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아는데 우리는 모르는 이야기
그들은 아는데 우리는 모르는 이야기
  • 김성회
  • 승인 2011.07.14 15:1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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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문 목사의 모든 감각을 사용한 성경 읽기

지난 6월 29일 LA 한길교회(노진준 목사)의 예배당에는 남성 향수 냄새가 강하게 퍼져 나갔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녀 구분 없이 손에 향수를 바르고 냄새를 맡아보고 있었다. 향이 진한 그 향수는 식물에서 추출한 것이었고 이름은 "나드"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 발에 발라드렸다는 그 향을 맡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머물던 그 방의 넓이는 얼마나 됐고 발에 옥합을 깨뜨려 부었다는데 그 용량은 얼마였을까?

   
 
  ▲ 예수님 발에 부었다는 향유(나드)를 직접 발라보고 있는 참석자. ⓒ미주뉴스앤조이  
 
1세기 사람들은 머릿속에 이런 구체적 풍경과 감각을 떠올리며 들었을 성경 이야기를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그저 활자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랍어를 전공하고 신학대학원을 나와 중동 지방에서 오랜 기간 선교사로 활동해온 김동문 목사가 "오감 체험 성경 읽기"라는 제목의 강의를 열었다.

김동문 목사는 가방 하나 가득 성경에 등장하는 만나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깟씨, 사방 천지에 널렸다는 겨자씨, 과부가 헌금했다는 2000년 전 렙돈, 예수님 발에 부었다는 향유, 세상의 등불이 되라할 때 등장하는 등,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를 때 썼다는 새총 등을 챙겨 강단에 섰다.

그냥 읽는 성경과 오감을 동원한 성경 읽는 법이 어떻게 다른지, 과부의 두 렙돈에는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었는지, 겨자씨가 왜 껌 딱지에 비교되는지 두 시간 가까이 대화와 강의를 번갈아 가며 교인들에게 새로운 성경 읽기를 보여준 당시의 풍경을 담았다.

아래는 강의 요약문이다.

성경에는 먹는 게 등장한다.  근처 식당을 떠올려보라. 가게를 생각하면 고유한 냄새가 있지 않나. 비행기 타고 미국 올 때 비행기 조종사는 누구인지 스튜어디스는 누구인지 좌석은 몇 개인지도 모르면서 비행기를 탄다. 비행기에 관한 정보를 모르고도 비행기를 탈 수 있다. 비행기는 타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는 것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가장 친한 사람 이름을 떠올리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 사람에 관해서 분석할 필요는 없다. 친한 친구의 집안 내력을 몰라도 친해질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느낌이다.

성경에는 색감이 있다. 성경 속에는 음식, 사는 이야기가 있다. 드라마는 보면서 흥분하지만 성경 앞에서는 경건하려고만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색깔과 냄새와 촉감을 느끼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LA 사는 사람에게는 LA의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여기 안 사는 사람은 모르는 느낌이다. 올림픽 거리를 분석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길이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감각으로 읽어야하는데 머리로만 읽으려고 한다. 누가 식당을 추천해주면 그 식당의 음식 맛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물어본다. 납득이 될 때까지 캐묻는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지식적으로는 되어있지만 내 몸에 붙어있지 않다. 모르는 이야기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 빨간 것이 렌틸, 까만 것이 겨자 씨로 번역된 유채꽃 씨앗, 둥근 것이 만나와 같은 모양이라는 깟씨. ⓒ미주뉴스앤조이  
 
만나라는 음식을 알고 있나. 만나에 대한 묘사는 성경에 다 나와 있다. '햇볕을 쬐면 스러졌더라', '말랐다'는 것을 보면 액체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침과 저녁 이슬이 맺힐 때에 만나도 맺혔더라고 했다. 만나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다 나와 있다. 만나는 반투명, 햇볕에 쬐면 마르는 존재이고 깟씨 모양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깟씨가 무엇인지 알면 만나 모양을 알 수 있다. 만나를 빵이라고도 생각하는데 깟씨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새까만 것은 겨자 씨. 유채꽃이 겨자씨라고 번역됐다. 이스라엘의 봄이 오면 노란 유채꽃이 깔리는데 여름에 꽃 떨어지면 씨가 맺힌다. 지천에 겨자씨가 돌아다닌다. 겨자씨가 작다고 하면 그것은 크기인가 가치인가. 너무 흔해빠진 것이라 작고 보잘 것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널린 겨자씨도 심으면 자라는데 너희에게는 믿음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요즘은 덜하지만 예전 한국의 번화가를 걷다보면 아스팔트 위에 껌 딱지가 참 많았다. 한국이었다면 예수님이 "너희들의 믿음이 이 껌 조각만큼만 돼도 세상이 변하겠다"하셨을 것이다.

