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고난 모방…누가 예수를 조롱하나
십자가 고난 모방…누가 예수를 조롱하나
  • 김민수
  • 승인 2011.05.08 03:38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왜곡을 여실히 보여 준 사건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상징인 십자가가 조롱당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에 의해서 조롱당한다.

최근 한국의 도심 네온사인이나 LED십자가 첨탑은 '수면권 방해'라는 민원이 속출하고 있지만, 행정기관은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에 종교 시설의 종교적 상징물은 법으로 규제할 수 없다고 한다. 합법이라는 것이다. 이후에 알려진 내용으로는 종교 기관의 로비 활동이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며, 특정 종교를 믿는 분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까지 이르렀다.

도심의 네온사인이나 LED를 이용한 종교 시설물은 거의 대부분이 십자가이므로, 로비 활동을 한 분들도, 윗선에서 지시를 내리신 분도 그리스도교인임은 분명할 터이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상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왜곡을 여실히 보여 준 사건

그런데 최근 한국 경북 문경 둔덕산에서 십자가 처형 형태로 시신이 매달린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보도에 의하면, 현재 경찰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모방한 자살로 보고 있다. 이 사건은 종교적인 신념보다는 '정신병'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모방했으며, 그가 자살한 시점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그 날이다. 그가 자살한 장소도 돌무덤이며, 평소 지인에게 자신이 예수라고 했다는 점을 종합하면, 그는 예수처럼 사흘 만에 돌무덤에서 부활할 것을 믿고 그런 행동을 자행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물론 개인적인 '정신 병력'과도 관계가 있지만, 그리스도교가 얼마만큼 일반에게 왜곡되어 있으며,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병들어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십자가는 정치범을 죽이는 형틀이었다

지난 2,000년 동안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상징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는 본래 로마제국이 자신들에게 반기를 드는 정치범을 처형하는 형틀이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을 당했던 '강도' 역시도 당시 로마제국에 반기를 드는 이들을 '강도'라고 불렀으므로 우리가 아는 대로 도둑질이나 살인 같은 죄를 저지른 파렴치범들이 아니라 정치범이었던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 이스라엘의 본봉왕으로 유대 사회를 통치하던 빌라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협박과 포퓰리즘에 의해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만 보면 예수는 정치범으로 십자가형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의 상징이 되어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 초대교회가 형성되었고, 그들은 300년 가까이 온갖 핍박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다. 그때 '십자가'가 상징하는 바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밀라노칙령)하면서, 지하 동굴 카타콤에서 그리스도교는 밝은 세상으로 나왔을 뿐 아니라, 세상의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쥐게 되었다. 사실은 이때부터 그리스도교는 타락을 했으며,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까지 중세 시대는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는 세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암흑기'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십자가는 본래의 상징을 잃어버리고 '섬김'의 십자가가 아닌 '군림 혹은 통치'의 십자가가 되었다. '평화'의 상징이 '억압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왜곡된 복음 전파, 자신의 뿌리마저 부정

주물 신앙이 강한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십자가는 어렵지 않게 주물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달라도 '십자가'라는 것만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것은 붉은 네온사인으로, 서울역이나 명동에서 빨간 십자가를 들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으로, 붉은 십자가에 성구가 새겨진 차량에 대형 스피커를 들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으로, 전도를 한답시고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이 지극히 신앙적인 행동인 것처럼 전개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행동들은 안하무인적인 오만과 폭력으로 무장된 종교적인 광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양적인 성장에 치중한 한국 교회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머릿수를 늘리려고만 해 왔던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지 200년도 안 되어,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보수주의자들의 경우엔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되어 2,000년 동안 이어져 왔던 정통 그리스도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한 예가 "가톨릭은 이단이다"고 주장하는 경우다. 여러 가지 복잡한 속내들이 있겠지만, '오직 예수!'만을 구호로 외치는 이들에게 성인들을 추앙하는 것이 우상숭배로 비춰진 결과일 것이다.

