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면'으로 쫓겨난 교회를 다시 '문화면'으로
'사회면'으로 쫓겨난 교회를 다시 '문화면'으로
  • 김기대
  • 승인 2009.11.29 21: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윤실 '건강교회포럼'…'고백형 변혁 교회' 모델을 제안한다

지난 11월 20일 LA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주최로 열린 '건강교회포럼'에서 김기대 목사(평화의교회)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교회의 사회 참여'라는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인터넷의 발전은 독자들이 신문에 접근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종이신문의 공간적 배치보다 주제별로 배치된 인터넷 뉴스는 찾고 싶은 것만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각 언론의 인터넷 판 문화면을 보면 여성, 여행, 건강, 교통, 책, 종교 등의 하위 섹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는 문화의 핵심이라는 폴 틸리히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보이려는 듯이 종교와 문화는 뗄 수 없는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이 한국의 언론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 종교 기사를 보고 싶으면 문화 섹션을 찾아 들어간다.

그런데 유일하게 진보 언론인 <한겨레>만이 종교를 사회 섹션에 포함시킨다. 이것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21세기 종교는 ‘사회’인가? ‘문화’인가? 왜 하필 진보 언론인 <한겨레>는 종교를 사회면에 두었을까?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은 여전히 종교를 문화 섹션에 두고 있다.)

21세기 종교는 ‘사회’인가? ‘문화’인가?

종교 기사가 사회면에 있다는 것은 적어도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종교는 더 이상 문화 또는 초월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교회의 권력 투쟁, 교회의 관심은 모두 문화가 아니라 사회에 관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 기사가 문화면에 배치되기를 바라는 것은 현대 기독교인들의 욕심이다. '하는 짓'은 사회적(세속적)이면서 다루어지기는 '문화'이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다.

교회의 순기능적인 측면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사회는 교회에 대해 게토화하지 말고 사회에 직접 뛰어들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다양한 참여를 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대형 교회들이 참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선입견이다. 대형 교회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어린이 집을 비롯한 여러 복지 모델에 투자를 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수구적인 입장에서 정치적 발언도 마다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른바 개혁적 그리스도인들이 대형 교회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복지 정책은 슬쩍 외면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이다.

이미 교회가 하는 일이 '문화적'이 아니라 '사회적'이 되어 버린 이 현실에서 교회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사회적' 교회는 교회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실 속에서 교회는 어떤 생존 전략을 취해야 하며 동시에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가가 이 글의 요지이다.

근대성을 결여한 한인 교회

미주 한인 교회의 양태를 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로 한인 교회는 회귀본능에 기초하고 있다. 사탕 수수밭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된 한인 이민사에서 한인 교회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귀소본능의 중심지였다. 이민자들은(교인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교회에 모여 고향 음식을 나누며 고향의 정보를 나누었다. 그들은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가 지역사회 책임을 요구하는 지극히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인 식당이 넘쳐나도 교회에서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이 교회의 중요 프로그램 중 하나다.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도 한인들은 교회에서 한국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과감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한다.

특히 정보 습득 수준이 낮아지는 고령층이 될수록 정보의 질과 양은 저하됨과 동시에 그에 대한 분석의 양은 늘어나면서 교회는 낮은 수준의 정보가 부끄럽지 않게 소통되는 부끄러운 공간이 되어 버렸다. 말도 안 되는 몰상식이 교회를 지배해도 정작 본인들만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 이러한 회귀 본능은 건강한 참여를 가로 막는다.

두 번째로 한인 교회는 문중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정보와 네트워크의 부재에 대해 걱정했던 교인들은 대형 교회를 통하여 불안감을 해소한다. 특히 60~70년대 이민자들이 그들의 고학력(대학 졸업)에 기초한 정보 능력을 과신하고, 학연을 통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대형 교회가 성장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대학 교육이 더 이상 고학력의 상징이 아니고 평준화 이후 학연에 의존하지 않는 세대에 속한 80년대 이후 이민자들에게는 전 세대와는 다른 형태의 네트워크가 필요했다. 인터넷으로 정보는 확보되었으나 교민사회의 정보의 양은 아직 미미하기에 네트워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90년대 말부터 생겨난 초대형 교회의 시작에 영향을 미쳤다. 인터넷의 세계에서도 몇몇 인기 있는 대형 사이트가 부익부 하듯이 대형 교회는 불안한 이민생활에서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갈구하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 세대 중에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들은 재빨리 소속감을 발견하던 장소를 동창회 또는 고향에서 교회로 옮기면서 교회 내 지배계급으로 성장한다. 그들은 문중의 제주(祭主)가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며 대형 문중에 속한 이들은 개인의 익명성 의존하면서도 교회의 명성에 편승하며 살아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형 교회의 사회 참여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다만 문중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참여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게 문제일 뿐이다.

