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대 폐지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이들에게
성가대 폐지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이들에게
  • 지강유철
  • 승인 2011.06.29 12:0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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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톺아보는 성가대 이야기

성가대 잡지 한 권 없는 한국교회

개신교 신자 열 명 중 최소 두 명은 교회에서 성가대 봉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한국교회에 성가대가 있고, 특히 큰 교회들은 주일 시간대별 성가대는 물론 수요 기도회, 금요 심야 기도회, 주일 새벽 기도회, 심지어 장례식을 전담하는 성가대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몇 년 전 동네 작은 교회에 갔더니 대원 5명의 초미니 성가대가 있더군요. 한국교회의 성가대 강박증이 얼마나 심한지를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성가대가 이처럼 넘쳐나는데도 읽을 만한 성가대 잡지 한 권 없다는 사실은 충격입니다. 매월 수백 종류의 잡지가 발행되고 있음은 차치하고라도 기독교 잡지도 수십 종류나 되는데 200만 명 안팎의 성가대원을 위한 잡지가 없다는 것만큼 한국교회 성가대 문화의 비정상성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요? 80~90년대에는 교회음악 작곡가 김두완 선생을 중심으로 한 그룹에서 성가대 잡지를 발간했습니다. 당시 그 잡지를 아는 성가대원들이 극소수였고, 폐간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주일학교 교사들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여름이나 겨울 강습회에 수십 년째 참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가대는 대원의 선발이든 기존 대원의 재교육이든 교단 차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헌신 예배, 자체 세미나, 성가대 위로회 정도가 성가대 1년 프로그램의 전부라 보시면 됩니다. 그마저도 요즘은 바쁘고 잘 모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간소화되거나 없어진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성가대는 1년 52주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찬양합니다. 오죽하면 "만약 내가 담임목사가 된다면 성가대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반드시 방학이나 성가대 없는 주일예배"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겠습니까.

   
 
  ▲ 한국교회 성가대가 200백 만 명이 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작 성가대원이 읽을 만한 성가대 잡지 한 권 없다는 사실은 충격입니다. ⓒ 지강유철  
 
거의 출간되지 않은 성가곡 해설서

한국교회에는 성가대 전문 잡지만 없는 게 아닙니다. 대원들이 곁에 두고 참고할 만한 성가곡 해설서랄까, 교회음악의 역사나 작품을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소개해 주는 교양서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전공자가 쓴 <지상에 핀 천상의 음악>과 개신교 작곡가 김규현 씨가 쓴 <한국교회음악 작곡가의 세계> 이외엔 눈에 띄는 책이 없더군요. 한두 권의 서양음악 작곡가에 대한 해설서가 기독 출판사에서 번역된 적은 있지만 모두 절판되었더군요. 그 밖의 다른 책도 있었지만 제가 몰랐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중앙국립도서관에나 가야 찾을 수 있는 책이라면 평범한 대원들에겐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소개한 두 권의 성가 해설집도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각각 서양 종교음악이나 한국 작곡가만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일부 대형 교회나 초대형 교회를 제외한다면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교회 성가대는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 브루크너 등등의 서양 작곡가들의 작품을 예배에서 거의 부르지 않았고, 절기 칸타타마저도 20세기에 작곡된 미국 작곡가의 작품 일색입니다. 혹시 지금 서점에 나가 운 좋게 두 권의 책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매주 교회에서 드리는 찬양에는 별 도움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클래식 전문 연주자나 음대 교수가 지휘를 하고 있는 성가대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성가대 고령화 현상에 직면한 한국교회

언제까지나 초고속 성장을 할 것 같던 한국교회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인이 줄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성가대에도 영향을 끼쳤지요.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전통적으로 고수해 온 4성부 합창에 생긴 균열입니다. 남성 대원수의 감소로 4성부 합창이 불가능해지자 미국에서 3성부 성가집이 수입되더군요. 최근에 번역된 성가곡집은 사실상 3성부입니다. 외형은 4성부이지만 중요한 몇 군데만 4성부로 편곡하였을 뿐 3성부가 곡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가대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성가대의 고령화 현상입니다. 20대는커녕 30대도 성가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젊은 친구들이 성가대를 외면하고 있거든요. 이는 도시와 농어촌, 대형 교회나 개척 교회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교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한국교회 성가대가 경로당이 되는 날도 머지않아 보입니다. 80년대 중반부터 들풀처럼 번진 '경배와 찬양'이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겠지요.

