와 기도는 마치 실험 공간에서 실험을 통해서 세워진 심리학 이론 같은 것이다. 일정 공간에서 태생된 심리학 이론은 그 공간에서는 너무도 잘 들어맞는 이론이 될 수 있다. 시대를 풍미했던 정신분석학 등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실적심리학 이론은 실험실 밖의 '도시'에서는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심리학적 성경 해석과 이를 토대로 한 신앙 훈련이 세상에서 효력을 발휘하는데 곧장 한계를 드러내는 이유는, 도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기왕에 쌓아온 실험실적 신앙의 진위를 진정으로 검증받을 수 있는 곳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세속 도시'의 한복판이다.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러오는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믿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세속 도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훈련받는 장소여야 한다.
  
김명곤 / <코리아위클리>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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