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신학'이 낳은 땅밟기 사태
'무당신학'이 낳은 땅밟기 사태
  • 송병주
  • 승인 2010.11.05 03:47
  • 댓글 1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십자군의 정복'이 아닌 '십자가의 희생'을 기억하라

한국 서울의 봉은사 안에서 서로를 향한 깊은 상처가 있었다. 사람들은 봉은사 안에서 일어난 일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봉은사 밖에서 일어난 일을 더 깊게 고민하고 싶다. 봉은사 밖에서 어떤 일이, 어떤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기에 봉은사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봉은사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관심보다 그 밖에서 일어난 일을 다시금 고민했으면 한다. 잘못된 가르침과 오해가 이런 문제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 살펴야 이번일이 무례를 벗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우선 봉은사 땅밟기 논란을 언급할 때 비판의 도마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봉은사를 찾았던 몇몇 기독 청년들이다. 필자 역시 동일한 아쉬움을 갖고 있지만, 이것을 더 이상 그들의 '행위의 문제'로, '그들만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일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다. 이것은 교회와 신앙 지도자들의 무지와 왜곡된 가르침의 결과로 파생한 일이다. 봉은사 땅밟기에 참여했던 청년들도 '무당신학'에 빠진 지도자들의 희생자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말 그들의 행동이 한국 교회 전반과는 다른 이질적인 돌출 행동이었는가?

봉은사 땅밟기 청년들 역시, 또 다른 차원의 희생자

사실 그렇게 되도록 지도자들이 부추겨 놓고서는 이런 상황이 오자 어물쩍 넘어가려는 지도자들의 발 빼기에 마음이 답답하다. 더구나 이런 상황에도 "땅밟기가 무엇이 문제냐"는 인터콥 최바울 선교사의 어이없는 강변은 화가 나다 못해 이제 슬프고 연민마저 든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경에 대한 곡해로 영적전쟁을 오용하고 남용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어떤 곡해가 오늘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으며, 무엇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까.

   
 
  ▲ 봉은사를 찾아가 사죄하는 청년들.  
 
서구인들은 피식민지의 경험이 없다. 서구인들은 피식민지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서구 기독인들의 영적전쟁의 개념은 항상 정복전에 기초하고 있다. 정복자로서 식민지를 만들어오던 자신들의 승리주의적인 역사경험을 영적전쟁론에서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안타깝다. 문제는 수입 신학의 멘탈리티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국 기독교의 서구 영성 콤플렉스가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는 점이다. 피식민지 백성의 고통을 누구보다 깊게 겪은 민족이 일본 순사와 군대처럼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모습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만약 서울 시내에 독일 사람들 10여 명이 들어와서 기모노 입고 게다 신고 다니며 “천황을 섬기라. 신도를 믿으라”고 외치며 돌아다니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독일인들은 매우 순수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을 지켜보는 한국 사람들은 이것이 순수한 종교적인 문제로 보일까? 아니면 정치적인 문제로 보일까? 우리의 어설픈 영적전쟁이 참으로 '영적'이기만 하면 좋겠지만, 기독교의 그 순진한 영적인 행동이 얼마나 사악한 정치적 행동으로 보일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독일인들이 서울 거리서 일본 천황을 섬기라고 외친다면?

서구 기독교 국가들에게 제국주의적 수탈을 경험한 나라들에게 기독교는 순수한 종교가 아니라 침략의 도구로 인식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일본 신도를 순수 종교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와 동일할 것이다. 한국 정치인이 신도에 가서 분향한다면 그분의 순수한 종교생활로 받아들일 사람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서구 식민지권에 침탈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정복하러 왔다고 우리가 선포하고 다닌다면 그들은 이 메시지를 무엇으로 인식하겠는가?

서구 기독교 세계의 식민지 수탈을 경험한 그들에게 필요한 선교적 과제는 '회개와 용서 그리고 평화'다. 세계의 식민지 수탈로 왜곡된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죄를 우리의 죄로 고백하는 '동일시 회개'와 함께 용서를 구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회개의 진정성과 용서받고자 하는 진정성이 드러날 때 평화가 이루어지고 선교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영화 <미션>이 보여준 귀한 도전은 노예 상인이 신부가 되어 와서 회개와 용서의 진정성이 이루어 졌을 때 복음의 역사가 나타났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정복자로서 영적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과오에 대한 뼈를 깎는 마음으로 드리는 회개의 진정성을 통해 영적전쟁은 수행되어야 한다.