하지만 외적인 변화만으로 성가대의 고령화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가대 내부의 문제도 외적 변화만큼이나 심각하다는 의미겠지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민 교회는 30~40년이 지나도 당시 문화가 그대로 유지되듯 대다수 한국교회 성가대의 연습 방식이나 조직도 몇십 년 전과 엇비슷합니다. 제가 자란 화천군은 중학교에만 피아노가 딱 한 대 있었습니다. 요즘은 한 집 건너 피아노가 있고, CD, DVD, MP3 등의 각종 플레이어를 싼 가격에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회는 이렇게 변했는데 성가대는 30~40년 전의 방식 그대로입니다. 세상이 크게 변했지만 성가대는 여전히 악보를 읽지 못하는 대원이 부지기수입니다. 80~90퍼센트에 해당되는 한국교회의 중소형 교회들은 각종 찬양 대회를 많이 개최합니다. 찬양 때문에 건전한 놀이나 문화 행사가 교회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입니다.

겉도는 찬양, 헛도는 삶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교회 성가대는 음정이나 박자를 틀려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서 지나치게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찬양과 무관하게 지내다가 주일 아침 연습 시간에야 곡과 가사를 익히기에 급급한 대원들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 주 동안 가사를 생각하고, 그걸 어떻게 전달할까를 기도 중에 숙성시켜서 찬양드리는 일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물론 그런 대원들도 음악이 곧 찬양이 아니라는 것쯤은 압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진정한 찬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30여 년 동안의 성가대 지휘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교회만큼 삶과 찬양이, 주일과 평일이 헛도는 대원들의 수가 이렇게 많은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 싶습니다. 매주 열심히 연습하고 기도하면서 정성스럽게 찬양을 준비하는 지휘자나 솔리스트나 대원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까 매우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성가대원들이 음악적으로 틀리지 않으려는 노력의 절반이라도 자신의 내면을 찬양에 합당하도록 가꾸고, 담임목사나 교인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려 노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국 음악의 젖줄인 성가대

제게 음악의 즐거움을 가르쳐 준 곳은 교회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대여섯 살 때 제가 다니던 교회에 야마하 풍금이 들어오던 날을 기억합니다. 풍금을 어떤 교인이 지게에 짊어지고 교회로 들어오던 것을 신기하다는 듯 보았거든요. 초등학교 때는 바로 그 풍금 반주에 맞춰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로 시작되는 여름성경학교 교가를 소리 높이 불렀고, 변성기 이후엔 그 풍금 반주에 맞춰 4성부 합창의 즐거움을 배웠습니다. 중학교 1학년 겨울부터는 그 풍금으로 바이엘과 찬송가를 독학으로 배웠습니다. 그렇게 야마하 풍금을 끼고 살았던 중학교 시절, 저는 누가 그 풍금을 연주하든 어떤 장조로 연주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아 맞혔습니다. 제게 절대음감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 풍금 소리에 익숙한 나머지 각 장조의 음색까지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음악에 소질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도 교회였고, 까까머리 중학생으로 어른들과 함께 헨델과 베토벤과 하이든의 성가곡을 부르는 일이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도 그때 알았습니다. 이것이 저만의 경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통계는 없지만 클래식 연주자들의 경우는 교회, 특히 성가대를 통해 음악의 길로 접어든 사람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오래전에 프로 합창단 연주회장에 갔을 때 일입니다. 지휘자가 앙코르를 하려다가 돌아서서 이런 멘트를 날리더군요.

"우리 합창단원들은 어떻게 모이다 보니까 모두 크리스천입니다. 그래서 오늘 앙코르는 말롯테의 '주기도문'입니다."

한국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외국에서 살다 온 가정이 늘어나면서 교회를 통해 전문 연주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의 숫자가 조금 줄어든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신, 구교 성가대는 한국 음악의 젖줄이자 자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특히 성악의 경우는 성당이나 교회 성가대 출신이 압도적입니다. 만약 대한민국 공교육이 튼실해서 어린이들의 재능을 조기 발견할 뿐 아니라 돈이 없어도 그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이라면, 성가대 폐지를 좀 더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교육이 붕괴되고 양극화 현상이 날로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성가대 폐지보다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찬양대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면 성가대 지원자들이 헌신의 자세로 자원하도록 교회가 도와야 한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상식 회복 절실한 성가대 문화

몇 년 전 <교회가 없다>는 책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거의 모든 제도가 이교적인 기원을 갖는다는, 진보적인 사람들조차도 약간은 버거워했던 책이었습니다. 저자 프랭크 바이올라에 의하면 성가대는 없어져야 할 이교적 문화의 산물이더군요. 교회 내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 주신 제도와 형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 국가, 환경에 따라 교회 안에 새로운 제도나 모임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때문에 교회의 가장 작은 제도나 직분조차 성서적 근거가 없으면 모두 몰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근본주의적 태도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편의를 위해 인간이 만든 제도를 하나님이 제정하신 자리에 올려놓아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찬양대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요? 이 글에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기에 적당치 않겠지만 대원 선발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부 교회를 제외하면 대다수 한국교회는 찬양대원의 임명에 있어서 교인의 의사나 자질보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우선시 됩니다. 성가대석을 일단 채우는 일이 대원들의 자발성이나 재능의 유무보다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교회가 정한 선의의 강요가 정당화되는 것이지요. 재능보다는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사명에 의해 억지로 끌려온 성가대원이 많다 보니 오디션을 통해 성가대를 구성하려는 시도가 '은혜롭지 못한 일'로 치부되게 된 것입니다.

