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비밀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역설
구원의 비밀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역설
  • 소로몬
  • 승인 2009.06.05 13: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애인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남가주밀알선교단에서 하는 '사랑의교실'은 내게 '하나님의 구원'을 가르쳐준 교실이다. 사랑의교실은 주변의 발달장애아들을 가진 부모들이 주말에 아이들을 맡기는 일종의 주일학교와 같은 곳이다. 그 구성도 주일학교와 참 비슷하다. 예배로 하루가 시작되고 그 이후에는 발달장애아동을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다.

사실 발달장애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위키피디아의 정의를 빌리자면, "정신이나 신체적 발달 부분에서 나이만큼 발달하지 않는 장애"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자폐증도 여기에 해당되며 지적장애 또는 뇌성마비도 여기에 포함된다.

예를 들자면, 이곳 '사랑의교실'에는 나와 동갑인 한 친구가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말을 할 줄 모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같은데, 그저 '외침'으로만 들린다. 또 거의 중학생의 나이임에도 아직 제대로 걷지 못하는 친구도 있다.

그런데 '구원'과 사랑의교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여태껏 살면서 느끼지 못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바로 이곳에서 느꼈고, 지금도 느끼고 있다. 도대체 '하나님의 구원'을 이런 곳에서 느끼는 나를 보고 '참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 남가주밀알선교단 장애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소로몬 기자회원(오른쪽).  
 
아마 장애아동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도 예배할 수도 없는 불행한 아이들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전도 대상이고 예배를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까지 여기는 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사람은 참 이기적인 존재인 것 같다. 모든 현상을 현재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우리에게 전해졌던 복음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전해졌다. 뜨거운 찬양의 열기 속에서 감정적인 변화가 왔든, 아니면 논리 정연한 진리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방식으로 복음이 장애인 친구들에게 전해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된 존재들인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끊임없이 외치지만, 과연 '사랑이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어떤 이는 포함되고 어떤 이는 배제되는 현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과거 미국인들이 인디언들에게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 복음' 을 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방식으로 이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인디언 선교는 결국 오늘날 인디언 전통 문화의 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그들의 문화를 유지하면서는 도저히 서구 세계에서 형성된 기독교적 가치관이 전해질 수 없었던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땅을 숭고한 것으로 보고 그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보는 자연관을 가진 인디언들의 문화가 오히려 창세기 기자가 전하고자 하는 창조관에 더 가까운데도 말이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다. 과연 구원에 가까운 자들은 누구인가. 나와 같은 일반인들인가 아니면 '사랑의교실'에서 내가 만난 친구들일까? 혹자는 그런 간단한 질문이 어디 있냐고,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따져 물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마태복음 21장에 나타난 예수님과 제사장들의 대화를 보면 충격적이다. 31절에서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대구성서아카데미의 정용섭 목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 우리가 이룬 업적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자기 비움에 대한 충고라는 것이다.

이 말에 상당히 동의한다. 특히 앞서 이야기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개념을 생각한다면 그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처럼 자식이 이룬 어떤 것이 아닌 그 존재 자체로 사랑하실 분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심각한 질문으로 들어가 보면 이는 거꾸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세리와 창기들이 저지른 나쁜 행동들도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서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뜻이 된다. 결국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그렇게도 이루어낸 종교적 업적이나 사회적 권위가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이 없다'라고 한 젊은이가 말하고 있으니 그들의 존립 자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가까운가. 지금 현재 하나님의 천사가 내게 '내일 너의 눈이 열리고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했을 때 과연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 말이 삶의 어떠한 것보다도 기쁘게 다가올 자들은 정작 눈이 멀고 제대로 걸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들일 것이다.

내가 만나고 있는 친구들은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삶의 아무런 고뇌 없이, 예의 차려야할 의식 없이 전적으로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나 부모들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는 그 모습에서 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느낀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메시지는 내가 느끼는 것보다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기쁘게 느껴질 것 같다.

나는 과연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우리가 이룬 어떤 것도 보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고 하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 그래도 세상 살면서 좋은 일도 많이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는 않을까. 내세울 것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이 느낌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이러한 하나님의 역설! 참으로 두렵고 또 두려울 뿐이다.

소로몬 / 기자회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