   
 
  ▲ 겨자씨로 번역된 유채꽃의 일종. 중동 지방에서 김동문 목사가 찍어온 것을 참석자들과 나누고 있다. ⓒ미주뉴스앤조이  
 
냄새의 예를 들어보자. 옥합을 깨서 발라드렸다는 것이 바로 나드. 나드는 식물에서 추출한 남성용 향수였다. 예수님께 부어드린 양은 250cc이다. 이 분량의 나드를 26평방미터(8평)짜리 방에서 부은 것이다. 그 냄새가 어땠을지 이제 여러분들은 아실 것이다. 맡아볼 수 있다면 더 정확할 것이다. (현장에서는 나드 향을 직접 뿌려 참석 교인들이 체험을 했다-기자 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면서도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데 굳이 사람을 통해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에서 말씀을 선포하셨다. 굳이 육신을 입고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가 말씀을 만져보게 하고 냄새를 맡게 하고 느껴보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성신됐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도록 말씀을 집어넣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 다윗이 골리앗을 거꾸러뜨릴 때 썼다는 물맷돌을 참석자가 만져보고 있다. ⓒ미주뉴스앤조이  
 
우리는 성경을 느끼는 것에 관심이 없다. 성경을 암송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식당의 메뉴가 무엇이다를 외운다고 내 배가 채워지지 않는다. 음식은 먹어보게 되어있고, 차는 타는 것이고 옷은 입어보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감각한다고 정의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알만한 것을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다 주셨다. 냄새를 맡게 하시고 소리를 듣게 하시고 온몸으로 느끼게 하시는데 말씀이 왜 우리에게는 느껴지지 않을까. 암기 위주의 교육이 건강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고 체험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도록 하셨는데, 우리가 성경을 깨닫는다는 것은 지식을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감각을 통해서 당신을 계시하셨던 분에게서 LA의 햇살을 통해서 음식의 냄새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고대 사람이 사용하던 가장 일상적인 이 등잔, 이것이 좋은 도구가 됐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일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 전도하려고 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다. 그것은 전달하는 먼저 믿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애 낳는 것은 애를 낳아봐야 느낌을 알 수 있다. 말씀도 눈으로 백 번 보는 것도 소중하지만 그 말씀을 체험하는 것은 더더욱 소중한 것이다. 과거 속에 행하는 것을 멈춰 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내게 주시는 것, 그 말씀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알라딘의 마술 램프를 생각한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지니가 자기 임무를 마치면 호리병속으로 들어가 사라진다.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대하나. 성경을 직접 펴기 전에는 성경이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나님은 내가 부르지 않아도 내게 필요한 말씀을 해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마술램프 호리병 다루듯이 다루는 경향이 있다. 필요할 때만 꺼내서 하나님을 부르려 한다.

성경은 우리가 가진 모든 감각으로 느끼고 깨닫게 해주셨다. 우리가 일상을 살고 있는 한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청각, 후각, 미각을 통해서 성경을 다시 보는 수고를 했으면 좋겠다. 내용은 떠오르는데 성경이 시각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냄새를 전혀 못 느끼면 궁금해 하자. 먹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냄새가 안 느껴지는 것이 안타깝지 않나?

예수님 시대 때 팔레스타인 땅은 신발도 귀했다. 아무나 신발 신지 못했다. 한국도 30-40년 전에 태화, 건표 고무신을 설빔으로 맞춰줬다. 2000년 전 맨발로 다니던 상황, 발가락 사이에 검은색 액체 고체 덩어리가 붙어있고 오징어 구울 때보다 진한 냄새가 나는 것이 일상생활이었다.

   
 
  ▲ 김동문 목사. ⓒ미주뉴스앤조이  
 
일주일만 맨발로 여름에 다녀보라. 그 지독한 냄새를 재거하기 위해서 손발을 닦아주고 올리브를 발라주고 부자는 옷도 맞춰줬던 것이다. 발 한 번 닦은 물을 버리지 않았다. 그 물이 고여져 있던 것이 요한복음 2장에 등장하는 물이다. 그 물이 얼마나 냄새나고 더러운 물이었겠나. 이것을 물통에 항아리에 담는다. 두 세통 들은 돌 항아리 여섯. 70갤런, 100갤런. 꽉 채우면 돌 항아리를 혼자서 못 든다.

돌 항아리를 들고 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외면하고 가야한다. 어느 순간 무엇이 자극되었을까? 그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 눈을 돌려보니 색깔이  포도주 빛으로 변했고 맛을 보니 좋은 맛이다.

