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창조를 안다
믿음으로 창조를 안다
  • 김기현
  • 승인 2009.11.1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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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이란 고백은 과학을 배제하지 않는다

아이가 죽었다. 아비는 컴퓨터로 모든 자료와 통계를 집어넣어 호숫가 얼음의 두께를 정확히 계산하고, 그것도 못 미더워 직접 발로 쾅쾅 밟아서 확인까지 했건만. 스케이트를 지치던 아들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연작 드라마 <십계> 1편의 이야기다. 제목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다.

과학과 이성을 신으로 숭배하지만, 결국 배신당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신이 될 수 없으면서도 신이 되어 버린 과학의 맹목성을 감독은 고발한다. 영화는 과학을 현대인의 우상으로 지목한다. 우리 시대의 신은 과학이다. 사제는 과학자다. 그 성스러운 제단은 실험실이다. 그간 종교가 차지하던 신성한 권위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그 영예는 과학에게 돌아갔다. 하여, 묻는다. 정녕 과학이 신일 수 있는가? 너희는 과학이라는 신을 섬기지 않느냐? 그게 너희를 자유롭게 하더냐?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신자와 비신자,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와 무관심자가 마찬가지로 물음을 받는다. 한 죽은 어린이 앞에서 너희의 '세계관'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너희들, 또 신을 믿지 않는다는 너희들아, 여기서 너희가 할 줄 아는 말은 무엇인가?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너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슬픔에 잠긴 이들을 위하여 너희는 무슨 말을 찾아내는가? 대답은 열려 있다(H. 하켄베르그, <십계: 키에슬로프스키의 10부작 연작영화 길잡이>, 17).

우리 시대의 신으로 '과학'과 '국가', 그리고 '맘몬'이 거명되어야 한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세계관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너는 어떤 세계관을 갖고 사는가? 너희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그리고 과학과 국가, 자본에 희생당한 이들에게 어떤 희망의 말을 건넬 수 있는가? 과학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언하는 세계관이 피할 수 없는 물음이라는 것, 그 대답은 슬픔에 잠긴 이들을 위한 희망의 언어이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앞으로 논의를 이끌어 가고 해결의 실마리가 되며 답변의 골격과 골자가 될 것이다.

과학에 대한 네 가지 과제

   
 
  ▲  지적설계는 창조 세계에 편만한 하나님의 흔적을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 확신한다.  
 
과학과 관련된 우리의 과제는 다음 네 가지다. 첫째,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인가? 창조과학은 성서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마저도 과학적으로 입증 가능한 사실로 주장하고, 지적설계는 창조 세계에 편만한 하나님의 흔적을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 확신하고, 무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허무맹랑한 사이비 과학이라 비웃는다. 과연 이 전략들은 성서의 창조에 대한 온당한 해석학인가? 창조 이야기의 과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성서는 과학에 지침을 제공하는가?

성서를 성서로 읽자는 종교개혁 모토를 따르면, 성서를 토대로 특정한 과학적 견해를 입론하거나 반론하려는 것은 제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진화론보다는 창조과학과 지적설계, 특히 창조과학이 논의의 주된 초점이 된다. 그들은 창조 이야기를 오해했고, 왜곡했다. 창조는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해방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오늘 우리의 해석을 모세와 출애굽 민중들에게 제시했을 때, 여전히 해방의 복음이 되도록 해석해야 한다.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는 그 때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해방과 거리가 멀다. 엉뚱한 자리에 갖다두었기 때문이다.

둘째, 창조 이야기에서 드러난 하나님나라는 폭력적 제국주의와의 단절이요 거부다. 창세기를 비롯해서 모세오경을 출애굽과 바벨론 정황에서 읽으면 약자·빈자·소자·소수자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일체의 질서로부터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그 자체로 존중받고, 평화와 안식을 제공하는 대안적 질서를 창출하려는 것임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창조의 본질은 선이며, 방법은 평화며, 창조가 실현된 세계는 조화와 질서이며, 창조하신 목적은 안식이다. 우리는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보존하고 구속하는 일에 부름 받은 청지기다.

