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는 믿음, 두려움 있는 믿음
두려움 없는 믿음, 두려움 있는 믿음
  • 천진석
  • 승인 2009.07.29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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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림교회 천진석 목사, 막 4:34~41

현 시대의 아우성을 대변하는 단어 중에 ‘포스트’(Post)가 있습니다.(Post-modern, Post-industrial, Post-denominational, Post-liberal 등등) 지난 수백 년간 근대 사회의 세계관과 삶을 규정하는 내용들에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지난 근대 사회에 그 이념적 차이를 넘어서 당 시대를 규정한 단어를 꼽아보자면, '실존주의'입니다.  

실존주의란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든 간에, 그 공통점은 '지금 그리고 여기' (here and now)가 우리 삶의 가치를 규정하는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탈린 독재도 러시아의 '실존'이라는 입장에서 정당화되었고,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찌즘도 독일의 '실존'이란 이름으로 그런 악행을 수행했습니다.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도 한국의 '실존'이란 상황에서 진행되었고, 3대 세습이라는 전제 정치를 보여주는 북한도 자신들의 '실존'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상과 이념의 정당화 기초에 '실존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그리고 여기'를 사유의 바탕에 놓은 세계관은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루를 자고 나면 세상이 달라지는 듯한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미래는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불확실한 미지로 남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살아있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창출하는 것들 외에는 마음을 붙일 곳이 없게 됩니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불안과 두려움에 쉽게 휩싸입니다. 그리고 미지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삶의 안정을 보장받지 못할 것 같은 예상 가운데 형성되는 실존적 두려움, 이 두려움이 우리 삶을 엄습하고 있습니다. 인구 비례당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어쩌면 자살이야말로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자해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뿌리가 뽑힌 듯한 이민자의 삶 가운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실직, 병, 재앙으로 나의 삶의 토대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두려움은 없습니까. 

예수와 동행하던 제자들도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어부에게 바다의 풍랑이란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것이요, 삶 그 자체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최악의 재앙입니다. 자신들 삶의 뿌리가 뽑혀버릴 것 같은 위기 앞에 맞닥뜨린 것입니다.

본문 40절이 언급하고 있는 '두려움'은 데일로스, 즉 '비겁한, 겁을 먹은'이란 뜻입니다. 겁을 먹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공황상태에 빠진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에게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시며 그들의 겁을 제거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가 요청하는 믿음은 비겁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순간적으로 사라질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파도처럼 닥쳐오는 것들에 삶의 뿌리를 두지 않습니다. 그 뿌리는 역사와 자연을 주관하시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신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존'의 위기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현실적 요청이 압도하는 것처럼 다가와도 영원한 시점과 가치를 바라보며 의연히 그 파도와 맞서며 이길 길을 찾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에는 '순교'의 피를 뿌리면서도 그 파도에 저항하기도 합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의 삶의 압박으로부터 탈출이나 도피가 아닌, 그 가공할 힘에 분연히 맞서는 용기를 갖게 하는 믿음입니다. 적자생존에 기초한 약육강식의 삶이라는 현실의 압력이 있어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우직할 정도로 영원한 가치인 화해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길을 가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또 다른 의미의 '두려움'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파도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여기서의 '두려움'은 앞에 제자들이 겁을 먹었다는 데일로스가 아닌 포보스란 말입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나 가치를 대면하였을 때 겪는 공포감입니다. 나의 관한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는 강렬한 빛 앞에 완전히 노출된 벌거벗은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빛에 대해 전율하는 공포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한 제자들은 본능적으로 그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성경은 이런 두려움을 간혹 '경외'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 권위와 힘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인생의 자세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있다면, '지금 그리고 여기'의 요청이라 하면서 죽음의 선택을 강요하는 말과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나와 이웃, 그리고 세계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다면, 나의 유익을 위해 자연을 그토록 낭비하고 착취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빼앗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 개인의 ‘자유’를 위해, 뱃속의 아이를 그렇게 쉽게 없애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민자라고, 유색인이라고, 여성이라고 그렇게 쉽게 차별하고 무시하는 말과 행동을 일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무차별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 이 믿음은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할 믿음입니다. 아무리 현실 요청이 긴박하여도, 그것이 사람을 해치고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라면,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현실을 포함한 과거와 미래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현실에 함몰되지 않고 그 현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겁에 빠져 현실을 도피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이에 과감히 맞설 수 있는 믿음, 구원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을 간직하고 그 영원한 뜻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 이 믿음이 성도님들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진석 목사 / 살림교회 담임, 기독교세계관네트워크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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