세 번째로 한인 교회는 근대성을 결여하고 있다. 사회는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교회는 아직 근대를 채 경험하지도 못한 채 다음 세대를 맞고 있다. 한인 교회의 경우 유교적 봉건성과 합리성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면서 '합리'와 '상식'은 그나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시대에 접어들면서 근대를 대신하던 긍정적 의미의 유교적인 면과도 결별해 버린다. 그래서 외형은 형식과 권위를 부정하고 내용은 아직도 근대 이전을 갖고 있는, 즉 양복입고 삿갓 쓴 모습이 한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서도 어떤 건강한 참여 모델도 생겨날 수 없다.

'고백형 변혁 교회'를 주장한다

교회의 사회 참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람은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트 니버다. 그는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의 그리스도, 문화 위의 그리스도,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로 나누었는데 이중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가 교회의 사회 참여를 설명하는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교회는 과감하게 사회에 뛰어들어 문화를 변혁하고 사회를 변혁한다. 그것이 교회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최근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니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가 공적 교회관을 옹호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공적 교회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사회적 의제를 들고 사회로 진출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현실 사회의 구조 안에서 활동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 교회관이다. 즉 교회가 사회로 나간 것은 탓할 바 아니지만 그만 교회가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 김 목사는 '교회자체가 변혁의 주체가 아니고 신앙공동체에서 바른 신앙메시지를 받은 신도들이 사회를 향해 적극적 행동을 하는' 형태의 참여를 주문했다  
 

존 하워드 요더는 교회를 행동주의 교회, 회심주의 교회, 고백교회로 나누었다. 행동주의 교회는 교회를 개혁하는 일보다는 좀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이다. 회심주의 교회는 사회의 구조를 아무리 뜯어 고친들 인간의 죄의 결과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고백교회는 회심주의자들의 개인주의와 행동주의자들의 세속주의를 거부하며 교회의 사명이 회중으로 하여금 만물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결단케 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어느 유형이 가장 옳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어느 유형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상호 보완적인 가운데 교회는 사회에 들어가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회에 봉사하되 동시에 교회의 정체성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고백형 변혁교회'를 주장하고 싶다.

"여기서 기독교의 고유 본질과 교회의 참여적 기능의 긴장적 관계가 성립된다. 교회가 NGO 가 아니라 에클레시아(ekklesia)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모든 참여는 종말론에 기초해야 한다. 종말을 기다리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종말의 소식, 즉 희망의 소식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러므로 참여는 공동체 형성을 이루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개혁적 성향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동안 개종과 전도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해왔다. 길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과 동일시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세련된 현대인들은 그 대안으로 외부 선교를 찾았다.

지역사회를 공동체로 만드는 선교 활동에서 부진했다. 그리하여 교회만 세우면 그 지역이 선교된 것으로 보는 가톨릭의 선교 유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은 교구 개념으로 교회가 있는 지역은 선교가 되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다른 지역으로 선교를 가는 것은 그들 교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내적 일관성을 가진다. 그들 주장대로 하자면 주변에는 이미 다 선교가 되었기에 해외 선교로 눈을 돌린 것이다.

종교 개혁 이후 유럽 개신교도 새로운 선교터를 필요로 했다. 주변에는 이미 가톨릭의 손길이 미치고 있으므로 그들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선교적 사명을 하기 위해서는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것이 필요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국가로 건국된 미국은 마치 가톨릭처럼 모두가 기독교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신대륙의 환경은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두 번에 걸친 대각성운동은 그 신학적 성격은 차치하고라도 가장 현실적인 선교 전략이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이러한 종말론적 공동체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해외 선교도 필요하겠지만 교회 내적으로 공동체성을 의식화시키면서 주변부터 자선이 아니라 공동체에 일원으로 포함시켜 나가는 선교가 필요하다.