성가대에 들어와 있는 소위 억지 대원의 수가 줄지 않고서는 찬양대가 건강한 활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해는 사양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오디션을 다시 해서 대원의 절반이라도 뚝 잘라내자는 게 아닙니다. 교회라면 결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한국교회 성가대가 우선은 이 정도의 상식만이라도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성가대원이 좀 줄어들면 어떻습니까. 상식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는 찬양에 재능을 타고 났으되 찬양으로 봉사하고 싶은 사람들로 성가대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존의 관행을 버리고 지금부터라도 성가대 지원자를 슬기롭게 선발하여 임명하고, 자발적인 헌신이 꽃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 하나만 제대로 되더라도 한국교회 성가대의 내일이 그렇게 어둡진 않을 것입니다.

성가대 폐지하려다 교단이 쪼개져서야

한국교회 성가대가 개교회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장로하고 싶은 교인들이 차량 봉사부로 몰리고, 드러나기 좋아하는 교인들이 성가대를 선호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공공연한 비밀도 못 됩니다. 성가대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좀 과하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지휘, 반주, 솔리스트, 오케스트라 단원 사례비나 수십억대의 파이프 오르간 설치 등에 대한 비판이 종종 성가대를 폐지해야 한다는 설전으로 치닫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가대 봉사자들에게만 유독 사례비를 지급하는 관행은 담임목사나 당회가 내린 결정입니다. 때문에 그 결정에 문제가 있다면 교회 지도층이 비난을 받아야 하겠는데 싸늘한 시선을 견뎌 내야 하는 쪽은 성가대, 특히 그 교회 출신이 아니라서 힘없는 반주자, 솔리스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입니다. 같은 봉사를 하면서 성가대만이 특혜를 받는 것을 제지하지 못한 일차적 책임이 성가대에 있습니다. 그걸 부정할 순 없겠지요. 그러나 잘못은 교회 지도층이 하고, 그 책임은 성가대가 떠안는 현재의 분위기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성가대 폐지론이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가장 잘 믿으려는 교인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것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성가대 폐지론을 공적으로 제기하지는 못하더군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고 그로 인해 받을 타격이 너무 크다 보니 결코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가대 문제로 대화를 하다 보면 '신앙도 별로 없으면서 찬양한다고 거들먹거리는 성가대가 폐지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더군요.

1906년이던가요? 미국에 있는 그리스도의교회라는 교단에서는 예배에서 악기를 사용해도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보수와 진보파가 대립을 하다가 끝내 교단이 둘로 쪼개졌습니다. 진보파 사람들은 예배 때 악기를 사용하는 유악기파(有樂器派)로 몰렸고, 근본주의적 신앙 색채를 가진 교인들은 무악기파(無樂器派)가 되어 교회에서 악기를 내몰았습니다. 예배에서 악기 사용하는 게 뭐라고 교단까지 갈라졌을까를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옵니다. 그 전철을 100년도 더 지난 지금 여기에서 다시 밟는 데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지강유철 /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장기려, 그 사람> 저자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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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woong 2011-07-06 17:45:07
성가대의 위치만 바뀌도 분위기가 확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은 성가대가 모든 성도가 다 볼 수 있는 곳에 있지만 성가대를 가장 뒤쪽에 위치하게 하면 성가대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는 성가대가 될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으면, 자연히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받으려는 자들은 하나씩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성가대의 위치를 바꾸는 운동이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쫌~~~ 2011-07-06 02:44:21
좋은 기사가 아니네요...젊은이들만 성가대? 노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있어 나이를 구분 하시다니 참 ~~~

바두기 2011-07-05 03:55:23
왜 동네의 작은 교회에 있는 다섯명의 성가대가 한국교회의 성가대 강박증을 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교회 사정을 자세히 취재하셔서 내린 결론입니까 아니면 작은교회에 성가대가 있으니까 우습게 보였습니까?

어떤 문제점을 제기하려고 하시는건 알겠는데 그런 삐딱한 시선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약과 상상으로 함부로 단정하고 판단하는 모습이 좋아보이진 않습니다. 그 교회를 정기적으로 다녀서 사정을 잘 아시는 상황에서 쓰신 거면 죄송하게 됐습니다만... 그런거 같지는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