타 종교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하려는 시도는 '종교 다원주의'로 몰아붙이며 이단시한다. 민주화를 위해서 일하는 교회와 목사는 '빨갱이'로 몰고, 교회를 개혁하려는 평신도들은 사이비 집단의 사주를 받은 것쯤으로 호도한다. 교회 개혁을 이야기하는 목사들에게는 "목회나 하라!"고 꾸짖는다. 이미 스스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이 믿는 것과 조금만 다르거나, 자신들이 확신하는 것에 도전하는 행위는 이단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축소판인 교회

목사들은 무조건 '아멘!'으로 화답하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 버린 설교는 깊이가 없다. 그 종착점은 '헌금 액수'가 '믿음의 척도'가 된다. 더 이상 교회는 소외된 자들 가난한 이들이 발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모든 소유를 내어놓고 필요에 따라 나누었던 것은 고사하고라도 경쟁 사회에서의 계급 구조가 그대로 교회에 들어왔다. 사회의 지도층이 곧 교회의 지도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맘몬이 고스란히 교회에 내재되면서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부의 성공을 거머쥔 교회의 모습은 중생의 구원이나 종교적인 성찰에는 관심이 없는 타 종교에게도 가히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타락한 종교를 유지시키려면 평신도들이 똑똑하면 골치 아프다. 맹종하는 이들만이 필요한 것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것은 전수되어 왔으며,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교인들이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문제 제기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지만, 그런 통로조차도 막혀 있는 것이다.

경북 문경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사건도 들어가 보면 깊이 없는 맹신적인 신앙과 정신병적인 것들이 교묘하게 얽히면서 일어난 사건인 것이다.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이들이 '사이비의 사주를 받고 교회를 혼란시키는 자'로 매도되고, 좀 더 넓은 품으로 종교 간의 대화를 시도하는 이들은 '종교 다원주의자'로 몰아붙인다.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부조리함을 성서 정신에 따라 신앙적인 양심의 행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좌빨(좌경빨갱이)'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 저절로 교회가 부흥할 터인데, 십자가 탑을 높이기에만 여념하고 있다. 교인들의 신앙을 성숙하게 만들기보다는 표면만 맴돌게 함으로써 바보 교인을 만들고 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제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제라도 그리스도교는 반성을 하고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란,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아섬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십자가를 더럽히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작은 실천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야광 십자가 조명탑은 교회가 스스로 철거해서 주민들의 거부감을 줄여 줘야 한다. 교회는 신앙 교육을 통해서 성서를 문자로 읽지 말고 의미로 읽게 만들어야 한다.

목사의 설교가 성서적이어야 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목사 한 사람이 꾸준히 관심을 갖고 돌볼 수 있는 교인의 수가 얼마일까? 대형화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사는 검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일반인들의 상식을 넘는 부를 교인들의 헌금으로 누린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평신도들도 변해야 한다. 무조건 '아멘!'할 것이 아니다. 때론 목사의 반성서적인 설교에 대해서 비판할 줄도 알아야 한다. 목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교인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평신도 혹은 교인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려면, 예배에만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생활 끝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종교마다 경전이 있다. 경전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 없는 신앙인이 있다면 무늬만 신앙인이 아니겠는가?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다 된 줄 생각하면, 그것이 개인의 여러 가지 상황과 만나면 이번 십자가 자살 같은 극단적인 것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다.

김민수 / 목사

* 한국 <뉴스앤조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11-06-12 09:15:41
종교적 신념과 정신병이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내면의 체험" 그거 하나로 들이밀대가 생긴 일

동키호테 2011-05-22 16:58:56
"이제라도 그리스도교는 반성을 하고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란,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아섬을 의미한다."
라고 하셨네요...근데 잘못하고 있다는걸 모르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회개를 한답니까? '회개'가 이루어 질려면 잘못을 행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먼저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남들은 아는데 왜 본인들은 모르는지..하지만 자기 눈의 들보보다 형제의 눈에 티가 더 잘보이는 법..물론 저도 자유롭지 못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