창조과학과 지적설계가 신학을 과학으로 변환시켰듯이, 일부 진화론자들은 신학자가 되려 하고, 일체의 모든 사물을 생물학으로 환원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전투적 무신론에서 창조 신앙이 그토록 투쟁했던 폭력적 제국주의를 본다. 실로 우려할 만하다. 종교적 근본주의가 과학으로 치장하려 하듯, 과학적 근본주의는 종교가 되려고 안달하는 듯하다.

이상의 두 가지가 창세기의 과학적 접근에 대한 비판이라면, 다음 두 가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긍정적 대안 모색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창조 이야기의 과학적 함의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 이야기의 실천적 함의에 관한 것이다.

셋째, 창조를 둘러싼 과학 이론은 주로 창세기 1장에 집중하였다. 내가 보기에 창조에 대한 보다 분명한 언급은 창세기 11장에서 찾을 수 있다. 신학적으로는 무신론이 되고, 종교적으로는 우상이 된 과학은 바벨탑 쌓기에 다름 아니다. 하여, 창세기 1장을 자연주의 vs. 초자연주의 대결로 독해하는 것은 무익하고 해롭다. 11장 읽기를 통해 논쟁 구도를 환원주의 vs. 다원주의로 변경하는 것이 시급하다. 자연주의와 다투지 말고 환원주의와 싸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창조는 과학적 진리인가 여부를 두고 벌이는 무익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와 생명의 실천을 전개하는 것이 기독교 과학자들이 얼른 회복해야 할 책무다. 기독교 과학자들의 연구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군사기술로 전환되고,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는 반생태적․반생명적 기술이 되는 문제를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과학이 불가피하게 또는 필연적으로 얽혀있는 국가와 자본의 절대 권력 앞에서, 과학이 국가주의와 군사주의의 종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노력 이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살아내는 일이 무엇인지를 성서에서 들어야 하겠다.

아이는 아직 죽지 않았다. 살아 있고, 살릴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아니며, 예수께서 '아빠'라고 불렀던 그 하나님이 참 신이라 고백하는 기독교 세계관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죽어 가고 있는 사람과 자연에 대해 분명 낯설고 기이하지만 새롭고 희망에 찬 단어가 있다. 평화와 생명이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십자가로 죽임을 살림으로 나아가는 일, 그것이 과학이 우상화되어 가는 시대에, 죽어 가는 아이를 살리는 열려 있는 대답이다.

창조 이야기는 과학인가?

창조 이야기와 과학과의 연결 고리는 창세기를 읽어 내는 방식과 연계되어 있다. 창세기란 어떤 책인가? 과학에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기독교 세계관이다. 창세기는 "신자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적절한 행동의 예를 제시하려는 의도가 있다"(롱맨 3세, <창세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42). 창세기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해석하는 렌즈를 확보한다. 인간과 관련해서 읽으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정말 고귀하고도 특별한 존재이지만, 창조된 존재라는 점에서 세상의 지배자가 아니다. 청지기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선하고 아름답다. 타락과 악에 의해 뒤틀려있기는 하지만 종내는 회복될 것이므로 인간과 세계,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잃지 않는다.

창세기 읽기는 세계관을 형성해 줄 뿐만 아니라 세계관에 입각한 행동 양식을 일러준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가인과 아벨의 예배와 예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도 그들처럼 실패하고 좌절할 수 있으나 끝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어서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미리 일러 주는 모델이다. 창조 이야기도 세계관을 형성하고, 실천을 이끌어주는 지표 역할을 한다. 과학을 어떻게 인식하고, 과학의 영역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창세기는 세계관 교과서인 동시에 구원의 이야기다. 세계관의 알맹이가 구원이다. 창세기의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나고 기록되는 모든 정황과 배경은 창조를 구원의 이야기로 읽도록 한다. 창세기는 정경으로 본다면 모세오경의 흐름 속에 자리하고, 시대로 본다면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기 맥락에 위치한다. 창조 사건의 연대가 출애굽보다 훨씬 이전이지만, 기록은 적어도 출애굽 이후 시작해 최종 완성이 바벨론 포로기라는 점은 창세기를 자연사이기보다 구원사로 읽게끔 한다.

