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친구들아, 나처럼 비겁하게 살지 말거라
젊은 친구들아, 나처럼 비겁하게 살지 말거라
  • 이만열
  • 승인 2011.04.18 14:3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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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그리고 무임승차를 즐기는 공동체

   
 
  ▲ ⓒ기김진호  
 
누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한국의 4월은 ‘잔인한 달’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지금은 4∙19세대 외에는 거의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내게는 나태해질 때마다 엄혹하게 다가오는 무거운 바위산이 있다. ‘4∙19혁명’이다. 내 경험 때문일까. ‘4∙19’를 맞을 때마다 나는 빚진 마음을 금치 못한다. 군인 신분이었던 나는 ‘4∙19’가 터지던 날 새벽 청량리에서 춘천행 기차를 타고 화천군 사창리에 있는 주둔 부대로 돌아갔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휴가 마지막 날이어서 귀대(歸隊)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죽음의 현장을 비겁하게 빠져나갔다는 착각이 ‘자책’으로 남아 평생토록 짓눌리고 있다.

4∙19묘소를 찾을 때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낸 듯한 아픔이 엄습한다. 올해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런 빚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해마다 4∙19묘소를 찾는다.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봐서, 그들은 역사에 더 큰 족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빚진 마음은 한층 더해져, 자연스럽게 오늘날 자유와 인권, 민주와 평등을 누리는 삶이 그들의 희생 때문이라는 데로 이어진다. 마침 고난주간을 앞두었기 때문일까. 이 대목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이 빚진 마음이 역사에 무임승차해서는 안 된다는 자책으로 비수처럼 날을 세운다. 독자들은 이 글이 처음부터 너무 무거운 느낌이 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4월에 ‘4∙19혁명’을 거론하는 일은 자연스럽지만, 역사의식에 민감하지 않으면 ‘4월 혁명’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취업을 위해 스펙 쌓기에만 골몰하는 젊은이들에게 ‘혁명’이니 ‘희생’이니 하는 단어는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젊음이라는 가장 고귀한 자본을 갖고서도 그것을 취업과 시류(時流)에만 투자하려는 이가 있다면 작심하고 말하고 싶다. 그대들의 문제는 ‘경제 살리기’라는 시류 영합적 자세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고, 또 거기서는 문제의 영성적 본질마저 발견할 수 없다고 말이다.

유신 시절, 많은 학생이 학교에서 제적·투옥당하고 또 군문(軍門)에 강제로 가야 했다. 용기 있는 목회자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유신정권의 불의와 독재를 경고했다. 경찰서는 물론 보안부대와 감옥에도 드나들었다. 재판정에서 당당히 유신정권의 불의와 불법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 무렵 대학 전임으로 간 나는 침묵하거나 소리를 죽였다. 용기가 없어 그랬다지만, 그게 불의에 타협한 일이 아니고 뭘까. 부끄럽다. 지금도 그때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옥에서 보낸 이들을 가끔 만난다. 조금만 타협했다면 남 눈치 볼 것도 없이 그런대로 편안히 사셨을 분들인데, 거친 세월을 헤치며 살아온 모습을 보면 고개가 숙여진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이 같은 민주화의 혜택을 우리가 볼 수 있었을까. 그들마저 머리 잘 굴리는 ‘재주꾼’처럼 침묵하며 열심히 자신의 미래에 투자했다면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의 인권과 민주화를 맛볼 수 있었을까.

나는 안다. 그런 분 중에는 장안(長安)의 지가(紙價)를 올리던 큰 신문사의 주요 간부도 있었다. 유신독재 정권은 그들을 고위 관직으로 회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론의 원칙과 정도를 묵묵히 고수하면서 유혹을 뿌리쳤다. 해직(解職)이 강요되었을 때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았다. 타협하면 살길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다. 그럼에도 언론사에서 쫓겨난 뒤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해 부인이 행상을 하는 일도 있었고, 딸자식을 대학에 보내지 못하고 취직 전선으로 보낸 이도 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빚진 자다.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빚의 일부도 갚지 못한 옹졸한 ‘지식인’이다. ‘도청’이라는 풍문을 빌미로 그들에게 전화 한 통 넣기도 두려워했고, 차 한 잔, 점심 한 끼를 대접한 적도 없는 비겁자다. 그렇기에 나는 확신한다. 그들이 내쫓기고 고난받았기에 오늘 우리가 이만큼의 자유와 민주화의 과실을 따 먹고 있다는 것을.