'사회면'으로 쫓겨난 교회를 다시 '문화면'으로

다양한 참여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빈민 구제, 해외 교회 지원, 복지 사업 등으로 되어 있던 제한적인 참여 모델을 넘어서서 다양한 형태의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기윤실 같은 기관에서 독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대화문화아카데미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업적은 참으로 크다. 그밖에 다양한 문화 운동, 학술운동, 대안 언론을 지원하는 것도 선교 또는 참여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성장 위주의 경제 발전은 인간 사회의 위험을 증가시켜 왔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산업 재해, 자연 재해가 엄청난 규모로 발생하고 있다. 이로 인한 사회적 손실만 해도 연간 7조 원을 넘어선다는 보고가 있다. 대규모 재난에 의한 피해는 빈곤한 사람들에게 집중된다.

신자유주의와 환경 파괴와 같은 거시적 개념을 교회가 외면한 채 빈민 구제 같은 미시적 차원에만 집중한다면 교회의 사회 참여는 빛을 잃게 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환경 파괴를 선도하는 정부에 대해 기독교인 대통령이라고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윤리가 아니라 믿음의 회복을 가치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일본의 저명한 사회학자 기라타니 고진은 종교의 시대가 아니라 윤리의 시대가 온다고 예측했지만 그의 예측은 빗나갈 것이다. 윤리는 사회적 합의점으로 의미가 있는 반면 지극히 상황적이라 약점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전히 고백과 회심 그리고 종말론적 공동체의 성격을 버려서는 안 된다.

기독교적 신념은 여타의 도덕 이해의 형태로서는 규정될 수 없다. 기독교 윤리는 신념에 대한 내적 검증을 통해서만 내적 진실성을 확보한다. 이런 전제 위에서 모든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면'으로 쫓겨난 교회를 다시 '문화면'으로 가져와야 한다.

특히 사회적 기업가를 만들어낸다는 마음으로 교회는 그 자체가 변혁의 주체가 아니라 교인들로 하여금 고백에 기초해서 변혁을 이루어내도록 가르쳐야 한다. 교회가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교인들을 믿음과 복음으로 양성하는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

교회는 개량 가능한 것으로만 설명 가능한 곳이 아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화처럼 건강한 교회는 물리적으로는 허약하다. 그러므로 윤리의 잣대가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될 경우 건강한 교회는 참여를 시작도 하기 전에 내부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엄격함은 미적(美的) 요인을 결여하기가 쉽다. 미덕이라는 말도 있듯이 덕은 아름다워야 한다.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칼로카가티아'(善美)는 윤리와 미학의 통일을 말한다.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할 때 가장 아름답다. 교회가 참여를 한다고 해서 NGO나 자선 단체가 되어서는 안 되고 교회는 여전히 아름다운 사귐의 장이 되어야 한다. 특히 자선이 아니라 나눔의 문화를 코이노니아 차원에서 가르쳐야 한다.

교회의 사회 참여는 공동체성 회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회의 양극화, 이민 사회에서 겪는 주류 사회와의 거리감, 백인을 제외한 타 인종에 대한 결례 등등 우리는 비 공동체적 정황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변에서부터 공동체성을 회복해 나가야 한다.

해외 선교, 오지에 있는 이들에게 복음과 의료와 물자를 전달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교회 주변의 공동체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그밖의 어떤 시도도 정당성을 잃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회중(congregation)임을 기억하자. 회중은 함께 (com)모이는 떼(gregis)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과 바로 옆에 양떼에서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것이 참여와 선교의 첫걸음이다. 이것이 교회의 사회 참여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시킨다.

복지 모델에서 참여 모델로 바뀌어야 한다. 그동안 교회의 공동체 참여가 관심을 가져온 분야는 '빈곤'이었다. 빈곤이 없어져야만 해결이 아니라, 과거보다 빈곤한 사람의 수가 줄어드는 것만 해도 빈곤의 해결이라고 하더라도 빈곤은 해결되지 않았다.

빈곤은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빈곤은 자본주의의 산물이고, 자본주의가 영속하는 한 빈곤은 존재한다. 빈곤은 상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위험이다. 빈곤의 구조적 모순을 외면한 채 이루어지는 참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경쟁을 옹호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빈곤에 대한 작은 나눔은 퇴색된다.

개교회적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 제도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간접 선교를 인정하는 풍토로 가야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복지학자인 로마니신(J.M. Romanyshyn)의 오래된 이론은 오늘날 교회에 여전히 유효하다. 로마니신은 복지의 개념이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교회의 참여 개념도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대 사회 포스트모던사회
보충적 제도적
자선 시민의 권리
선별적 서비스 보편적 서비스
최저 조건 최적 조건
개인적 문제 해결 방식 사회 개혁적 문제 예방 중심
민간에 의한 자발성 공공성
빈민 복지 복지 국가 또는 복지 사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