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종교놀음에 분노할 줄 아는 자유인이 되라'
'거짓 종교놀음에 분노할 줄 아는 자유인이 되라'
  • 최태선
  • 승인 2009.08.20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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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사람들ⅵ, 왜 예수님의 자유를 배워야 하는가

최근 어느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을 방문하여 파송해준 교회에서 선교 보고를 겸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로서 선교지의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선교지의 전통 복장을 입고 갔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을 본 그 교회 목사님은 정색을 하며 선교사님을 나무랐습니다. 도대체 차림이 그게 뭐냐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웃으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복장이 선교지의 전통 복장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일부러 그 옷을 입고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더 인상을 찌푸리면서 손사래까지 쳐가며 "여기는 선교지가 아니라 한국이에요. 한국"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러고는 교회 직원을 불러 넥타이와 양복 상의를 구해오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결국 선교사님은 그 전통 복장 위에 넥타이를 매고 맞지도 않는 양복을 걸치고 강단에 서야 했습니다.

웃음이 나왔지만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저희 집 주변에 큰 개신교 수도원이 있습니다. 가끔은 아는 분들이 그곳에서 집회를 한다는 연락이 옵니다. 특히 제 여동생이 다니는 교회에서 매년 청소년 수련회를 그곳에서 합니다.

3년 전에 청소년 수련회를 할 때 그곳에 온 동생을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수련회 인솔자인 강도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도사가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후에 제가 여동생에 물었습니다.

"아니 저 이는 이렇게 더운데 수련회 와서 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있는 거냐?"

동생이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말도 마. 오빠 우리 교회는 저렇게 안 하면 큰일 나. 우리 큰목사님은 체육대회 할 때도 양복 입고 공 차셔."

다른 분들에게 이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저 그뿐이었습니다. 그 이상 흥분하거나 분노하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되묻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도 있고 저런 분들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모두가 무척 너그러웠습니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에 흥분하는 제가 오히려 더 이상한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사실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처음 경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이나 교회와 관련된 일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 생각처럼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흥분이나 분노가 자신이 은혜를 받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일이 판단이나 정죄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사람마다 믿는 방법이 다 다르고 하나님이 계시니 그분께 맡기자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반응과 태도가 옳은 일일까요?

텔레비전에서 많은 상금을 놓고 겨루는 퀴즈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퀴즈대회의 문제가 특정한 사람들에게 사전에 유출되었습니다. 고등학교의 한 사회 교사가 그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리고 그것에 관해 토론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그 선생님의 의도와  매우 다르게 이루어졌습니다. '어차피 누군가 타 갈 상금인데 문제가 유출된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냐?'로 모아졌습니다.

그 선생님은 30명 학생들의 기말 사회 시험을 치를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9명의 학생들에게 사전에 문제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 9명의 학생들만이 합격을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탈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9명의 학생들에게 문제가 사전 유출되었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당연히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학생들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퀴즈 유출 사건에 대해 학생 자신들이 내렸던 결론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사회학자이자 미국 교계 지도자인 토니 캄폴로가 한 번은 집회에 가서 일부러 상스러운 말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집회 참석자들은 소리를 지르며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상황을 정리한 후 토니 캄폴로는 자신의 말 한 마디에 그토록 맹렬한 분노를 보인 사람들이 왜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사회악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잠잠한지 통렬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잘못된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지 않는 분들이 더 문제입니다. 흥분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것이 언제나 지혜롭고 평화스러운 일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불같이 화를 내고 흥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갑각류처럼 껍질이 단단해져 '회칠한 무덤'이 되어버린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우맹이여'와 같은 육두문자들을 직격탄으로 날리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내세워 욕을 옹호하거나 거친 행동을 부추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디 누가 흥분해서 욕을 하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거든 은혜가 안 된다며 정죄하는 대신 그 사람의 분노를 헤아리고 나아가 내 안에 하나님으로 인한 의분이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선교지 전통 복장을 정성껏 차려입고 온 선교사에게 부득불 넥타이를 매게 하고 맞지도 않는 양복을 입혀 강단에 서게 하는 목사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수련회를 진행하는 강도사에게 넥타이를 매게 하고, 공을 차면서도 양복을 입어야 하는 목사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성과 속을 구분하고, 성스러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고, 권위를 내세우고, 경건을 가장하고, 거룩을 왜곡하고, 강제로 사람을 지배하고, 무엇보다 복음의 폭발력을 제거하고,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는 저질의 종교놀음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분들이 그토록 믿는다고 주장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언행이 일치한 사람일수록 권위가 있고, 권위가 있는 사람일수록 말과 행동이 자유스럽게 마련입니다. 그는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에 개의치 않으며, 모든 행위에 거침이 없습니다. 한적한 곳과 군중 속,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지식인이나 무식꾼 사이를 거침없이 드나들고, 고관들의 식사 초대에 응하는가 하면 세리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주저치 않은 예수님의 행위는 자유 자체였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접근하며 죄를 용서해주시고(요 8:1 이하), 낯선 여인을 아는 척만 하여도 주위의 오해를 사게 될까 두려운 터에 비싼 향유로 발을 닦으려 접근하는 여인을 유유히 허락하시는(요 12:1이하) 예수님의 행위는 아직 하나님나라를 깨우치지 못한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겐 방자하게 보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스러운 행위로까지 비쳤겠지만, 실로 예수님의 마음은 속된 것으로부터 무한히 초월해 있는 자유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행위가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파괴하는 무례한 행위로 보이고 때로는 신성모독으로 보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율법의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자유롭지 못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위한 율법주의자였고 도덕을 위한 도덕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의 인간,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자유인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자유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그 자유를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그 자유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후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될까요? 참으로 우문일 것입니다. 자유인은 율법을 존중하되 율법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라는 율법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이웃과 원수를 사랑한다면 사랑을 해도 자유스러울 수 없으며, 자유스럽지 못하다면 그 사랑의 행위는 진실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3) 바로 이 말씀이 말하는 결과를 빚을 것입니다.

복음은 해방의 기쁜 소식입니다. 자유를 상실한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자유를 상실한 이 시대 기독교의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더 안타깝습니다. 그 모습에 분노하며 돌아서 새 길을 걷는, 참 자유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최태선 / 기자회원, 어지니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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