기억할 것은 영적전쟁은 정복하러 갈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영적전쟁은 식민지로 전락되어서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감당하는 영적전쟁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의 영적전쟁과 이스라엘 내의 바알과 아세라와 싸운 기드온의 영적전쟁은 본질은 동일하더라도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세라 신상을 찍어버리고 불태우는 기드온의 행동은 이스라엘이라는 자기 민족 공동체의 불신과 죄로 스며들어온 우상에 대한 징벌이었다. 즉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죽이는 세속주의와 샤머니즘 그리고 기복주의에 기초한 우상에 대한 징벌이었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영적전쟁이다.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 안에 성공주의와 기복주의와 혼합된 우상에 대해 우리는 철저하게 찍어 불태우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적 단일성을 가진 신앙 공동체 내에서 할 일이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다원화 사회 속에서 타 종교 시설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목사를 우상으로 만들고 세속적인 성공을 하나님으로 둔갑 시키는 맘몬주의를 향해 칼을 뽑는 것이 기드온의 정신을 찾는 일이다. 기드온의 칼날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거짓된 우상을 하나님으로 둔갑시킨 우리 내부를 향한 칼날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밖에서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영적전쟁은 어떤 것인지 우리는 다니엘의 사례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에서 수행한 영적전쟁은 다른 형태를 갖고 있었다. 자신이 해석해준 꿈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게 하는 행위 앞에서 기드온처럼 찍어 불태우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가만히 서서 경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해야 할 영적전쟁과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서 해야 할 영적전쟁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벨론 신에게 바쳐진 왕의 진미를 거부할 만큼 자신에게는 치열한 영적전쟁을 했으나,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서 해야 할 영적전쟁은 파괴적 승리주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지혜로움'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 태도'임을 알아야 한다.

바벨론의 신상엔 몸서리 치면서 교회 안의 바알엔 관대한 이중성

이스라엘 안에서는 바벨론식으로 하면서, 바벨론에 가서는 이스라엘식으로 하려는 모습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교회 안의 바알과 아세라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하면서, 바벨론에 세워진 신상에는 몸서리를 치게 만드는 것은 크게 곡해한 영적전쟁론이다. 타 종교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킴으로 자기 속에 가득한 우상을 간과하는 누를 범해선 안 된다. 더 강하게 품어야 할 적대감은 우리 안의 바알과 아세라 신상이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이 아니다. 기드온의 전쟁 같은 '적극적 공세'는 이스라엘 안에서 해야 한다. 바벨론 같은 다문화 사회 속에서 필요한 영적전쟁은 다니엘의 '적극적 자기 지킴'이다.

교회 안에 가득한 우상에 대해 기드온처럼 행동하라. 그리고 다문화 다종교의 세상 한 가운데에서는 다니엘처럼 행동하라. 이것은 지혜로움이 아니라 성경이 보여주는 본질적 태도이다. 아침에 기드온 묵상하고 은혜를 받았다면, 타 종교 시설에 가서 붉은 십자가 페인트칠을 하지 말고 교회 안에 가득한 우상부터 부수길 권하고 싶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하기 위해서 채찍을 휘두르셨지 로마의 신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신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은 성전의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지, 로마 신전이 무너질 것을 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 안에 가득한 우상을 파하시려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주술적 퇴마운동으로 혼동한 영적전쟁에 대한 오해

   
 
  ▲ 일제 시대에 민족 정기를 말살한다며 국토 곳곳에 박아놓았던 쇠말뚝. (출처 : 오마이뉴스)  
 
영적전쟁론의 문제에 깊게 들어가다 보면 사람들은 영적전쟁을 엑소시즘 같은 퇴마운동으로 쉽게 변질된다. 중세 카톨릭의 잘못된 영성 운동이 마녀사냥과 퇴마적 접근으로 일관하기 시작하면서 '마녀 감별법과 퇴마 행위마법'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주관적인 영적 감수성을 악령 구별의 잣대로 삼고, 해결한다고 성수 뿌리고, 향을 피우며, 봉인 의식에, 기름 바르기, 성물 숭배 현상 같은 행위를 통한 신통력의 발휘를 기대하는 '행위 마법'이 이어졌다.

