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정직함'이 '미끈한 경건함'보다 낫다
'거친 정직함'이 '미끈한 경건함'보다 낫다
  • 박총
  • 승인 2009.08.1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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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쟁이 예수 (2) 가식 없는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지난번에 예수님과 세례요한, 바울의 욕설을 살펴봤지만 입이 걸쭉하기론 예레미야도 만만치 않다. 하나님이 전하라는 말씀을 전했는데 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살해 위협까지 받자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과는 다르게 하나님이 자기한테 사기를 쳤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대부분의 번역에서는 '(주께서는) 흐르다가 마르는 시냇물처럼 내게 거짓말을 하셨다'(렘 15:18)고 얌전하게 고쳐놨지만 나의 멘토인 브라이언 왈시(Brian Walsh)의 말대로 "I was fucked!", 즉 "당신 땜에 좆 됐다"고 옮기는 것이 더 적확한 번역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해댔지만 주의 이름을 욕되게 했다며 벌하지 않으셨다. 사실 자살한다고 무조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듯 욕한다고 다 벼락 맞아 죽지는 않는다(자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자).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거친 입놀림보다는 주를 향한 거침없는 진솔함과 친근함을 먼저 보셨던 것이다. 조금만 직설적인 표현을 쓰면 그 기표(記表, signifiant)에만 발끈하는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그 정제되지 않은 기표를 쓸 만큼 절박한 기의(記意, signifié)를 살필 줄 아시는 분이시다.

일례로 '갈멜산 대첩'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일당 사백 오십으로 무찌르고 기념비적인 승리를 거둔 엘리야가 뒤이은 이세벨의 암살 위협과 꿈쩍도 않는 견고한 현실의 벽 앞에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는, 어찌 보면 상당히 고얀 말을 해도 하나님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으시고 엘리야의 속내를 읽으셨던 것이다.

교회에서 자주 말하는 'God is good all the time'이란 고백이 사실이지만 살다보면 주님이 야속할 때도, 그분께 엄청 화가 날 때도 있다(어떤 이들은 이걸 죄로 여기곤 하는데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그 분과의 관계가 인격적이란 반증이다. 수학 공식처럼 원칙적이기만 하다면 그거야말로 기계적 관계가 아닐까?). 그럴 때는 내 뒤틀린 속내를 다 아시는 하나님에게 좀 과격할 정도로 솔직해져보라. 회중기도를 할 때에야 함께 기도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요구되지만 골방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세련되고 완곡한 표현을 고집할 이유는 뭔가.

주님 편에서는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하며 틀에 박힌 관형어구를 날리는 것보다는 예수 믿고 나서도 여전히 입이 거친 사람이 '아, 씨발 이게 뭡니까!'라고 내뱉는 것이 더 받음직한 기도가 아닐까? 물론 우리는 '어떠한 더러운 말도 나오지 아니하게 하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좋은 것만을 말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는 권면을 깊이 새겨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에게까지 말로 은혜를 끼치려 들 필요는 없다. '날 것 그대로의 심령'이야말로 주께서 가장 바라는 것이다.

막말 열전 - 다윗과 욥의 거침없는 입놀림

내가 다윗의 시편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꾸밈없는 감정의 발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조울증 환자라고 느낄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울다가 때론 주님을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기뻐하며 찬양하는 지독히 감정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그의 모습이 참 좋다. 다윗은 원수를 저주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그지없었는데 그의 저주 기도의 한 소절을 보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의 자녀들이 고아가 되게 하시며,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소서. 그의 자녀들은 음식을 구걸하는 거지들이 되게 하시고, 폐허가 된 그들의 집에서 쫓겨나게 하소서. 빚쟁이가 그의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게 하시고, 낯선 자들이 그의 수고의 열매들을 약탈하게 하소서. 그에게 동정을 베푸는 자가 한 사람도 없게 하시고, 고아가 된 그의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도 없게 하소서. 그의 자손들이 끊어지게 하시고, 다음 세대에 그들의 이름을 완전히 지워 주소서." (시 109:9-13 쉬운성경)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음에도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자'(행 13:22)라고 부르셨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솔직한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저주를 거침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주님과 도타운 신뢰를 나누었기 때문에 그런 상찬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내 여자 선배 중의 한 명은 어릴 적에 친척 아저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커서 그것이 성추행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중에 친언니들까지 같은 일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삭이며 그 사람을 용서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나중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않았음을 주님께 털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윗처럼 원수 갚는 일을 주께 맡기면서도 '하나님 안에서' 그 사람을 저주한 다음에야 자유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솔직하기로는 욥도 빠지지 않는다. 대개 욥기로 설교를 하면 달랑 1, 2장만 읽고 '끝까지 순전함을 지켰다'는 욥을 본받자며 끝맺지만, 몇 장만 뒤로 넘기면 정말 많이 다른 욥을 보게 된다(사실 그렇지 않다면 난 욥을 지금처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로봇이지 인간이냐). 그 욥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옆에서 긁어대는 친구들에게 거짓말쟁이에 돌팔이 의사라며 비난을 퍼붓더니 하나님에겐 고작 사람 수준 밖에 안 되느냐(10:4-5), 겉으론 사랑해주면서도 속으론 늘 자신을 해치려 드는 표리부동한 존재가 아니냐(10:13)고 힐난하기까지 한다.

