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분노'는 서로 어긋나는 것일까
'사랑'과 '분노'는 서로 어긋나는 것일까
  • 한종호
  • 승인 2011.07.25 19: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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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반 에셀, 한 사람의 목소리가 세상을 격동한다

스테판 에셀의 작은 책 <분노하라> 열풍이 한국에서도 몰려오고 있습니다. 나이 90이 넘은 레지스탕스 노전사의 육성이 이 땅에서도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아주 작은 팸플릿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전 세계가 겪고 있는 현실과 마주 보게 하고 있습니다.

스테판 에셀은 독일 태생으로 프랑스인이 되었고, 프랑스인으로 그치지 않고 인류의 한목소리가 되어 지금 세계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전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위해 싸워 왔던 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역사의 희망을 부르짖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배 세대가 후배 세대에게 역사를 망각하지 말고, 맞서야 할 것에 맞서라는 촉구입니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들을 부디 되살려 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아라. 분노하라고!'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를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이 땅에는 무수한 교회가 있지만, 스테판 에셀 한 사람의 목소리보다 세상을 격동시키고 있지 못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 답은 분명합니다. 역사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본과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교회의 목소리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나사렛 예수께서 언제 그렇게 하라고 하셨나요? 버려진 자, 짓밟힌 자, 쓰러진 자와 함께하라고 하셨건만 오늘날 교회는 도리어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와, 성전에 들어가셔서 특권의 시스템을 뒤엎어 버린 예수님이 겹칩니다. 성전을 특권의 성채로 만들고 그 안에서 돈에 대한 욕망을 거래하고 드리어 가난한 이들을 내쫓아 버리는 현실에 대해 예수께서는 분노하셨습니다. 그 분노는 그래서 '거룩한 분노'라고 불립니다. 이 세상에서 작은 자들이 억압받고 있는 것에 대해 분노하신 것입니다.

그 분노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한 손으로는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들을 공격하고 짓밟는 자들과 싸우는 모습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능멸당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억울한 일을 겪고 있어도 아무런 분노가 없다면 그것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짓밟히거나, 자신이 사랑하는 누이가 누군가에게 능욕당하거나 자신이 사랑하는 아버지와 형제가 누군가에게 모멸의 대상이 되었을 때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분노할 겁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것과의 싸움을 만들어 갑니다.

그 싸움이 없으면 인간의 존엄성을 허무는 사태는 중단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분노는 하나이며, 그래서 그 분노는 이 사랑을 지켜 내는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짓밟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이웃을 짓밟는 자와 마주하는 일입니다. 용기가 필요하고 지혜가 요구되며 연대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신 것은 그들로 말미암아 정작 성전 공동체에 들어와야 할 이들이 들어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집, 기도하는 집, 만민의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탄식하고 분노하셨습니다. 이 분노가 터져 나오지 못하면 기존 질서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성전은 절대적 권위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분노하신 나머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특권을 누리고 있던 자들의 입장에서는 악담 중의 악담인 셈입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분노를 자제하지 못한 극단주의자의 저주로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분노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특권 질서의 죄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들먹이는 자들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분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도리어 인간이 그 하나님에게 분노할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가 큰가를 몸소 보이셨습니다.

그 분노의 대상은 모든 인간이 아니라 성전을 자신의 소유물로 삼고 사회적 약자들을 유린하는 자들입니다. 분노의 대상은 명확했습니다. 그 목적과 메시지도 분명했습니다. 그 분노가 드러나지 않으면 특권 질서는 평화를 즐길 것입니다. 예수의 분노는 그래서 이들에게는 평화를 깨는 폭력으로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이로써 예수님을 모함해서 죽이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특권 질서의 평화는 깨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특권의 부당한 질서로 수많은 이들이 짓밟히고 희생당합니다. 예수께서 분노하신 까닭에 사람들은 용기를 낼 수가 있었습니다.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절대적 성역이 이로써 그 거짓 환상을 그대로 지켜 내기 어렵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짜를 보고 가짜라고 해야 세상은 눈을 뜹니다.

성전의 특권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한, 그 특권을 타고 앉아서 재력과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악은 저지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터뜨리신 분노는 그래서 이들의 허위와 권세를 부수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 분노는 이들을 원수로 삼아 폭력으로 이들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눈을 새로 뜨게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그 악과 손을 잡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었습니다.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자식을 보고 부모가 분노하지 않으면 그 자식은 망합니다. 부모의 분노를 알아차린 자식은 그 악을 함부로 저지르지 못하고 그 악과 자신을 멀리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분노는 그런 차원에서 선을 도모하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깃발이기도 합니다. 그 분노의 깃발이 없는 곳에서 악은 창궐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내신 분노는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옳지 않은 길, 악의 길을 가지 않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이자 우리를 구하시려는 사랑의 손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노는 누구도 상케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분노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희생당하셨습니다. 비폭력의 분노는 그러나 마침내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남겨 주신 씨앗이 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기득권화한 대부분의 교회는 사회적 부정의에 분노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 것으로 분노하면 정치적이라느니, 복음적이 아니라느니 합니다. 또는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누군가는 맞아 죽고, 누군가는 실직당해 죽고 누군가는 자살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말라는 것인가요? 그렇게 해서 어떻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이리 추해지자 세상이 교회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개독교'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까? 교회에 대한 세상의 적의가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예수의 뒤를 따르려 하기만 하면 세상은 그 교회를 향해 갈채를 보내고, 함께하려는 이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스테판 에셀의 책이 이렇게 주목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주장이 허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책에는 레지스탕스가 바라던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레지스탕스가 바라던 사회보장제도가 바로 이 시기에 구축되었다. 레지스탕스의 개혁안이 명시한 바는 '모든 시민에게, 그들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살 길을 확보할 수 없는 어떤 경우에도 생존 방도를 보장해 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구축, 늙고 병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삶을 마칠 수 있게 해주는 퇴직 연금제도'였다.