구원사로 창세기 읽기는 창조도 출애굽 경험과 연결됨을 의미한다. "해방이 창조보다 우선적인 것인 것이므로 구원론이 우주론보다 우위에 있다"(도르테 죌레, <사랑과 노동>, 22). 그렇다고 폰 라드의 주장처럼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출애굽기의 서론으로 격하될 수 없다. 창조 신앙이 출애굽의 일부라는 점을 '미리암의 노래'(출 15장)에서 볼 수 있다(김이곤, <성서에 나타난 창조 신앙> 13). 또한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이름들도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을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창조 신앙 자체가 해방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악과 악한 신과 다투시는 마니교적 선한 신이 아니다. 혼돈, 공허, 흑암의 세력은 하나님의 적수도, 맞수도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숙고와 대화, 평화스럽고 심미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만드셨다. 그러나 창조주 신앙은 혼돈하고, 공허한 흑암의 세력들과의 투쟁을 독려한다. 그러기에 "창조주 신앙은 우상숭배에 대한 대안적·대앙적 삶의 체계다"(김회권, <모세오경 1>, 42). 선한 창조를 거부하고 반항하는 적대적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다. 그런 그들에게 창조는 하나님의 해방 이야기와 달리 어떤 이야기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창조가 아니다"(죌레, 23)는 말은 창조 이야기의 오독이다. 역사를 회고하건대, 설령 창조가 반동적으로 왜곡되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고, 과학적으로 왜곡되어 구원의 감격과 해방의 기쁨이 사장된, 박제된 이야기로 전락하지만, 그럴수록 창조를 구속의 역사와 연계하여 읽고, 그 이야기에 내재된 해방의 메시지를 드러내야 하겠다. 일찍이 그 작업을 바벨론 포로기의 이사야가 수행하였다. 그에게 고국으로 되돌아감, 포로에서 해방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이면서도 동시에 제2의,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출애굽의 재현이다.

예를 들어 보자.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따라 번성하는 이스라엘과 그에 저항하는 반역적 애굽의 체제의 충돌로 시작한다. 자신들을 구원했던 요셉의 은혜를 저버리고 학대하는 애굽의 시스템에서, 두려워한 나머지 태어나는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는 애굽의 질서에서 그 반역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들은 심판받아 마땅하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신다.

우리는 내가 낳은 아들을, 그가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낳자마자 죽여야 하거나 창일하는 나일 강물에 집어 던져야 하는 비극에서 비운의 운명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의 어미와 아비들을 상상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제 자식을 죽이는 법은 없다. 그네들의 가슴에 서린 통절한 한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어쩌면 그들은 아들을 강물에 던지면서 차라리 잘된 일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버리지 않아도 될 세상에 가는 거니까.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며 갖은 학대와 모진 노동, 가혹한 착취, 심한 모욕, 엄한 벌을 받으며 평생을 살지 않아도 되니까. 치 떨리는 분노와 켜켜이 쌓인 한의 깊이를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이런 이스라엘에게 창조는 자유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한답시고 화석을 들이댄다면, 이 세계를 창조한 설계자 운운할라치면, 대번에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공룡의 뼈와 전 지구적 홍수의 지질학적 자료가 애굽의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복된 해방의 소식이 되는가? 열 가지 재앙에서 설계와 설계자를 발견하려는 것은 하늘이 들을 정도로 '살려 달라, 제발 살려 달라' 부르짖는 비참한 노예 신분인 이스라엘에게 생뚱맞다 못해 황당하다. 해괴하고 괴상망측하다. 아이가 죽어가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말이 타당한 과학적 논리가 되려면 출애굽 백성들의 귀에도 구원으로 들려야 한다.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도 복음이 될 수 없다. 창조 신앙을 둘러싼 과학계의 해묵은 논쟁은 학문적으로는 그럴싸해보일지 몰라도, 과학자로서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더라도, 창세기와 전혀 무관하거나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런 방식은 텍스트에 대한 오해요, 왜곡이다. 창세기를 무시하는 처사다. 창조 신앙을 과학적으로 재구성하는 해석학으로 적절하지 않다.