베드로의 지팡이에서 최후의 만찬의 와인 잔에 야고보의 손톱과 바울의 치아까지… 악령 퇴치를 위한 부적 같은 주술적 성물 숭배사상은 집구석 구석 땅을 밟아주며 기도해주고 물을 뿌리는 의식 등과 함께 퇴마의 수단이었다. 종교 개혁가들이 치열하게 거부한 것을 적극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영적전쟁이 특별한 도구사용과 땅밟기와 같은 행위를 통해 영적 효력이 발생한다는 생각은 매우 주술적이다. 가장 미신적 주술을 척결하기 위해 동일하게 주술적 방법을 사용하는 어이없는 누를 범하는 것이다.

손을 뻗어 탑 주변을 돌며 대웅전 심장부에 들어가 손을 들어 기도하는 행위나, 일제 강점기 일본 총독부가 조선의 풍수지리를 파악하여 학의 목 부분에 길을 내고, 심장 부위에 쇠못 박는 것과 뭐가 다른가? 영적전쟁이 풍수지리에 기초하고 있는가? 풍수지리에 밝은 무당이나 퇴마사들이 하는 것과 영적전쟁이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영적전쟁은 행위 마법을 일으키는 퇴마운동이 아니다.

최근 인터콥의 최바울 선교사의 글에서 무지한 성경 해석의 극치를 본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도 7바퀴 돌았던 땅밟기라는 말은 성경해석과 신학의 빈곤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발언이고 거짓된 가르침이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결국 우리가 밟은 땅밟기의 결과로 발생한 영적 힘이 성벽을 휘어감아 무너뜨린 것인가? 땅 밟기로 여리고성이 무너지다니… 만약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당 종교'다. 부엌에 가서 피자 귀신 잡고, 화장실에 가서 악취 귀신 잡는….

우리는 지금 <고스트 버스터>같은 영화를 찍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은 산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역사 어디에도 종교 시설에 들어가서 소동부터 일으키고 시작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복음의 확장 속에 스스로 나아온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고, 자기 종교를 지키고자 하는 상대의 공격에 쫓겨나는 일은 있었어도 타 종교 시설에 직접 들어가 소위 '맞짱뜨는' 사역을 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도 아테네 사역에서 오히려 “아덴 사람들아 내가 보니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하면서 그들 안에 가득한 신전을 보며 복음의 접촉점으로 삼는 모습은 영적전쟁은 어떻게 수행하며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우습지 않은가? 로마인들이 십자가를 사용한 것과 똑같은 목적으로 우리도 십자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십자군은 십자가의 길이 아니다

십자군이 지나간 곳에는 살인과 방화와 약탈과 겁탈이 있었다. 십자군의 상징으로서 십자가는 고통과 죽음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십자군의 십자가는 로마가 사용한 사형 도구로서 가장 참혹한 죽음의 도구로 그들이 정복한 식민지 백성들의 가슴속에 공포로 각인되었다. 우습지 않은가? 로마인들이 십자가를 사용한 것과 똑같은 목적으로 우리도 십자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러므로 빨리 정리해야 할 생각은 십자군의 길과 십자가의 길은 다르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으로부터 고난 당한 희생과 고통의 상징이지, 세상을 고통스럽게 하고 죽이는 사형 도구가 절대 아니다. 십자군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 아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에는 사랑과 희생과 용서가 가득했다. 로마의 사형 도구를 용서의 통로로 사랑의 통로로 바꾼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영혼을 향한 십자가의 승리는 회개와 용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승리의 왕이신 예수의 영광은 겸손과 비천의 종이란 과정을 통해 성취되었다. 십자군의 승리는 칼과 죽임으로써 이루었지만, 십자가의 승리는 희생과 죽임 당함으로 이루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칼을 든 십자군의 길이 아니라 골고다에 숨 가쁘게 오른 십자가의 길을 좀 더 기억해야 한다.

