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를 왕처럼 섬기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를 왕처럼 섬기는 사람들
  • 박철
  • 승인 2009.09.01 13: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장 기독교적이면서도 지나치고 망각하고 놓치기 쉬운 진리

■ 하나

몇 해 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어느 시인은 "오늘날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힘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정치 지도자에 의해서도 아니고, 심각한 걱정과 염려로 현실에 대한 고발만을 일삼는 몇몇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으로 변화된 정의를 실천하는 프란체스코 성인과 같은 사람에 의해서이다"고 말했다.

인격의 가장 승화된 양식으로 이웃 사랑보다 더 고귀한 품위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일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이 세상에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형제적 부드러움을 지닌 '익명의 사마리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해갈까? 그야말로 세상은 끝장난,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웃을 섬김으로써 '하나님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사렛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가르침이다.  
 
■ 둘

참으로 위태로운 세기말적 벼랑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세상이 그나마 지탱되고 있는 것은, 나를 포함하여 좋은 말로 수다스럽게 늘어놓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단 한 번밖에 없는 자신의 생애를 바쳐 온 세상이 철저히 외면해버린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고,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악의 구렁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이웃을 위해 징검돌처럼 던져 놓고 숨어 사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은 오늘과 같은 시대에 기적이요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그 무엇 때문에,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형제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통감하고 허물어져가는 담 같은 사람들을 부축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 무력하고 보잘 것 없고 누추하여 생의 역겨움마저 일으키게 하는 이들을 임금님처럼, 왕처럼 모시고 사는 사람들, 가장 버림받은 이웃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이들의 깨달음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 사업을 이룩하신다 할 것이다.

■ 셋

몇 해 전, 나는 몸이 성치 못한 분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몸과 마음이 지친 장애인들의 뒤틀린 육신을 가슴에 안고, 그 몸에 묻은 배설물을 씻어내는 꽃다운 나이의 젊은 봉사자를 만났다. 나는 그들의 그 처절한 사랑의 나눔 앞에서 솟구쳐오는 눈물을 가누며 참으로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의 분량과 은사의 종류에 따라 자신의 소명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겠지만, 저들은 어떠한 사람들이기에 저토록 영웅적인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그들 앞에 내 삶과 믿음이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보였다.

그들은 나에게 믿음이 은혜라는 것과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신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근본적으로 하나로 본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진리를 이들보다 더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 또 있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임금님처럼, 왕처럼 모시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것이 된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이지만, 가장 지나쳐버리기 쉽고 가장 망각하기 쉬운 진리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의 삶의 논리와는 근본적으로 그 출발을 달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간과할 때 우리는 나사렛 예수 안에 드러난 하나님 아버지의 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고, 마침내 그분이 가르쳐 주신 진리를 떠나게 된다고 본다.

   
 
  ▲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근본적으로 하나로 본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진리를 이들보다 더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 또 있을까?  
 
■ 넷

이 세상에서 사람은 누구나 그 무엇을 섬기며 살고 있다.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와 쾌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섬기는 대상에 따라서 그가 정신적으로 속한 나라가 어딘지가 판별된다고 본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웃을 섬김으로써 '하나님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사렛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한결같이 그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의 예수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를 소상히 보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인가?"(요한 18, 33)라는 빌라도의 질문에서부터 예수에게 드러난 그 왕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 왕의 정체는 인간의 상식을 끝없이 초월하여 믿음과 초월의 세계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 왕은 영화와 명성을 누리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대신에 아무런 볼품도 없이 채찍을 맞으며 갖은 모욕과 경멸을 받고 있으며, 그 왕은 화려한 왕관 대신에 피 묻은 가시관을 쓰고 계신다.

그리고 만수무강을 비는 백성들의 환호 대신에 그를 향한 백성들의 외침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살기등등한 외침이요, 황금빛 왕좌 대신에 그는 참혹한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신다. 유대인들의 왕(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요한 복음사가의 주장에 가장 잔인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왕은 이 세상의 왕과는 전적으로 다른 왕이다. 이 역설 속에 감쳐진 진리는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그리스도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고, 오늘 이 시대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의 걸림돌로서 우리 일상의 문전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역설 속의 진리를 차치하고 나서 나사렛 예수를 향하여 하는 '왕 중의 왕'(계시록 17, 14)이라는 고백은 의미를 상실한 고백이 되고 말 것이다.

■ 다섯

"네가 유대인의 왕인가? … 아무튼 네가 왕이냐?"(요한 18, 33-38 참조)라고 물으며 유대인들과 나사렛 예수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빌라도의 모습은 권력과 결탁하여 살아가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들의 고발이 거짓임을 꿰뚫어 보면서도 자기 자신의 안보를 위해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못한 빌라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죄스러운 인간의 모습은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간 유대인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진리를 저버리는 두 인간의 모습이다.

나사렛 예수를 향하여 "당신은 나의 왕이요, 나의 임금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를 거절하는 모든 인간의 모습은 바로 이 두 가지 얼굴 속에 요약되고 있다고 본다. 빌라도를 향해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요한 18, 37)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은 "진리가 무엇인가?"(요한 18, 38)라는 빌라도의 영원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리 예시하고 계신다. 그것은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 즉 '가장 버림받은 이웃 형제를 왕으로 섬기는 사람'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그분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예수를 처형한 백부장이 "정말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었다"(누가 23, 47)라고 고백한 사실이 끊임없이 우리들의 일상 속에 되살아나게 되고, 유대인들을 경멸하기 위해 빌라도가 쓴 '유대인들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죄목이 우리들의 삶 위해 또 하나의 명패가 되어 빛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나라에서 부활하신 그분을 왕으로 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박철 / 좋은나무교회 목사·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