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말이 아니라 삶이다
'평화'는 말이 아니라 삶이다
  • 박지호
  • 승인 2009.01.23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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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서 열린 평화주의자들의 모임, 'Gathering on Peace'

분열과 분쟁, 폭력과 테러가 만연한 시대에 '평화'라는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는 교회와 크리스천 단체들이 매년 한자리에 모이는 'Gathering on Peace' 집회가 지난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필라델피아 'Arch Street Meeting House'에서 열렸다. 아나뱁티즘의 신앙 전통을 바탕으로 평화 교회를 추구하는 개신교 그룹인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Mennonite Church USA)와 퀘이커 교회(Quaker Church)와 형제 교회(The Church of the Brethren) 교인들을 중심으로 장로교 교인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한인 교회 중에서는 LA에서 메노나이트 교회를 하고 있는 허현 목사(이음교회)가 참석했다.

   
 
  ▲ 'Gathering on Peace' 집회가 지난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필라델피아 'Arch Street Meeting House'에서 열렸다.  
 
재세례파라고도 불리는 아나뱁티스트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좀 더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시도하며 제3의 노선을 선택한 그룹이다. 국가 교회(state church)에 속하길 거부하고, 초대 교회의 전통을 회복하려 했던 이들은 '평화'야말로 교회가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라 여겼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철저하게 따랐던 이들은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따라 삶 속에서 비폭력주의와 평화주의를 실천했다.

16세기 말, 자신을 뒤쫓던 경찰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다 빠지자, 경찰을 구해주고 자신은 붙잡혀 사형을 당했다는 더크 윌리엄스 일화는 아나뱁티스트의 신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 저술가이자 신학자인 체드 마이어는 사회적·정치적인 억압들을 믿음으로 뚫고 한걸음 전진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정의했다.  
 
첫째 날 저녁에는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Bartimaeus Cooperative Ministries'(바디메오 사역, 대안 공동체의 일종)를 이끌고 있는 체드 마이어가 설교했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신학적 원리와 실천 방안은 <소저너스>를 통해서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다. 신학자이자 저술가인 체드 마이어는 <Binding the Strong Man>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을 두고 월터 윙크 박사(<사탄의 제체와 예수의 비폭력>의 저자)는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이후로 성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주석서"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체드 마이어는 이날 마가복음 1장부터 3장까지 살펴보면서, 예수께서 가르치고 치유한 사역들이 당시 권력자들을 어떻게 위협했는지 분석해나갔다. 진정한 믿음이란 불의에 순응하며 조용히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인 억압들을 믿음으로 뚫고 한걸음 전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다.

체드 마이어는 또 갈등 구조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려면 비폭력의 전통을 붙들되,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폭로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작업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초래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나 마틴 루터 킹이 평화를 파괴하는 자라고 비난을 받았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진정한 믿음은 입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몸소 따르는 삶으로 증명한다고 믿는 이들은 집회 때도 이론과 실천의 장을 넘나들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했다.

   
 
  ▲ '총기 살인 없는 세상을 꿈꾸며.' 필라델피아 시내 중심에 있는 총포상, 'Colosimo’s Gun Center'에서 시위를 벌이는 집회 참석자들.  
 
대회 둘째 날인 14일 오후 2시, 필라델피아 시내 중심에 있는 총포상, 'Colosimo’s Gun Center'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이삭 밀러 목사(the Church of the Advocate)를 비롯해 5명의 집회 참석자들이 총기 사용의 남용을 막기 위한 지침을 따라줄 것을 총기 판매상에게 요구했다. 이에 주인은 영업을 방해한다며 신고했고, 경찰은 이들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5명이 체포된 바로 다음날에도 시위가 열렸다. 이번에는 30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손에는 "Act to End Gun Violence"라는 대형 현수막을 들고 "총이 아이들을 죽이고, 경찰을 죽인다. 불법적인 거래를 당장 중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총포상 앞을 맴돌았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시민들은 경적을 울리며 지지를 보냈고, 시위가 계속될수록 경적 소리는 커져갔다.

   
 
  ▲ 1995년 세 명을 살인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커티스 무어(40). 그의 사형 집행은 지난 1월 14일 텍사스에 있는 교도소에서 진행됐다.    
 
총기 소지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미국은 총기로 인한 사망률 역시 단연 최고다. 워싱턴 수도 경찰청의 발표에 의하면,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에서 1,126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중 80%에 달하는 901건이 총기 사망 사고다. 필라델피아의 경우 총기 사고로 인한 청소년 사망률이 미국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집계됐다.

필라델피아 총포상에서의 시위는 정규 프로그램에 들어있던 행사가 아니었다. 5명이 구속되었다는 사실도 저녁 집회 때 사회자의 광고를 통해서 참석자에게 알려졌다. 구속된 사실이 전해지자 참석자들은 즉석에서 보석금을 내어놓기도 했다.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는 커티스 무어를 위해 기도하기도 했다. 집회 둘째 날 저녁 8시 정각 텍사스에서 커티스의 사형이 집행됐다. 예배가 진행되던 도중 사형 집행 시간이 다가오자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죽음을 앞둔 커티스를 간단히 소개했고, 참석자들은 침묵으로 기도하며 법과 제도에 의해 살인당하는 커티스와 수많은 사형수를 애도했다.

참석자들은 워크숍과 포커스 그룹 모임을 통해 평화 사역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공유했다. 워크숍에는 '어떻게 하면 피스 메이커로 살 수 있을까', '힙합을 비폭력 저항의 도구로 사용하려면', '병역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역사회에 평화를 구축하는 방법', '정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가', '평화에 대한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 20개의 소그룹으로 나눠 워크숍을 진행했다. 워크숍에서는 강사들이 논의의 방향을 잡아가되, 현장 경험이 풍부한 참석자들이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면서 논의의 폭을 넓혀가도록 했다.

   
 
  ▲ 참석자들은 워크숍과 포커스 그룹 모임을 통해 평화 사역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공유했다.  
 

   
 
  ▲ 히브리어 학자인 윌마 베일리 교수(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둘째 날 오후에는 메노나이트 교인들만 모인 자리에서 히브리어 학자인 윌마 베일리 교수(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가 십계명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간단히 소개했다. 10계명 중에 6번째인 '살인하지 말라'에서 '살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로 Murder가 아니라, Kill이라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교회는 성경에서 '살인'이란 말을 슬그머니 Kill에서 Murder로 바꾸어놓았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국가가 전쟁이나 공권력을 통한 합법적인 살인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근거를 교회가 제공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 집회 마지막 날에는 예배당 한 구석에 장갑과 신발을 올려놓았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에서다.  
 
수평적인 의사소통 방식과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아나뱁티스트 신앙 전통은 의사 결정 방식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주최 측이나 리더 그룹이 만든 강령이나 선언문을 낭독하는 일반적인 대회와 달리, 참석자 모두의 의견을 반영해 대회 선언문을 작성했다.

셋째 날 저녁에는 3~4명씩 조를 편성해 집회 기간 동안 보고 배웠던 내용들을 몇 가지 가이드라인에 따라 자유롭게 나누도록 한 다음, 조별로 나온 내용들을 취합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모든 회중의 의견을 수렴하고, 주제별로 추려가면서 선언문을 작성했다.

집회 마지막 날에는 그렇게 만든 선언문을 함께 낭독하면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화평케 하는 자로서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하나님이 원하는 평화의 길이 모든 사람들이 가길 원하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했다. 치러야 할 대가가 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평화를 추구하는 삶은 안전을 위협 받고, 고통당하고, 죽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평화는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온전히 죽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Gathering on Peace 2009 선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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