하여, 구약학자 김회권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자연과학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이고, 과학이 창조에서 영적인 세계와 정치 도덕적 의미를 집요하게 분리하는 것을 개탄한다(<모세오경 1>, 49). 개혁파 구약학자인 존 스텍은 창조 기사가 우주의 시작을 기술하지만 우주의 연대를 기록한 것이 아니며, 과학이 아닌 신학적인 서술로 해석하라 말한다(<구약신학>, 284). 롱맨은 재미있는 말을 한다. "성경의 창조 기사는 찰스 다윈이나 스티븐 호킹을 반박하기 위해 기록된 게 아니라 당시에 라이벌 관계에 있던 창조 기사들의 견지에서 기록된 게 분명하다"(90).

철학자 강영안은 잘라 말한다. 창세기는 "과학적 진술이 아니라 신학적 문서"(<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 225)다. 천문학자 우종학에게 성경은 자연 현상을 설명해 주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92~96). 오늘의 과학 지식으로 보면 그렇게 해석된 성경은 비과학적인 책이다. 역사가 마크 놀은 창조과학이 복음주의에게 끼친 악영향을 이중의 비극이라 표현한다(<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285). 창조과학 옹호가 성경 옹호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은 자연을 자연 그대로 관찰하고 이해하는 능력의 상실이다.

창조과학, 지적설계, 유신론적 진화론…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결론은 이렇다. 성서는 현재의 논의와 논란으로부터 멀찌감치 비켜서 있다. 창조주 하나님 고백은 과학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하고, 창조자가 지적인 설계자라는 것을 논증하려는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는 창조 이야기의 과학적 재구성으로 적합하지 않다. 창조의 노예와 포로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벅찬 소식이었을 창조를 고작 지질학으로 축소하고, 해방의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인지도 모를, 그래서 어떤 신을 대입해도 좋을 그렇고 그런 신으로 확대하는 것은 그것이 과학적인지는 판단하지 않더라도 성서와는 무관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모든 것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다. 선택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23) 하지만 선택하더라도 서로 존중하는 열린 태도를 취해야 한다. 모든 것이 열려 있을 때,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성 어거스틴은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에서 특정 구절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이 많아서 열려 있을 경우에 우리는 그 해석들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맥그라스, <도킨스의 신>, 138).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그렇다면 창조과학, 지적설계, 유신론적 진화론 중, 무엇을 선택하고, 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바울이 말한 바, 유익과 덕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성 어거스틴이 아주 유용하고 유익한 지침을 제공한다. 그는 당대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과학의 결론을 취하여 참고하라고 한다. 이 기준에 따른다면, 우리의 신앙 고백인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 시대의 과학 패러다임인 진화론을 모순 없이 조정하려는 유신론적 진화론이 가장 근접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유익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유신론적 진화론도 그저 잠정적인 임시변통(ad hoc) 이론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가하고, 유익하고, 덕스럽다.

김기현 / 부산수정로교회 목사

김기현 님은 이사야 50장 4절의 학자와 제자가 되어, 말과 글로 주님과 교회, 이웃을 섬기는 비전을 품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PH. D)를 받았다.

*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글입니다.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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