구어체를 살린 번역으로 욥기를 읽다보면 하나님에게 이런 말까지 하는 욥이 정말 간이 부었구나 싶어 오금이 저릴 때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욥에 대해 그의 무지함을 나무라기는 하셨지만 그런 직설적인 감정 표출을 결코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끝까지 경건한 체 했던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는 욥처럼 내 앞에서 정직하지 못했다고 책망하심으로 '거친 정직함'이 '미끈한 경건함'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은혜라는 폭력

'우리 교회는 건강한 공동체일까' 하는 것만큼 자주 논의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갖가지 측정기를 갖다 댈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인다운' 모범생 이미지와 정답만이 용납되는지, 아니면 은혜에 반하는 모습과 도발적인 발언도 흔쾌히 나눠지고 받아들여지는지를 따져보면 얼마나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인지 대략 가늠이 될 거라고 본다. 물론 솔직함은 신중함과 짝을 이루지 못할 때에 여린 자매형제를 베는 칼날이 될 수도 있다(창 18장 12절과 13절을 비교해보라. 심지어 하나님도 아브라함이 상처받지 않도록 사라의 말을 그대로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놈의 은혜 때문에 모든 언행심사를 스테레오 타입에 끼워 맞추려드는 이른바 '은혜 필터링'이 강하게 작용하게 되면 그때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닌 폭력과 파시즘이 되고 만다.

토론토 지역의 청년부 수련회에서 설교를 하든, 그보다 훨씬 큰 미국 코스타에서 강의를 하든 내가 꼭 겪는 일이 있다. 나는 평소 교회의 획일성과 반문화주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귀고리에 밥 말리나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그런 내 모습에 많은 청년들이 신선하다고 반응하지만, 으레 은혜로운 표정과 말투를 기대한 이들은 전도사로서의 상투성을 충족시키지 않는 나를 무시한다.

다 내가 자초한 것이기에 그들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 한편으로 내가 원인 제공을 했으니 미안한 맘도 있다. 하지만 외모와 말투에서도 '박제화 된 은혜'를 바라는 버릇 때문에 참된 은혜의 기회를 얼마나 많이 걷어찰까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작년 미국 보스턴 지역의 연합집회에서 겪은 일이다. 미디어 팀에 속한 자매가 카메라를 갖다 대며 집회에 대한 기대를 말해달라고 한다. 내가 머뭇거리자 은혜를 기대하며 왔다는 식으로 말하라며 친절한 답변까지 제시해준다. 당시 여러 일로 지쳐 있던 나는 강의 시간을 제외하곤 조용히 쉬러 왔을 뿐이었기에 "사실 은혜를 크게 기대하는 맘은 없는데…."라고 입을 뗐다. 이어서 그 연유를 설명하려던 나는 자매의 불쾌한 표정에 입이 턱 막혀버렸다.

집회에서 받을 은혜를 사모해온 자매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고 또 동영상을 통해 참가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려는 바람도 모르는 바 아니나 왜 자신의 열정이 앞선다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정도의 열정을 강요하는가? 왜 우리는 내 기대에 맞는 빤한 답변을 요구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불편해할까?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발린 '은혜성 멘트'보다는 비그리스도인들의 조아하지만 진솔한 어휘를 접할 때 감동을 받는다. 보스턴의 노숙자들을 위한 비그리스도인 단체 'Bread and Jams'에서 일하는 그렉(Greg)이라는 흑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렉은 노숙자들을 섬기면서도 헌신이나 희생이란 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 그리스도인들처럼 자기가 하는 일을 미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계를 위해 이기적 이유(selfish reason)로 일한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데 나는 그의 꾸밈없는 대답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그런 그렉의 모습은 빤한 대답을 바라던 수련회의 그 자매와 겹쳐지곤 했다.

코다

   
 
  ▲ 박총 전도사.  
 
'욕쟁이 예수'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걸고 두 번에 걸쳐 연재한 것은 '욕 권하는 사회'를 꾀하거나 막말로 가득 찬 기도를 부추기려 함이 아니다. 다만 과거의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날 통속적 윤리를 따르는 사람들처럼 욕 한마디로 사람을 싸잡아 도매금에 넘기는 대신 욕이 담고 있는 영적·사회적 함의(connotation)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더불어 조심스럽게 제안하기는 예수님이나 세례요한처럼 욕설을 내뱉을 정도로 두 분을 닮은 강한 의분을 품을 수 있으면 하고, 골방에서는 예레미야처럼 하나님 앞에서 막말로 감정을 토로할 정도로 친밀함과 진솔함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에 대해 시험에 드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그런 은혜롭지 못한 모습이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성숙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박총 /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밀월일기> 저자

* 이 글은 <큐티진> 2009년 7월호에 실린 원고를 수정, 확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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