당시에 포도주는 로마 귀족들의 문화. 그 잔칫집에서 나온 포도주가 포도주 병으로 천 병이 넘는 양이었다. 식민 지배 받던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것이 잔치집의 이야기다. 냄새, 맛, 향이 존재하는 잔칫집 이야기를 우리는 그냥 책 읽듯 읽어버린 것이다. 역겨운 냄새가 감당할 수 없는 향긋함으로 변하하는 일들도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오늘 강연 이후 발 고린내를 맡는 순간 요한복음 2장이 떠오르실 것이다.

과부가 두 렙돈, 자기가 가진 전부를 드렸다. 그 렙돈은 로마 황제의 얼굴과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유일한 돈이었다. 이스라엘에 헬라 제국으로부터 잠시 독립했던 마카비 왕조 때.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길 갈망했던 사람들에게는 렙돈이 독립의 상징이었다. 로마는 이것이 불편했다.

1데나리온이 하루 로마 병정 월급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당시 로마 황제도 신으로 추앙되던 때였다. 그래서 로마 정부는 렙돈을 데나리온의 300분의 1가격으로 만들어버렸다. 로마 입장에서는 황제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

렙돈으로는 빵 한 쪽도 살 수 없었다. 처절한 이야기가 성경에 담겨있던 것이다. 그 여인 생활비 전부였지만 그걸 드렸다는 이야기이다. 렙돈은 성전에서 환영하지 않는 돈 이었다. 십일조하면서 그 금액을 죄다 동전으로 가져다가 헌금해봐라. 회계 집사님이 무척 기뻐하시겠다.(웃음) 꽉 채워 와도 용도가 없는 것이 렙돈이었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을 향한 여인의 열망을 담아준 것이 바로 과부와 두 렙돈의 이야기다.

하나님께서는 일상에서 그들의 말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풀어주셨다. 일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자리고 시각, 청각, 미각 동을 동원해서 지각을 통해서 우리가 말씀을 입체적으로 느끼게 된다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볼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은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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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1-07-17 23:10:03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잘못된 명칭 때문에 글 남깁니다.

11째 줄과 아래에서 2번째 사진의 설명글에 '새총', '물맷돌'이라고 쓰셨는

데 바른 명칭은 '무릿매'인 것 같습니다.

[NAVER 국어사전]에 나온 '무릿매'의 뜻은 이렇습니다.
무릿매 1. 작은 돌을 끈에 맨 후 끈의 양 끝을 잡고 휘두르다가 한쪽 끝을

놓아 돌을 멀리 던지는 팔매

'새총'은 Y자 나무와 고무줄이 합쳐진 거라서 옛날 유대인의 무기와 다르고

, 국어사전에서 '물맷돌'을 찾아보니 물매(3)과 같은 말인데 물매(3)은 '곡

식에 물을 섞어서 갈 때의 그 맷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개역개정판, 개역한글판, 쉬운성경, 현대인의성경에는 '물매'라고 번역했지

만 사전을 찾아보니 뜻이 안맞았습니다.

표준새번역만 '무릿매'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엔 '돌팔매 끈'이라고 번역

했네요.
저는 다른 번역들도 '무릿매'나 '돌팔매 끈'으로 번역했으면 좋겠고, 성도들도 바른 명칭을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독자 2011-07-17 23:04:27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잘못된 명칭 때문에 글 남깁니다.

11째 줄과 아래에서 2번째 사진의 설명글에 '새총', '물맷돌'이라고 쓰셨는데 바른 명칭은 '무릿매'인 것 같습니다.

[NAVER 국어사전]에서 찾아봤습니다.
무릿매 1. 작은 돌을 끈에 맨 후 끈의 양 끝을 잡고 휘두르다가 한쪽 끝을 놓아 돌을 멀리 던지는 팔매

'새총'은 Y자 나무와 고무줄이 합쳐진 거라서 옛날 유대인의 무기와 다르고, 국어사전에서 '물맷돌'을 찾아보니 물매(3)과 같은 말인데 물매(3)은 '곡식에 물을 섞어서 갈 때의 그 맷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개역개정판, 개역한글판, 쉬운성경, 현대인의성경에는 '물매'라고 번역했지만 사전을 찾아보니 뜻이 안맞았습니다.

표준새번역만 '무릿매'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엔 '돌팔매 끈'이라고 번역했네요. 저는 다른 번역들도 '무릿매'나 '돌팔매 끈'으로 번역했으면 좋겠고, 성도들도 바른 명칭을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