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형(가명) 씨는 1985년 LA 한인 타운 모 음식점에서 벌어졌던 총격 사건에 가담해 무기형을 선고 받고 24년째 복역 중이다. 당시 살해하라고 지시했던 사람은 강 씨 일행을 경찰에 넘겨주는 대가로 형을 면하고 지금은 목사가 됐다. 20세에 미국에 건너와 4년 만에 감옥에 갔으니, 인생의 절반을 교도소에서 지낸 셈이다. 일반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했지만 부당한 처우에 반발하며 교도관을 폭행해 감옥 중에 감옥이라 불리는 '특별독방'(S.H.U; Special house unit)에 14년째 수감 중이다. 동료 수감자의 얼굴도 볼 수 없고, 대화도 나눌 수 없다. 운동도 불가능하다. 그나마 하루에 1시간씩,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에서 먼지로 얼룩진 두꺼운 플라스틱 천정으로 뿌연 하늘을 바라보는 게 유일한 외출이다.
▲ 감옥 중에 감옥이라는 강 씨가 갇혀 있는 특별 독방은 재소자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다. | ||
교도소 생활은 그럭저럭 적응해왔지만, 외로움은 시간도 좀처럼 해결해주지 못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고, 아버지마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특별독방'으로 이송되면서 강 씨는 9년째 면회 한 번 없었다. 그러다 지난 2005년 10월에서야 처음 면회를 했다.
그때 강 씨를 면회 온 사람이 임정수·임미은 선교사(아둘람재소자선교회) 부부다. 강 씨가 9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말로 인사를 한 순간이었다. 이후 강 씨에게 임 선교사 부부는 부모이자 형제가 됐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강 씨는 초콜릿 물감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카드를 보내고, 임 선교사 부부는 매년 노동절 연휴 때마다 오리건 주와 캘리포니아 주 경계에 있는 교도소를 향해 14시간씩 차를 몰아 강 씨를 찾는다.
▲ 임 선교사 가 오레곤에 있는 또 다른 수감자인 김강수(가명) 씨를 면회 가서 함께 찍은 사진. 김 씨는 유학생 때 구속되어 18년 형을 언도 받고 오레곤 주에 있는 교도소에 8년째 수감 중이다. 그의 부모는 다니던 교회 목회자로부터 영주권 사기를 당하면서 추방되어서 입국이 불가능한 상태다. (사진 제공 : 아둘람재소자선교회) | ||
그 두 시간을 위해서 며칠 전부터 자동차 상태를 점검하고, 장거리 여행 중에 끼니를 해결할 먹을거리와 조리도구를 챙겨야 한다. 페인트공인 임정수 선교사는 일정을 맞추기 위해 출발하기 직전까지 일거리를 마무리하느라 분주하다. 나이도 있으니 이젠 제발 차에서 자지 말고, 모텔에서 편히 자라고 자녀들이 돈을 쥐어줬지만, 올라가는 길의 하룻밤은 차 안에서 새우잠을 청했고, 내려오는 길은 밤새 운전해서 집에 도착했다.
▲ LA에서 오리건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14시간을 꼬박 운전해야 한다. 준비해온 먹을거리로 중간중간 쉬면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이들 부부에겐 기쁨이다. 운전석 옆에는 간의 식탁까지 마련되어 있다. | ||
임 선교사 부부가 생면부지 흉악범들의 부모 노릇을 자처하는 건 아들 때문이다. 자영업을 하면서 팍팍한 미국 생활을 어렵게 이어가던 임 선교사 부부에게 느닷없이 어려움이 닥쳤다. 아들이 친구들과 어울리다 불미스런 일에 휘말리게 됐고, 청소년 교도소를 가게 됐다. 임 선교사 부부는 하루아침에 재소자 가족이 됐고,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게 됐다.
형편이 워낙 어려웠던 때라, 차는 남편이 일할 때 사용해야 했다. 임미은 선교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걸어 다니면서 아들의 면회를 했다. 그때 교도소를 출입하면서 면회 올 사람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올 수 없는 형편인 한인 재소자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먹고살기 바쁜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자녀의 옥바라지를 할 만큼 여유 있는 가정이 드물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아들이 출소한 이후에도 부모도, 연고도 없이 외롭게 지내는 재소자들이 친자식 마냥 두고두고 임 선교사의 마음에 밟혔다. 그때부터 이들은 종신형처럼 형량이 많은 사람들이나 부모가 없는 재소자들을 찾아서 면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것이 아둘람재소자선교회의 시작이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때론 다그치기도 하고 잔소리도 하는 임미은 선교사는 여느 어머니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재소자들 사이에 '호랑이 누님'으로 불리기도 한다. 자상한 아버지처럼 재소자들을 다독이고 위로하는 몫은 남편 임정수 선교사의 몫이다. 그의 입담 앞에선 무뚝뚝한 재소자도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 2004년에는 백악관에서 열린 '청소년 재소자 형 감면 법안'(SB1223) 통과를 위한 시위에 참여하기도했다. 청소년이지만 성인 법정에 회부되어 과도한 형량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2002년 범인과 일행이었다는 이유로 50년 형을 받은 황 모 씨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사진 제공 : 아둘람재소자선교회) | ||
"10년 만에 면회를 온 어떤 재소자의 부모는 아들을 만나자마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외면서 면회 시간 내내 아들에게 설교를 하더군요. 1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난 아들은 '보고 싶었다', '힘들지'라는 말을 얼마나 듣고 싶겠습니까. '사랑한다'는 말만 되뇌어도 아들의 시린 마음이 녹을까 말까 한데, 그 짧은 면회 시간 내내 들리지도 않는 말씀만 들이대니…."
재소자 사역을 하면서 겪은 임 선교사 부부의 희로애락을 들어보면 부모의 심정이다. 사역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게 뭐냐는 질문에 임 선교사 부부는 "면회하러 왔다가 재소자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할 때나, 재소자가 먹는 게 시원찮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대답했다. 경제적인 부담이나 눈에 띄는 사역의 결과가 없다는 등의 이유도 있을 텐데, 임 선교사 부부는 여느 부모들처럼 재소자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 미국에서 복역하다 추방된 어느 재소자가 한국에서 임 선교사 부부에게 보내온 편지다. 한국에서의 삶에 대한 막막함과 신앙적 고백을 담은 내용의 편지다. | ||
재소자를 만나면서 감사한 기억 또한 많다. 허겁지겁 먹기만 하던 재소자가 2년 만에 '이거 누가 사주는 거냐'고 물어왔다. '하나님이 주는 거'라고 대답하자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거리 여행을 앞두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여비를 쥐어주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도 큰 행복이다.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4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재소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임 선교사 부부 앞에서 흘리던 눈물도 잊을 수가 없다. 아들 또래의 재소자를 양아들로 삼아 4년 동안 옥바라지한 끝에 출소할 때 누렸던 기쁨도 컸다.
"아들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덕분에 더 많은 아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은퇴한 이후에도 적어도 3명의 재소자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돌볼 생각입니다."
* 사역 문의 : 아둘람재소자선교회 (임미은 선교사 : 213-38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