각종 에너지원, 전기와 가스, 탄전(炭田), 거대 은행들이 국영화되었다. 이 역시 레지스탕스의 개혁안이 권장한 바였다. 또한 이 개혁안은 '공동 노동의 결실인 대표적인 생산수단 - 에너지원, 지하자원, 보험회사, 거대 은행들 - 을 국가로 복귀시키는 것', '경제계, 금융계의 대재벌들이 경제 전체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의 정립' 같은 것들을 권고했다.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며, 노동계가 창출한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일을 금권보다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레지스탕스의 개혁안과 독립 언론들이 오늘날 위협받고 있습니다. 자본이 현실을 지배하고 주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선전에 놀아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휩쓴 상황에서 레지스탕스의 투쟁으로 일궈 낸 역사적 성과들이 해체되어 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프랑스 공화국이 이 레지스탕스의 유산을 계승하다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전 세계가, 그리고 우리가 역시 지난 시기의 민주주의의 유산이 해체되고 자본이 모든 것을 거머쥐고 뒤흔드는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분노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 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 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무관심의 벽을 깨고, 분노로 저항하지 않으면 권력은 이를 자신이 정당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근거로 작용할 것입니다. 분노하면 탄압하겠지만 탄압하는 권력은 마침내 무너지고 맙니다. 정당하지 못한 권력과 자본의 힘은 정당성을 요구하는 대중 앞에서 점차 무력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군에서 폭력으로 숨지는 젊은이들이 1년에 최소 100 명을 넘고 있습니다. 군은 이를 은폐하기 바쁩니다. 대통령은 구타가 문제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란 젊은이들이 정신적으로 적응하지 못해 생긴 사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진중공업 부당 해고 사태에 저항하는 김진숙 씨와 연대하는 희망버스 시민들이 1만 명 이상 부산에 모였는데 기존 언론들은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들의 폭력과 최루액 직격 발사는 당연히 문제가 되어야 하는데 정부는 아무런 사과도, 성찰도 없습니다. 경찰의 군홧발로 시민을 밟으면 모든 것은 조용해질 것이라고 믿는 모양입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등록금 반값 정책은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약속한 공약입니다. 그러나 이걸 지키라고 요구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은 경찰에게 공격당하고 국정원의 수사 대상까지 되고 있는 판국입니다. 이걸 보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런 것을 보고 가만히 있는 국민들을 권력자들은 어찌 대하게 될까요? 국제사회는 뭐라고 여기게 될까요?

장애인 복지시설은 어느새 지역 주민들에게 혐오 시설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시설들은 모두 산속이나 사회적 편의시설이 없는 한갓진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시설 내의 형편은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 이하의 대접과 함께 복지 재정 지원은 시설 운영자의 배만 부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무슨 쓰레기 버리듯 한 겁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화날 일이 많고 짜증 날 일이 많은 데 무슨 또 분노인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개인의 사사로운 일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만 사회적 정의가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잘 분노하지 않습니다. 모두 이기적이 되었거나 권력이 두렵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귀찮거나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거세된 사회에서 자신이 똑같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아무도 분노하고 나서 주지 않으면 자신이 바로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혹 알고 계신가요?

백 마리 양 가운데, 양 한 마리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 나머지 99마리가 침묵하거나 귀찮아한다면, 그다음 순서는 누가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스테판 에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누구라도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 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우리는 이 분노의 힘이 평화의 봉기로 발전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주체 세력이 되어 갈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기르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원하는가? 분노하라. 정의를 바라는가? 분노하라. 더는 짓밟히지 않기를 바라는가? 분노하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들이 존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을 희망하는가? 분노하라.

이 분노만이 기득권의 수렁에 빠진 교회를 구할 것이며, 특권 질서를 옹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온갖 범죄와 불법을 저지르는 현실을 뒤엎을 것이며 그로써 진정 서로 사랑하며 정의와 평화를 누리며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분노에 대한 특권 질서가 저지른 핍박의 결과물입니다. 부활은 이 핍박의 힘을 이기고 마침내 역사의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것이 누구인지 확인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한종호 / <기독교사상> 편집주간

*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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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라면 2011-07-26 14:08:52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그런식으로 분노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다라고는 동의 할 수 없겠네요... 사랑이라기 보다는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거룩한 분노?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시대의 아픔과 복음의 빛이 가리워지는 때에 세상세력에 아첨하고 곡필을 놀리는 일부 성직자들은 꼭 귀담아 들으셔야겠군요... 이러한 글이 그들의 귀에 들릴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