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주심'
'덮어주심'
  • 서재진
  • 승인 2009.08.2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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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새치와 한판 씨름 후 느낀 예수님의 은혜

요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피부에 와닿고 있다. 내 정신 연령은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 사이에 멈춘 것 같은데 생물학적 나이는 계란 한판, 즉 한 줄에 6개씩 5줄이 있는 30개를 넉넉히 채우고 마흔을 향해 초특급 열차로 달리고 있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가 나이를 실감하는 때는 희망찬 아침이 아니라 하루 일과를 접고 잠자리에 드는 밤이라는 사실이다.
 
아침부터 "아이고, 내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하고 신세한탄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가 참으로 길고 힘겨웠을 텐데, 다행히도 하루를 접으며, 오늘 하루도 나이에 걸맞은 삶을 살았나 하고 뒤 돌아볼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새치가 조금 있었다. 그래서 심심할 때면 족집게를 집어 들고 머리카락을 뒤적이며 새치를 찾아다니는 조잔한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곳에서 만나는 새치들은 귀여운 적이요, 나이를 먹고 있음을, 세월이 흘러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친절한 자명종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가 들면서 새치가 다발로 나기 시작했다는 거다. 족집게로 일일이 뽑아내는 일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일의 성과도 없이 심신만 지치게 하는 고된 일이 되어버렸다.
 
하루는 앞에만 보이는 새치를 뽑다가, 우연히 손거울을 욕실 커다란 거울에 비춰보며 뒤통수를 들척이다 보니 엄청난 새치가 깜찍하게 둥지를 튼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세면대 앞에 뒤돌아서서 손거울을 한 손에 든 채, 뒤에서 흘러내리는 머리를 사방에 핀을 꼽아 고정 시켜놓고 새치를 뽑자니 손거울로 뒤통수를 보느라 270도 돌아가야 하는 눈동자에 무리가 왔다. 두 눈이 한 곳으로 쏠릴 것만 같은 이상한 현상과 함께.
 
속상해서, 옆에서 책을 보고 있던 남편에게, "여보, 이것 좀 봐. 나, 어떻게. 이렇게 새치가 많은 줄 몰랐어. 어쩜 좋아" 했더니, 정직하고 순수하기로 소문난 남편의 화답에 기절할 뻔 했다. "괜찮아, 다, 노화현상 때문에 그런 거야."
 
결국, 앞쪽과 뒤쪽 머리에 옛날 부스럼 앓고 나면 생긴다는 '영구 오빠표' 자국이 생길까 봐, 족집게로 새치 뽑는 일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이를 박차고 올라오는 괘씸한 새치를 가만히 놔둔다는 것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요즘 염색 업계에 새로운 돌풍을 일으키며 혜성처럼 떠오르고 있는 신제품 오징어 먹물을 구입해서 '새하얀 새치'를 '새까만 오징어 먹물'로 확 덮어버렸다. 나 홀로 집에서 사용 방법을 손가락으로 찬찬히 짚어가며 룰룰랄라 염색을 하고 말끔히 샤워까지 하고 나니, 내 생물학적 나이가 영원한 정신연령인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학년 사이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한 달 뒤, 이게 웬일일까! 다시 하얀 새치가 까만 오징어 먹물을 박차고 느물느물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새치와 오징어 먹물의 한판 승부가 벌어진 것이다.
 
나는 가볍게 콧방귀를 끼면서 "이 정도야, 오징어 먹물로 다시 새까맣게 물들이면 되지!" 하는 순간 예수님의 보혈이 생각났다. 하얀 새치처럼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박차고 올라오는 죄 된 근성을 매번 십자가 보혈의 피로 덮으시는 그분의 사랑이 죄인 된 우리에게 왜 필요한 지 다시 한 번 무릎을 탁 치며 깨닫는 은혜로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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