유신 체제의 장본인이 사라졌다고 해서 민주화가 이뤄지진 않았다. 유신 체제하에서 단물을 빨아 먹고 자란 ‘신군부’ 세력이 1980년 ‘서울의 봄’을 여지없이 망가뜨렸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아니더라도, 학생, 교수, 기자들이 쫓겨났고 민주화 세력을 투옥하고자 감옥의 창살을 높였다. 신군부 파쇼 정권은 그 뒤 12년간 철권통치를 계속했다. 매판자본을 선두로 ‘산업화’ 세력이 그 정권에 빌붙었고, 언론기관과 지식인들도 곡학아세(曲學阿世)에 여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온․불순’ 세력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신군부 파쇼 세력에 불굴의 투지로 맞서 싸운 젊은이들과 비타협적 지식인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들에게도 빚진 자다. 아직도 진실을 말하면 ‘불순 세력’이라고 몰아세우는 여당 정치권은 그 당시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1987년 6월 항쟁 무렵, 연세대에서 뜻을 같이한 교수들이 모여 시국기도회를 열었다. 그 길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이한열 군을 찾아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서 기도 모임을 열었다. 어느 분의 강요로 뒷전에 있던 내가 얼떨결에 기도했다. 며칠 후 이한열 군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의 죽음은 결국 군부 파쇼 정권으로부터 대통령 직선제를 항복의 대가로 받아냈다. 한 사람의 용기와 희생이 민주개혁의 큰 동인이 되었다. 1992년 초까지 계속된 군부독재 체제의 마수성은 더 많은 젊은이를 제물로 강요했다. 1991년 4월부터 6월까지만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김철수, 정상순, 김귀정 등의 학생과 윤용하, 이정순, 석광수, 박창수 등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 갔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희생을 담보로 오늘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 젊은이들의 죽음이 오늘날 인권과 민주화를 보증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 못 한다.

그런데 말이다, 그 젊은이들의 희생을 담보로 우리가 자유와 인권을 누리고 있지만, 그들이 보증한 빚에 대해서는 무신경하지 않나. 그들의 희생을 토대로 오늘의 민주화가 진전되었음에도 그 희생의 가치를 확대·재생산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을 역사의식으로 승화하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토대로 이룬 민주역사에 무임승차한 뻔뻔스러운 존재들이다. 대가를 치를 생각은 조금도 없이 자유와 인권과 민주화를 누리기만 한다. 그들의 희생이 토대가 되어 한 세대 후 오늘날 ‘민주화’라는 과실을 맺었다면, 우리는 자녀 세대를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 자신을 담보물로 제공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무임승차하는 뻔뻔함을 모면하는 최소한의 길일 터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취업 전선에 몰두하면서 역사의식마저 상실한 듯하다. 젊은이들을 그렇게 만든 기성세대로서 무력감과 자괴감을 통감한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이 용서받거나 변명거리가 될 일은 결코 아니다. 시대 풍조도 경제 이외의 것에는 신경 쓰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옥죄고 있으니, 무기력증을 반전시킬 분위기를 조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이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경제도, 정의로운 사회도 기약하지 못한다. 이럴 때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 6:33)는 약속의 말씀에 용기를 얻는다. 그렇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결단 없이는 이 정권, 이 암울한 세대가 파놓은 깊은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승만 정권이나 유신독재 체제, 신군부 파쇼 체제의 엄혹함 속에서도 학생과 젊은이들은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불의에 항거하면서 자기 몸을 던졌다. 그것이 민주화를 가져왔고 산업화를 이끌었다. 그때도 취업 자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으로 암담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의 비전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데서 찾았다. 그것은 곧 자신의 희생을 의미했다. 그 요구에 먼저 순응했다. 자기 몸을 불사르는 젊음의 희생이 오늘을 이룩했다. 호구지책과 안일한 도생(圖生)만을 위해 젊음을 도로(徒勞)하다가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말할 것도 없고, 부수적으로 약속된 ‘이 모든 것’도 기약할 수 없다. 무임승차를 즐기는 공동체에 무슨 미래가 약속될 수 있겠는가.

이만열 / 전 국사편찬위원장

* <복음과상황> 에 실린 글을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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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2011-05-10 01:45:23
이만열 교수님을 존경합니다.

비겁하면서 존경받기 2011-05-04 06:54:15
이만열 선생님, 당신은 비겁자입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용기를 내야 할 순간에 비겁한 길을 갔기에, 선생님은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올라갔던 그 사다리를 걷어차버리고, 젊은이들은 그 사다리를 밟고 올라오지 말라 하면 어떻합니까? 치사합니다. 지금 용기를 발해야 하는 것은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선생님 세대입니다.

wordservant 2011-05-03 01:36:44
이 교수님, 좋은 글 고맙습니다. 저도 빚진자의 심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가 현재 누리는 자유와 인권은 무임승차한 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들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을 하려고 합니다. 필요하다면 죽는 순교도 해야하지만 먼저 산순교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려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요즘 젊은 이들 스펙 쌓으려고하는 것 많이 이해하고 싶습니다.

늦었는줄 알면 2011-05-03 01:30:49
그때 시국 운동에 동참 못한 것이 부끄러우신 줄 아시면, 지금이라도 움직여야하는데, 이젠 또 교회 개혁을 하는 것으로 자기 의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비정규직들과 소외계층이 자본가들의 폭압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그들은 안보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