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여, 참나라를 건국하자
교회여, 참나라를 건국하자
  • 이영재
  • 승인 2012.03.23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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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불평등, 빈익빈 부익부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무분별한 공권력 투입으로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사진은 세상을 떠난 조합원 영정 앞에서 오열하는 쌍용차 노동조합 김정우 지부장. (사진 제공 박보름)

 
 
MB정권이 보수주의를 표방하며 나라의 살림을 맡은 이래, 우리나라에는 공권력으로 인한 수많은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쌍용자동차노조 강제진압, 용산주민 참사사태, 한미 FTA 날치기 통과, 촛불시위 강제해산, 국회예산안 날치기 통과, 4대강 강제 추진, 강정마을 해군기지 강행,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건들이 모두 국가의 공권력을 부당하게 사용한 폭력 사태로 분류할 수 있다.

근대국가는 봉건 왕국 시대의 절대군주가 맘대로 휘두르던 폭력을 빼앗아 국민 모두의 안위를 위한 폭력으로 되돌려 주었다는 데 큰 진보를 이루었다. 공권력은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원리에 의거하여 정부가 사용하되 국민을 위해서 공평하게 사용해야 한다. 개인의 폭력은 모두 국가의 공권력에 귀속된다. 그런데 집권자가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아서 경찰력과 군대력과 같은 공권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휘두르면 그것은 독재자 내지는 반민주주의적 권력자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집권자는 국민의 저항에 부닥쳐서 권좌에서 추방되어 처형되어 온 것이 근대 민주주의의 역사이다.

국가의 권력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나라는 좋은 나라이며, 반대로 국가의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나라는 나쁜 나라이다. 이 나쁜 나라를 성경은 '세상 나라'의 범주에 넣고, 반대로 좋은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의 범주에 넣는다. 정의, 평화, 자유, 평등, 박애, 자선, 사랑, 복지와 같은 국가의 일들은 분명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속한다. 이와는 반대로 불의, 전쟁, 억압, 불평등, 미움, 승자독식, 경쟁,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악덕들은 모두 세상 나라의 범주에 속한다. 성경에 따르면 한 나라에 이 두 가지 요소가 병존한다.

나라 밖의 국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협력하고 도우며 평화를 정착시키는 국제 관계는 분명 성령님의 선한 사역이겠지만, 영토 분쟁, 인종차별, 인권유린, 외국인 노동자 착취, 종교 분쟁과 같은 요소들은 세상 나라의 악행으로 간주된다. 교회는 이 두 가지를 명백히 구분하는 훈련을 성경의 거룩한 독서에서 수행하고 갈고 닦아야 한다.

세상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반대된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로 완전히 변하게 될 것이다(계 11:15). 성경의 쟁점은 세상 나라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세상 나라의 대안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제시해 주셨다. '세상 나라'의 원어는 '헤 바실레이아 투 코스무'이다. '코스무'는 '코스모스'란 단어의 소유격이다. '코스모스'를 '세상'이라고 번역하여 '세상 나라'라고 한 것이다. 세상(코스모스)이 다스리는 나라가 세상 나라이다. 그 반대말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바실레이아 투 테우'이다. '테우'는 하나님을 뜻하는 '테오스'의 소유격이다. 그렇다면 '세상'이라고 번역한 이 '코스모스'란 단어는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가.

헬레니즘 시대에 문명을 이끌고 가는 선두주자는 도시 문명이었다. 도시들이 곳곳에 건설되어서 상공업과 무역을 주도하고 이와 더불어 학문과 종교가 발달하였다. 도시를 그리스어로 '폴리스'라고 불렀는데 이 폴리스에서 정치학과 철학과 수학이 발달하였다. 폴리스는 단순히 하나의 도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류 문명사에서 등장한 도시국가의 체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폴리스를 '도시국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플라톤 이후의 철학자들이 대를 이어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폴리스 안에서 공부하였다. 정치학을 영어로 '폴리틱스'라고 하는 까닭도 그것이 도시국가를 경영하는 철학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코스모스'는 도시국가에서 발달한 철학과 종교와 질서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자연 상태를 파괴하고 부정하며, 자기 주거지 주위에 성벽을 쌓아서 한정된 좁은 구역 안에 보안 체제를 구축하며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이 공간이 바로 도시였다. 그것이 곧 국가가 되었다. '코스모스의 나라'라고 표현하면 성곽을 쌓아서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성곽 주변의 영토를 지배하는 세상을 가리킨다. 이것을 우리말 성경은 '세상 나라'라고 번역한 것이다.

요한복음에 이 세상의 관념이 매우 또렷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구원주 메시야로 보내셨다. 그러나 '세상(코스모스)'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배척하고 죽였다(요 1:10). 어둠에 쌓여 있는 이 세상에 예수께서 빛으로 오셨다. 세상은 이 빛을 알지 못하였다(요 1:5).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만 세상은 이 빛을 거부하고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요 3:16). 예수님은 온 삶과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마침내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사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초대교회는 자기들이 살고 있는 도시국가<코스모스>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세상'은 애초부터 도시의 이익을 도모하여 펼치는 권력의 체제인 것이다. 이 '세상'이 곧 국가이며 국가의 권력 중심은 도시에 있기 마련이다.

