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왕년에는…"
"나도 왕년에는…"
  • 남상곤
  • 승인 2011.06.1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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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잘다니는 교회(9) 왕년의 하나님, 지금은?

'초등학교 때 반장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어?' 사람들과 모여서 어린 시절을 이야기 하게 되면 언제나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싯적에 반장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어?’ 혹은 ‘초등학교 때 공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어?’ 입니다. 그러한 이야기가 깊어가다 보면, 이제 ‘내가 왕년에…’의 레퍼토리가 시작됩니다.

정말 왕년에는 다들 대단하십니다. 행군 나가서 호랑이를 만났다는 둥, 철책선에서 근무할 때 북한군 초병과 말뚝박기하고 놀았다는 둥, 수많은 여자(혹은 남자)가 나를 뒤쫓아 다녔다는 둥, 한 공부했다는 둥, 엄청난 사업으로 어마어마하게 잘 나갔다는 둥… 그러한 이야기 듣고 있으면 ‘참 대단한 사람들이 모여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왕년에 특별한 게 없었던 저로서는 ’과연 정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초등학교 때 반장 안 해본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도 한때, 젊었을 적에
 
재미있게도 이야기가 깊어질 수록 ‘내가 왕년에는…’을 강조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왕년에는 잘 나갔는데, 결국 지금은 잘 안 나간다’ 입니다. 제가 아는 한 형님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나오셨습니다. 그것도 전국에서 손꼽는 등수로 입학하셨습니다. 그 형님은 그때가 그분의 전성기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왕년에는’ 이란 말은 그 형님에게는 그 명문대에 입학하실 때인가 봅니다.

그때가 정확히 기억은 못하겠는데 아마도 1989년인가 그런데 그 형님의 인생은 그 1989년에 정확히 멈춰 있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입학 등수와 입학점수를 정확히 외우고 기억하시는 형님은 비록 아직 직장도 못 가져 보시고 집에서 눈치 보며 대박을 여전히 꿈꾸시지만, 명문대를 나오신 형님이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형님의 1989년 이후의 삶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잘 나가시는 분들은 굳이 ‘왕년’을 들먹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그 빛나는 순간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잘 못 나가시는 분들이 늘 강조하시는 것이 바로 ‘내가 왕년에는…’ 레퍼토리입니다. 그래서 그 레퍼토리가 시작될 때는 조금 서글퍼집니다. 그렇게 왕년에 화려하고 잘 나가셨던 분들이 왜 지금은 저렇게 초라해지셨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조금씩 싫증이 나기도 하면서 ‘과연 정말일까?’ 하는 의심까지 들기도 합니다. 더 심해지면, 그분들은 무슨 이야기만 나오면 자신이 젊었을 때 겪어보고 고민해본 문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모른다는 둥, 결론은 버킹검 이라는 둥 의 이야기를 늘어놓으십니다. 하품이 나기 시작합니다.
 
새벽기도, 금식기도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어?
 
이 이야기가 교회 안에서 시작하게 되면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40일 새벽기도, 20일 금식기도, 안 해 본 사람이 없고, 다들 신앙적으로 잘 나가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날마다 새벽을 깨우고, 24시간을 성령에 충만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그렇게 하나님과 가깝게 지냈다는 고백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작정기도 끝에 응답을 얻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고, 역사해주셨고, 지켜주시고 함께해 주셨다고 합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저도 신앙적으로 잘 나간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몸매(?)에 물만 마시며 일주일 금식기도를 해본 적도 있는 것 같고, 성경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다는 말을 경험하고 성경읽기에 온통 시간을 뺏겨본 적도 있는 것도 같고, 기도한답시고 산에 올라가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도 외쳐도 보았고, 40일 새벽기도에 개근해서 공로패(?) 같은 것도 받아 본 것 같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그때의 훈장인 너덜너덜해진 성경과 공로패를 보면 저도 모르게 뿌듯해졌던 것 같습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나도 왕년에는 정말 성령충만했었지’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단 저 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 ‘왕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신앙의 ‘왕년’이 있는 우리는, 우리 안에 지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나 말씀을 나눌 때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마음 잘 알지,’ ‘그때가 좋을 때지,’ ‘나도 겪어봤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한바탕 나도 ‘왕년에는’ 레퍼토리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나도 한때, 젊었을 적에 그러했었다’라는 분에 넘은 훈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무리수가 시작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의 ‘왕년’에는 지금의 초라함이 묻어나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현실과 타협하고, 바리새인 같은 율법주의자가 되어 섣불리 남을 판단하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왕년’을 회복하지 못하고 무리수를 두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를 속이는 심각한 상황이 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나누는 지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현재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겸손히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치유가 어려운 거짓은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 어떠한 사람인지를 모르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현재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해도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는지 모르는 위선적인 바리새인의 모습만 남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외치고 나누는 자가 눈에 가시같이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 지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사도행전 7장 54절)
 
바로 신앙에서의 ‘왕년’만 강조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지금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믿음생활에서의 경험은 지금 내가 혹은 우리 공동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이고 나침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나 다윗의 하나님을 강조했던 것은, 자신들의 선조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어떠한 일들을 경험했는지를 상기하고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선조들의 믿음의 경험은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었던 것입니다. ‘아! 그 시절 모세의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셨었지. 그때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나아가면 모세와 유대백성들에게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역사하시겠구나!’ 하고 나아가는 믿음의 선진들의 교훈인 것입니다.
 
‘내가 왕년에는’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도 그 ‘왕년’에 갇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내가 왕년에 겪었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때에 그렇게 역사하셨으니 지금 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공의를 외치고 나아가면 그때처럼 역사하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왕년’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왕년’의 하나님이 바로 ‘지금의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고 그 모세의 하나님이 바로 나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서 남겨준 수많은 선진들의 이야기들은 바로 ‘이 왕년의 하나님을 왕년에 갇혀두지 말고 현재 나의,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라!’ 라는 것입니다.
 
'내가 왕년에는'은 결코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다'라는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큰일들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지금 바로 서 있지 않은 모습들을 성경에서도, 역사에서도 그리고 지금 교회에서도 수없이 목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왕년에는'는 훈장처럼 고이고이 모셔두는 전가의 보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었던 그 '왕년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때의 마음과 기도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무릎을 꿇고 그 하나님을 지금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수없이 나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면 그냥 역사의 교훈으로 끝나지만,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바로 나와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나아갈 때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지금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왕년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은 옛날의 그 ‘왕년’의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그 왕년에서 나오셔서 지금 여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 왕년에서 하나님을 가두고 스스로 왕년에서 멈추어 사실 겁니까? 아니면 바로 지금 여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것입니까?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왕년에 젖어 ‘내가 소싯적에 젊었을 적에 그러했었지’에 영원히 멈추어 사실 겁니까? 선택은 우리의 몫이지만,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과거의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이를 거울삼아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때 요단강을 갈랐던 그 하나님은 바로 지금 나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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