건전한 상식 위에서…

기독교 신앙은 우선 건전한 상식에 기초한다. 남자가 여자 탈의실을 기웃거려서는 안 되며, 화장실에서 목욕하지 않고 목욕탕에서 소변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종교시설은 고유한 목적을 갖고 있고, 그 고유한 목적을 훼방 당해서는 안 된다. 교회 예배당에 불자들이 난입해서도 안 되며, 불교 사찰에 기독교인들이 난입해서도 안 된다. 불자들이 교회에 난입해서 향을 뿌리고 목탁 치며 절 마크를 교회 강대상에 페인팅하고 나면 최바울 선교사는 뭐라고 반응할지 참으로 궁금하다.

나는 그 동영상을 찍은 젊은이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누구를 탓할 것이 없이 이들을 가르친 목회자와 신앙 지도자들의 무지와 왜곡된 가르침이 그들을 그곳에 세우고 말았다. 정확히 그들도 잘못된 신앙지도자들의 몰상식한 가르침과 성경 이해의 희생자들이다. 더 이상 그들을 정죄함으로 자신들의 죄를 덮으려는 더 치졸한 방법은 없어져야 한다. 지금은 그들이 정죄 받아야 할 상황이 아니라 신앙의 지도자라고 명색에 불리는 사람들이 정죄 받아야 할 상황이다. 그래서 한순간 뉴스의 초점이 되어버린 그 젊은이들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그리고 봉은사 신도들과 명진 스님에게 지도자들의 큰 잘못이니 그들을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정죄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하지만 또 다른 희생자인 그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작성하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잘못했다'는 반응보다 '바보같이 동영상을 왜 올렸느냐?'는 반응이 있는 주종을 이루고 있는 풍토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안 될 단계에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흑인 신학자 제임스 코운은 백인 신학자들과 교회를 향해 말했다. “그들은 단지 윤리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틀렸기에 윤리적으로도 틀린 것이다.” 지금 기독교는 이 말을 되새김해야 한다. 젊은이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순수함을 왜곡된 신앙으로 부추긴 지도자들의 '푸닥거리 신학'이 비난 받아야 할 것이다.

송병주 목사 / LA 선한청지기교회 담임

* 이 글은 송병주 목사의 블로그( http://hanada386.tistory.com/ )에 실린 글입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신학도 2011-01-25 12:33:50
신학적인 문제가 있는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목숨걸고 선교한 최바울 선교사와 인터콥 사람들을 이렇게 대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참으로 한심 2010-11-23 20:17:58
인터콥식 땅밟기로 봉은사 땅밟기 했더니 봉은사 스님들이 모두가 다 예수님 영접했나요? 봉은사가 교회가 됫나요? 스님 앞에 무릎 꿇고 참 잘한 짓이다. 기독교와 하나님 이름을 개망신시킨 인터콥은 교계에서 사라지길 기도한다. 땅밟기가 무슨 전도고 선교냐? 사도바울이 땅밟기로 선교했더냐? 은밀하게 조용히 복음을 전하면서 전도하고 선교햇단 사실을 알아야 한다. 훼괴망측한 인터콥식 땅밟기.

김진수 2010-11-23 17:45:46
제발 인터콥 당신들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이단같은 논조로 세계선교를 망가트리는 이 주범들아! 최바울 박수 무당아! 제발 그만둬라, 너로 인해 세계선교, 그리스도의 선교가 무너지고 있음을 깨우치길 바란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최바울...., 저런 인간이 형제를 속이고 있으니...

박은미 2010-11-15 16:03:11
우리가 밟는 땅은 하나님의 땅이 되는것 입니다.하나니므이 사람들의 능력 입니다.생각만 해도 이루어지는데 다들 착각을 하시나 봅니다 살아게신 하나님은 능력과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우주만물이 예수님의 것이고 에수님은 하나님의 것 입니다.주님의 것은 전부다 우리의것 이라고 하셨습니다.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것이 영생 입니다.

인터콥 경계령 주의보 2010-11-14 00:52:17
한국에서 인기없는 인터콥이 미국으로 들어와 기승을 부리기 시작
미주 교회와의 마찰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
인터콥이 뭔지를 모르고 받아들였다가 울상이 된 미주한인교회 있음

교회에 침투하여 교인들을 충동하여 중동 중앙아시아로 땅밟기에 동원시킴
교인들을 빼다가 자기 지부 교회를 세움
지부에 충성케 함으로 교회일에서 멀어지게 만듬
목회자와 관계성 상실케 만듬

미주한인교회는 인터콥을 멀리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