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들이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하나?
교인들이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하나?
  • 곽건용
  • 승인 2009.10.0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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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롬12장 9~18절, '교회는 가장 먼저 타오르는 쓰레기 되어야'

만일 외계인이 사람에 대해 연구를 한다면 그들 눈에 우리가 어떻게 비칠까 상상해봤습니다. 사람들이 시장이나 백화점에 가서 자그마한 종이쪽지나 플라스틱 카드를 내고 물건을 갖고 가는 것을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지구 이곳저곳에 광활한 땅덩어리를 비워두고 좁은 땅을 차지하겠다고 서로 총질하며 싸우는 모습을 과연 그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밑에서부터 썩어 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현실을 그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만일 외계인이 교회를 연구한다면

외계인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은 인간의 종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레에 한 번씩 막대기 둘을 포개 만든 표식이 꼭대기에 걸려 있는 건물에 모여서 보이지도 않는 누군가에게 빌고 노래하고 어두침침한 사람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더니 시장에서 물건과 맞바꿀 땐 한 장이라도 덜 내려고 아등바등하던 종이쪽지를 아무 것도 돌려받지 않고 내는 행위를 외계인들이 봤을 때 과연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는 참 힘들겠다 싶습니다. 

처음에는 그들 눈에 종교는 단순히 환상이나 착각으로 비춰지겠지요. 우주 저 먼 곳에서 온 자기들이 아는 한 우주 어디에도 사람들이 '신'이라 믿는 분은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종교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다양한 예배 의식과 계율과 금기 사항이 있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계명들이 있으며, 상징과 아이콘, 교회당, 사원, 수도원이 있고 교황과 추기경, 주교, 사제, 수녀, 승려, 목사, 랍비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사람은 자기들이 종교를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으로 여긴다는 사실일 겁니다.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자기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도 아니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가끔은 생각해봐야 합니다. 신앙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남들 시선에 휘둘리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내가 못 보는 것을 남들이 보는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남들 눈에 내 신앙이 어떻게 비치는지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만일 외계인이 봤다면 사람이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교회 아닌 교회는 없어져야 한다

사람을 만나 교회 얘기를 하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교회 이름과 목사 이름을 알고 교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게 되면 교회 얘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정작 물어야 할 질문은 묻지 않고 나눠야 할 얘기는 나누지 않기 일쑤입니다.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천 명이든 교인들이 모여서 뭘 하느냐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뭘 하려고 모여 있는지, 중점적으로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소리냐,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교육하고 선교하고 친교하지! 몰라서 묻냐'고 반문하겠지만 그 정도의 추상적이고 공허한 얘기는 만족스런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

예배를 드린다면 그 목적은 무엇이고 예배를 통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성경공부를 한다면 성경을 통해 뭘 알고 싶고 그것은 알아서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선교를 한다면 어떤 목적을 갖고 어떤 선교를 해서 어떤 성과를 얻으려 하는지, 교육을 한다면 어떤 신앙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목표인지에 대해서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호구조사 수준에 그치고 맙니다. 가장은 누구이고 가족은 몇 명이나 되며 재산은 얼마나 되는지 정도에 그치는 것입니다. '교회가 뭐 하는 덴지 우리 다 알잖아. 뭐 특별한 것이 있나?' 이러면 얘기가 끝나버립니다. 하지만 사실은 다 알기 때문에 얘기가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할 얘기가 없기 때문에 얘기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니 할 말이 없는 것이지요. 교회는 이름이 무엇이고 누가 목사이고 몇 명이나 모이고 건물 소유 여부가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런 데가 아닌데,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외계인이 교회를 관찰해 봐도 이보다는 덜 피상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개인은 무슨 일이든지 하려면 우선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위해서 뭘 하든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도 되는 데가 아닙니다. 교회에는 훨씬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위해 뭘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이유가 없으면, 곧 교회의 존재 목적을 실현하지 않으면 없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무조건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데가 아닙니다. 교회는 존재 이유를 실현하지 못하면 없어지는 것이 낫습니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교회는 살아남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본래의 가치를 실현하지 않는 교회, 왜 존재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교회는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여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교회, 또는 뭘 해야 하는지 고민조차 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말입니다. 우리 같이 작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마음에 쏙 드는 말입니다. 하지만 작은 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지 그것이 작기 때문은 아닙니다. 작지만 존재 이유가 분명한 것만 아름답습니다. 왜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알고 있고 거기에 충실할 때만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작은 교회들이 교회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대형 교회 탓으로 돌리고 스스로 면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만일 작은 교회가 단지 대형 교회가 아니라는 데서 위안을 찾는다면 그것은 대형 교회 못지않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고 큰 착각입니다. 

