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지하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독일 지하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 최용준
  • 승인 2009.09.16 2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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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Köln)은 독일에서 베를린(Berlin), 함부르크(Hamburg), 뮌헨(München)에 이어 네 번째로 큰 인구 백 만의 도시이며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에도 매우 중요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로마 제국이 북쪽으로 확장되면서 율리우스 시저가 주전 53년에 라인강 서쪽의 쾰른을 정복하면서 그 이름이 로마 제국의 식민지라는 뜻의 콜로니아(Colonia)가 되었습니다.

이 도시 출신으로 유명한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그립피나(Agrippina)입니다. 이 여인은 로마의 황제였던 글라우디오(Claudius, 참조, 행 11:28; 18:2)와 결혼하게 되고 이 여인에 의해 쾰른은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할 때 그녀에게는 이미 아들이 하나 있었고 그가 바로 네로(Nero)였습니다. 이 여인은 정권욕에 불타 우유부단한 성격의 남편을 독살하고 아들 네로를 황제로 만들었으나 결국 그녀도 아들 네로에 의해 독살되는 불행한 죽음을 맞게 되고 네로는 역사상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악명 높은 황제가 됩니다. 특히 64년에는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면서 그들을 산 채로 기름을 부어 횃불로 사용하였고 바로 그 해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순교했습니다.

   
 
  ▲ 1802년 5월 23일 주일, 쾰른의 개신교도들이 함께 모여 감격적인 첫 번째 공식적인 예배를 드렸던 안토니터교회(Antoniterkirche).  
 
중세 시대에 쾰른은 유럽의 중심지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상징물이 고딕 양식으로 된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성당입니다. 1164년 프레드릭 바바로사(Frederick Barbarossa) 황제가 밀라노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그곳에 있던 동방박사 유해를 쾰른으로 가져와 당시의 대주교인 라이날드 폰 다셀(Reinald von Dassel)에게 헌정하자 이 동방박사 유해를 모시기 위해 124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하였고 이 성당을 건축하는 데에만 632년 걸려 1880년 마침내 완공했습니다. 중간에 100년 정도 공사를 중단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쾰른 가톨릭 대교구는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곳 중의 하나이며 대성당 하나만으로 쾰른은 독일에서 매년 가장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는 도시입니다.

또한 1388년에 개교한 쾰른 대학교는 지금도 독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종합대학교입니다. 중세 시대 최대의 신학자라고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이 대학에 와서 스승이었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이 대학교는 지금도 법학, 의학, 경영학 외에도 중세 신학 및 철학이 매우 유명합니다. 그리고 쾰른대학교의 공식 명칭은 아직도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대학교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십자군이 대성당 앞에서 출발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1096년)에 쾰른에 정착하여 은행업을 하던 많은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아 살해 당했으며 회당이 불타고 군비를 강제로 후원해야만 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대인 박해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대성당 앞에서 마틴 루터의 논제들은 불태워졌고(1520) 개신 교도들은 박해를 받아 대표적인 두 지도자 클라렌바흐(A. Klarenbach)와 플리스테덴(P. Fliesteden)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1529).

특별히 개신 교도들이 쾰른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개혁 이후 쾰른이 라인강을 끼고 한자 (Hansa)무역도시로 발전하면서 스페인의 가톨릭 지도자 알바(Alba) 공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지에서 개신교 상인들이 몰리면서부터였습니다. 이들이 경제권을 서서히 장악해나가자 가톨릭 지도자들은 위협을 느꼈고, 동시에 알바 공의 경고도 있어 시의회를 열어 개신교도의 집회 및 예배를 금지시키는 법안을 1565년에 가결하게 됩니다. 그러자 개신교도들은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 지하에서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가정집 지하실에서 10명에서 15명이 모여 예배 드리다가 발각되지 않기 위해 얼마 후에는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습니다. 한 목회자가 여러 집을 순회하면서 숨을 죽이며 찬송하면서도 결코 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지하교회 역사는 하루 이틀 혹은 1-2년이 아니라 자그마치 237년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1794년부터 1814년까지 불란서의 나폴레옹이 쾰른을 점령하면서 비로소 개신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회복하게 됩니다. 1802년 5월 23일 주일, 쾰른의 개신교도들은 시내 중심의 안토니터 교회 (Antoniterkirche)에 함께 모여 감격적인 첫 번째 공식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교회당도 원래는 성당이었으나 나폴레옹이 강제로 개신교도들에게 예배당으로 준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2002년은 쾰른의 개신 교회가 200주년을 기념하는 중요한 해였습니다.

저는 이 쾰른의 지하교회 역사를 보면서 북한과 중국의 지하교회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그들이 여러가지 어려움과 박해 속에서 신앙 생활하고 있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낙심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섬길 때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때에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최용준 목사 / 벨기에 브뤼셀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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