문명이란 말은 영어로 civilization이다. civil이라 함은 라틴어 civitas와 동종어로서 그리스어로는 '폴리스'에 해당하는 말이다. 따라서 서양어에서 '문명'이란 용어는 도시화 내지는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쉽게 이해된다. 우리말로 '문명'은 한자로 文明인데 여기에는 어떠한 도시에 대한 암시도 없다. 그러나 이 번역어가 나오기 이전에 동양사에서는 '도성'이란 말이 그런 뜻으로 쓰였다.

구약성경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를 위시하여 여리고 도성과 아이 도성을 무너뜨리시는 야훼 하나님의 사역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가나안에 있는 도성들을 다 무너뜨려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 이것이 언약신학의 핵심이 되는 쟁점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지금 매우 척박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가나안의 도성민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도성의 이익을 도모하여 자연을 마구 훼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망가진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다시 건강하게 일구어내야 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는 소명을 받았으나 그 땅을 사유화하고 독점하라고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곡해하는 것이다. 땅의 사유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창조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 도시들의 손아귀에 땅이 모조리 점령되어 울퉁불퉁 망가져 있기 때문에(창 9:11), 자연을 파괴하는 도성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도성들의 점령권에서 땅을 해방시켜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살면서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을 준수하여 땅의 생명을 신장하고 북돋우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언약의 내용이다. 성경의 언약은 나쁜 국가 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대안 사회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거기에는 왕과 같은 지배 권력이 없으며 오로지 보편주이시자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다스리시는 사회체제이다. 땅의 회복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받은 사명이다.

도시국가들이 발달함에 따라, 땅은 엄청난 폭력을 휘두르는 세상 '코스모스'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도리어 가나안 도성민에게 흡수되어 물질주의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다. 이스라엘이 세상에 또 하나의 세상 같은 통일국가를 건설하고 세상의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문명의 세속주의에 빠지고 만 것이다. 사무엘상서 8장은 국가를 세움으로써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말았다는 국가 멸망의 원인론을 말씀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세상이 도시들과 구별된 대안의 사회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역시 세속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도시국가를 지배자하던 왕들과 귀족들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북왕국과 유다 남왕국은 멸망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세상 나라는 노예 제도 위에 경제의 기초를 놓고 있었다. 노예를 취득하고 매매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노예를 가축으로 규정하여 인권을 박탈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헬레니스트 철학자들도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고 보았다. 노예는 그 사회의 생산력을 담당한 노동의 주체였다. 세상 나라는 일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하천민으로 억합하고 여가를 즐기는 엘리트 계층이 상층을 차지한 불의한 사회체제였다. 세상 나라에서는 힘겨운 노동과 저임금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양산되었다. 전쟁을 통하여 노예들을 획득하여 노동력을 보충하였기 때문에 철마다 전쟁을 수행하곤 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도시국가의 엘리트들은 날마다 싸우는 연습에 열심을 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도 성경이 말하는 세상 나라의 범주에 든다. 한 민족이라고 내세우지만 돈을 버는 문제에서는 한 민족도 아니다. 돈 때문에 갈라지고 거짓말하며 동족끼리 싸운다. 상류사회가 형성되고 이들이 재산과 권력을 대물림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미 FTA는 이들 상류사회에 큰 번영을 보장해 준다고 기대한다. 반대로 별 재산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 한미 FTA는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대한민국 건국 60년을 넘기면서 우리 사회는 지금 고대의 세상 나라처럼 전락하느냐, 아니면 사랑과 나눔과 평등과 자유가 숨 쉬는 하나님나라로 발전해 나가느냐 기로에 서 있다. 세상 나라 안에 있으면 노동자와 농민과 서민이 권력을 잡아 보았자 또 계층 분화의 현상이 이어져서 권력을 잡은 민중도 타락하고 말 것이 뻔하다. FTA 반대하는 사람들이 상류층 사람으로 출세하면 그는 FTA를 적극 찬성하는 사람으로 돌변하게 될 것이다. 지역 상권의 상인이 돈을 벌어서 재벌 수준의 상인이 되면 대형 마트를 설치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세상 나라를 벗어나야만 이러한 악순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가르친다. 세상 나라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곧 기독교의 구원이며, '영혼 구원'이란 용어의 실질적 내용이다.

대한민국이 살 길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민중주의에도 찾을 수 없다. 또 미국과 일본과 함께 태평양 방위권을 공고히 하는 데 살 길이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우리 기독인들은 전혀 다른 딴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야말로 대안의 사회체제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오래전부터 제시해 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나라는 반국가 단체로 오해받을 만큼 세상 나라에 대해서 도전하는 힘을 내뿜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세상 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창조의 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는 세상을 이기고 '참나라'를 건설하려는 운동이다. 하나님나라에는 아무런 인간의 권력이나 군대나 경찰이 폭행하지 않는 상태이며, 수평적 소통과 끝없는 대화와 애정이 어린 연대 관계만 존재할 뿐이다.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주체 세력이어야 한다. 지금은 교회가 너무나 세상 나라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거기에 탐닉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세상 나라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교회들을 일깨우고 해방시키셔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이번 총선과 대선의 과제 앞에서 교회는 더욱 철저히 성경을 읽고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서 정말 좋은 일꾼들을 국회에 보내고 선한 목자 같은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앉혀야 할 것이다.

이영재 / 전주화평교회 목사· Ph.D., 구약학·전주성경학당

* 이 기사는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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