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세우는 십일조
공동체를 세우는 십일조
  • 김범수
  • 승인 2012.04.0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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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가 세운 헌금의 원리

십일조 논쟁과 느헤미야

십일조 헌금 논쟁이 뜨겁다. 어떤 이는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수입의 1할을 꼬박꼬박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 관행이 세계에서 드문 현상이란다. 십일조의 용도도 제사장과 성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제를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 반대편에서는 성경적 근거가 충분하다고 보며 오히려 철저한 십일조 헌금이 한국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옹호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성경적 근거는 있지만 대락적인 언급만 있을 뿐 세부적인 사항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동시에 먹을 것 입을 것 아껴서 하나님 나라위해 힘껏 드리는 정성은 다른 나라 교회들이야 어찌하든 비교할 필요 없이 우리 교회의 미덕으로 삼고 권장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나도 안다. 십일조 논쟁의 핵심이 헌금하는 돈이 아까와서가 아닌 것을. 십일조를 거두어 엉뚱한 데 사용하고 회계도 불투명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며 십일조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걸걸한 홀리 보이스로 깡패처럼 위선하며 돈을 밝히는 삯군 부흥사들이 십일조, 말라기, 축복 축복 노래를 불렀기에 나도 그게 얄밉다. 교회를 전면적으로 갱신하려면 그 삯군들이 밝히는 십일조부터 바로 잡아서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심경에 공감한다. 교회들의 실망스런 모습을 보면 여태 드린 헌금도 돌려받고 싶다는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십일조에 관한 내용이 정말 없는 것일까? 그 십일조는 목사 사례비가 아닌 구제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어야 했을까? 모세오경에 십일조가 기록되었다고 해서 신약을 사는 우리가 수입의 10% 라는 구체적인 기준까지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 이 논의는 이미 다른 분들이 다루셨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다. 대신 내가 십일조 드리는 이유로 삼는 ‘공동체를 세우는 십일조’ 정신을 이야기 하고 싶다. 느헤미야서에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느헤미야의 십일조

모세 오경에는 십일조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는 하는데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위한 사례비 성격의 헌금인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하는 모금인지가 불분명하다. 역사서에서는 십일조가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율법이 주어진 뒤 이스라엘이 지키지 않은 까닭이 크다. 이스라엘이 철저히 십일조를 드렸다면 요즘말로 하면 본봉의 십일조인지 보너스까지 더한 금액의 십 퍼센트인지, 혹은 세금 떼고 난 뒤의 총소득의 십일조인지 갖가지 시행세칙이 분명하게 나오고 그 논쟁과 사례들이 이스라엘 역사 구석구석에서 당연히 발견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십일조는커녕 하나님까지 저버리고 멸망을 맞게 된다.

십일조는 포로기 이후에 다시 등장한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에스라를 통해 율법을 듣는 장면은 감격적이다. (느헤미야 8장) 이때 이들은 율법을 읽고 당장 초막절을 지키기로 한다. 성경은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 이후 한 번도 초막절 절기를 지키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율법에 명백히 기록된 삼대 절기중의 하나인 초막절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이라면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를 하였든 혹은 레위인과 제사장과 성전을 보살폈든 자기 수입을 기꺼이 나누어주었을 리가 없다.

개심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겠다며 하나님께 서약을 하는 장면은 더욱 극적이며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연상시킨다. 이 단체 서약에서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으며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다짐에 이어 첫소산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약속이 이어진다. 이스라엘 성읍을 다시 세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참 이스라엘 백성이 모인 율법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결의가 충만했다. 그러려면 레위인과 제사장을 세우고 성전을 돌보도록 그들의 생계를 돌봐주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 때 다시 십일조를 선택한다.

공동체를 세우는 십일조

느헤미야는 율법을 따르되 문자 그대로 따를 수 없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때로부터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이 궤멸되면서 열 두 지파와 레위지파로 이루어진 지파중심의 체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잿더미에 시작하는 그들에게 성전의 제사기능과 율법 교육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 십일조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십일조는 율법의 정신에 따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우는데 초점이 맞춰진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현대 교회는 레위기의 십일조보다 느헤미야의 십일조를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교회가 시작하면서 세운 원칙 중의 하나도 등록교인의 경우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율법이라서 억지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니고, 복 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나와 후손들에게 지속적인 말씀이 선포되도록 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드린다. 충분하지는 않아도 십일조를 드려 목회자 사례로 드리고 교회 운영비를 감당하며 사역을 뒷받침한다. 대신 다른 명목의 헌금은 거의 하지 않아도 되었다. 첫소산과 십일조만 드려도 공동체를 세우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던 느헤미야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몸과 시간과 재정을 드리며 세워 나간다.

10%는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정도의 부담이다. 분명한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드리는 십일조는 더 이상 굴레나 짐이 아니게 된다. 십일조를 기꺼이 드리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동역하는 진성 교인들이 많은 한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든지 재건될 희망이 있다. 2500년 전 이스라엘을 재건했던 느헤미야 선배에게서 십일조를 배우는 이유도 이것이다.

김범수 목사 (시애틀 드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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