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을 감수합시다
불편을 감수합시다
  • 신동식
  • 승인 2010.01.0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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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건축 포럼 2] 사랑의 교회 건축에 대한 사회 선교적 고찰

사랑의교회 건축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의교회는 한국 교회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 새 모델을 제시한 것이 사실이다. 모두가 가지 않는 길을 가는, 무언가 한국 교회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보루로 생각한 것이다. 또 젊은 목회자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심어 준 교회였다.

그동안 진행된 CAL세미나('평신도를 깨운다' 제자 훈련 지도자 세미나)에 참여한 목회자들은 성장한 교회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세우라는 소리에 가슴이 뛰었고, 자신들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였다. 교회는 외형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목회 철학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의교회가 사랑을 저버리는 행위를 했다. 그간 사랑의교회가 성장해도 사람들은 인정했다. 밀려오는 성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옥한흠 목사는 건축하는 대신 불편하게 지내자고 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를 위한 배려였다. 불편을 감수하고도 가겠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그런 가치를 포기하고 30년간 쌓아 온 브랜드로 사람들에게 질 높은 서비스를 하겠단다. 한마디로 쓸어 담겠다는 것이다. 불편하게 살자고 유혹하고선 이제 교인들이 위험하고 불편하다는 논리로 초대형 교회를 건축하겠다는 것이다.

교회론적 가치 지키려면 건축 재고하라

"은퇴 후 저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우려합니다. 교회를 너무 키워 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옥한흠 목사는 최근 대담에서 한 사람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제자 훈련의 핵심이고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것인데, 너무 비대해진 사랑의교회는 위기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옥한흠 목사의 생각도 11월 15일 동영상 메시지에서 바뀌었다.

"세계 교회를 움직이고 깨우려면 제자 훈련하는 교회가 어느 정도 몸집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교회는 힘이 없어요. 사이즈가 있어야 결집하면 세계를 흔들 수 있어요."

이 말은 옥한흠 목사가 걸어왔던, 광인으로 외쳤던 삶과 다르다. 자신은 오직 교회만을 위하여 외부 사역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 세계 교회를 위하여 교회가 커져야 한다는 논리는 도대체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이 진짜 사랑의교회의 정신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이전의 사랑의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정신은 옳았다. 불편하더라도 정신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그런데 지금 그 정신이 훼손되었다. 사랑의교회는 불편을 감수하면서 교회론적 가치를 일관성 있게 지켰다. 그런데 일관성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한국 교회사에 대형 교회로 변절된 교회가 아니라, 불편을 감수하고 교회의 본질을 지킨 교회로 기록되기를 원한다면 건축을 재고해야 한다.

박용규 교수에 의하면 사랑의교회는 한국 교회사에서 의미 있는 교회다. 특별히 평신도를 깨운다는 슬로건과 함께한 제자 훈련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평신도들이 수동 신앙에서 능동 신앙으로 바뀐 것은 대단한 변혁이었다. 평신도 운동, 사회봉사, 대각성 운동, 복음주의 연합 정신으로 한국 교회 전체에 저변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사랑의교회는 한국 교회의 사회적 이미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랑의교회가 감당하던 사회봉사를 사회가 인정했다. 사랑의교회가 개교회가 아니라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임을 인지해야 한다.

초대형 교회 건축으로 건강한 교회 모델 상실

사랑의교회는 건강한 교회의 모델이었다. 신비주의와 체험주의 신앙이 아니라 성경을 온전하게 믿고 바르게 설교하고 제자 훈련을 통하여 세운 교회였다. 그런데 오정현 목사에 이르는 사랑의교회는 불안하다. 그 불안감이 건축 결정에서 나타났다. 건축은 자칫 세계 교회는 물론이고 한국 교회를 눈멀게 할 수 있다. 이는 옥한흠 목사의 교회론의 포기이고, 사랑의교회가 가지고 있던 가치의 상실이다.

결국 지금 사랑의교회가 추구하는 모델은 옥한흠 목사가 세웠던 모델이 아니라 새들백교회와 윌로우크릭교회다. 새들백이나 윌로우크릭처럼 세계적으로 제자 훈련을 알리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 바로 건축이다.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의교회로 순례하듯 오게 하는 것이다. 옥 목사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외부 집회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과 다른 모습이다. 물론 오정현 목사의 꿈을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사랑의교회는 오정현 목사의 꿈을 이루는 도구가 되지 않아야 한다. 평신도들이 깨어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 양극화 심화하는 초대형 교회 건축

월간 <목회와 신학> 조사에 의하면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10년 후 한국 교회를 생각할 때 가장 심각하게 대두될 것으로 교회의 양극화를 뽑았다. 한국의 대부분의 중소형 교회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교회의 양극화다. 지금까지 사랑의교회가 불편을 감수하였기에 한국 교회에 준 선한 일 가운데 하나는 사랑의교회로 몰렸던 사람들이 일부 지역 교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작지만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온갖 서비스로 다 모으겠다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작은 교회는 피해를 볼 것이다. 거기에 현 교회도 유지한다고 한다. 참으로 욕심이 크다. 욕심이 잉태하면 그 결과는 불행하다. 샛강을 죽이면 큰 강도 죽는다. 작은 교회를 코너로 모는 초대형 교회 건축은 이제 중단해야 한다. 

사랑의교회가 개교회를 넘어서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초대형 교회의 사랑의교회를 생각하니 떠오르는 단어가 '그리움'이다. 사랑의교회가 주었던 도전이 이제는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아쉽고 그래서 불편하게 살던 그 사랑의교회가 그립다.

둘째는 애처로움이다. 갑자기 교회가 커진다니 불쌍하고 애처롭게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마치 에베소 교회를 보는 것 같다. 세 번째는 이해다. 옥한흠 목사에 대한 이해다. 자신의 목회 철학을 마지막에 바꾸는 심정을 이해하고 싶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심정을 이해한다. 이해해도 아픔이 남는 것은 한국 교회의 좋은 전통을 물려주지 못한 것 때문이다.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를 위하여 불편을 감수하면서 참된 교회, 건강한 교회의 모델을 보여 줄 수 없었을까? 생각할수록 아픔이 남는다.

신동식 목사 / 문화와설교연구원 대표

* 이 글은 12월 22일에 열린 '사랑의교회 건축, 어떻게 볼 것인가?' 포럼 발제문을 요약한 것으로, 한국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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