모여서 뭘 하느냐가 문제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가장 좋은 전도 방법은 기독교인과 교회가 참되고 올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기쁨과 감사의 삶을 신명나게 사는 것이 최고의 선교이고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입니다. 전도에 가장 큰 걸림돌은 교회가 하는 말과 교인들의 삶이 같지 않은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왜 저렇게 살아!' '교회라고 모여서 하는 일들 하고는…' 이 한마디 말에 세상이 기독교인과 교회를 어떻게 보는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산다면 전도는 저절로 됩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사랑을 하며 산다면, 남을 미워하지 않고 꾸준히 선을 행한다면,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남을 존경한다면,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한다면, 믿는 식구들의 어려운 사정을 돌봐 주고 찾아오는 나그네를 정성껏 대접한다면,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한다면,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어준다면, 마음을 하나로 합해서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면, 그리고 이런 삶을 살면서 잘난 체하지 않고 겸손하다면 우리네 삶 그 자체가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천 명이든 모이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가 모였든 교인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들처럼 모임이 많지 않습니다. 예배도 주일예배 달랑 한 번만 드립니다. 수요예배도 없고 금요기도회도 없으며 새벽기도회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구색'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교회에서 먼 곳에 살기 때문에 한 번 모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필요하면 모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올해 들어 매월 한 번씩 모이는 기도모임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모임들은 뚜렷한 목적과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예배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봉헌의 순서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한 주간 동안 세상에서 살면서 받은 상처들을 치유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치유와 위로를 얻는 방법은 역설적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란 식의 추상적인 위로와 공허한 희망이 아니라 참된 위로와 치유, 희망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를 따라서 우리가 이기심을 버리고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며 이웃을 위해 더 많은 것을 나눌 때 위로받고 치유 받으며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를 깨닫고 내외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우리 예배의 목적입니다. 성경공부는 수천 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가르침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아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알아보고 응답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우리 성경공부의 목적입니다. 성경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며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며,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뒤집어놓으시는지를 경험하는 것이 우리 성경공부의 목적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이들에게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어라. 사회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고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삶이다'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인지를 가르치고 어떻게 하면 이웃과 더불어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우리 교회 교육의 목표입니다. 우리 교회 전도와 선교의 목표는 교인 숫자 늘리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인 숫자 늘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정의와 자유, 평화와 공존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모든 사람이 성과 인종과 지위와 빈부에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살라는 예수의 복음의 정신을 선포하고 우리 스스로가 먼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 교회의 전도요 선교입니다.

교회는 가장 먼저 타오르는 쓰레기 되어야

교회는 배고파야 합니다. 배부른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배고파야 하는 이유는 교회란 무엇을 쌓아두는 곳이 아니라 비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채우려고 교회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비우려고 모입니다. 교인 개개인도 그러하고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비우는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비우며 살아가는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배부른 교회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교회이므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富)가 아니라 ‘비움’(空)이어야 합니다. 바울도 자신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성경공부 모임에서 '성령'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인도자가 "여러분은 성령의 활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활동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라고 참석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습니다. 그는 쓰레기를 거둬다 태우는 일을 하는 가난한 노동자였습니다.

"나는 성령의 활동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나는 쓰레기를 걷어다가 태우는 일을 하는데 이 일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터득한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쓰레기에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가끔 불씨가 완전히 꺼져버린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불씨를 찾으려고 쓰레기 속을 뒤지곤 하지요. 그렇게 뒤져보면 쓰레기 속에는 타다 남은 불씨 몇 개가 반드시 남아있습니다. 쓰레기 더미가 아무리 엄청나고 아무리 심하게 젖어 있어도 불씨가 완전히 꺼지는 법은 없더라는 겁니다. 사람이 쓰레기라면 성령은 그 안에 있는 불씨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교회가 쉬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이지요. 성령께서 사람을 정화하여 쓰레기 상태에서 벗어나 구원받도록 성령의 불씨 가까이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일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교회는 불씨 가장 가까이 있는 쓰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젖은 쓰레기를 태우려면 누군가가 스스로를 태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다른 쓰레기보다 먼저 타오르는 쓰레기입니다."

곽건용 / LA 향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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