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적 용서의 한계, 트라우마
의식적 용서의 한계, 트라우마
  • 박대준
  • 승인 2013.01.21 18:2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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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준의 비욘드 스크린] ② [남영동1985] '용서는 누구 몫인가'

   
  ▲ 영화 <남영동1985> 포스터. ⓒ아우라픽처스  
 

트라우마(Trauma). 의학용어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고 하고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혹은 '영구적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의미한다. 신체적 손상을 입었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람에게 정신적 충격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보통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여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극도로 불안해 지는 경우가 많고, 심하게는 환각현상을 동반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릴 적 목을 졸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넥타이나 목도리를 매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비행기 사고를 겪은 이들은 다시 비행기 타는 것이나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 Freud)는 1896년 출간된 그의 초기작 <과학적 심리학 초고>에서 '엠마'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성(性)과 관계된 충격적 경험이 트라우마로 잠재되었다가 표출된다는 것을 보고했다. 의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겪은 충격은 기억에서 사라질 지라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 증상, 트라우마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심리적 트라우마는 내면에 억눌려 있는 깊은 상처이기 때문에 논리나 감정으로 조절하기 어렵고 지속적으로 재생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쉽게 치유되지도 않는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영동1985>를 보는 것은 '고문(拷問)'이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관객들은 1985년 남영동에 위치한 어두운 밀실에 갇히게 된다. 극장을 나가지 않는 한, 눈을 감고 귀를 막아 스크린을 외면하는 것 외에 밀려오는 고통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없다.

영화의 내용도 물론 '고문'이다. 고문 받는 민주화 운동가 김종태(박원상), 고문하는 기술자 '장의사' 이두한(이경영). 영화 속 김종태는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고문후유증으로 2011년 12월 30일 고인(古人)이 된 김근태 의원을, 이두한은 경기도 경찰청 공안분실장이었고 1980년대 고문기술자로 불리며 ‘장의사’라는 별명을 가졌던 이근안 경감을 그린다.

가족과 함께 목욕탕을 나서던 김종태는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 옷이 벗겨지고, 매를 맞고, 십자가처럼 생긴 칠성판에 눕혀져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생각'이 고문하는 이의 '생각'에 맞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고문을 가하는 이의 '생각'을 고문을 당하는 이는 '생각'해 내야하고, 그 '생각'에 맞춰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다시 써야 한다. 간단하지만 고문당하지 않으면 해내기 힘든 벅찬 과정이다. 고문을 하는 이도, 당하는 이도, 지켜보는 이도 고문이다.

러닝타임 106분 동안 이들에게 고문 당한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영화 속 인물과 마찬가지로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1895년 9월의 남영동,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했던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치료방법으로 정신과적 치료와 약물치료를 함께 받음과 동시에 주변에서 계속 관심과 인내를 가지고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남영동1985>를 통해 갖게 된 트라우마는 의학적 방법으로는 치료가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고문’의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김종태는 감옥에 있는 이두한을 면회하게 된다. 김근태 의원의 삶을 기록으로 정리하는 과정에 참여했던 소설가 방현석의 증언에 의하면, 이근안을 만나고 와서 김근태는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혹시 자기가 옹졸해서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오래 고민하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김근태는 이후 한 성직자와 이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용서는 하나님의 몫이지 당신의 몫이 아니다"는 성직자의 말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면회실을 나선 김종태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관객을 응시한다. 그리고 침묵으로 묻는다. "당신은 용서할 수 있는가?"

성경은 마태복음 18장 22절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끝없는 용서'를 뜻한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장 35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은혜를 주셨는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용서를 해 주셨는지, 그것을 기억할 때 생길 수 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용서할 수 있는가?"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꾀르(Paul Ricoeur)는 <Memory, Forgetfullness, and History>에서 "용서는 일종의 기억을 치유하는 것, 즉 비탄의 시기를 종결시키는 것이다. 용서는 기억에 미래를 제공한다"라고 했다. '
용서'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치유할 수 있고, 새로운 미래적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고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은 "용서"이다.

영화를 만든 정지영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고문 피해자의 아픔을 함께 나누자는 마음'에서 영화를 기획 제작했다고 한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감독은 실패했다. “용서는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의식적 용서는 인간의 의지로 가능하다. 기억에서 사라졌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트라우마'로 나타날 것이다. 기억할 수밖에 없다. 아파할 수밖에 없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 외면하고 싶겠지만, 되새기고 함께 아파해야 한다. 아픔에 동참하는 사람이 생길 때 감독은 비로소 성공하게 된다.

비록 파면되었지만, 이근안은 성직자가 되었다. 그도 "용서는 하나님의 몫"이라고 했을까?

박대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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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sprung 2013-01-25 02:33:06
ㅋㅋㅋㅋㅋㅋ 용서가 증오의 다른 표현입니다. "나는 너를 용서하고 하나님께서도 너를 용서한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너는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게 될 것이다!"

Philip Im 2013-01-23 09:30:26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있으나 용서는 사람에게 있다.

근본적으로 용서도 하나님께 있으나 용서하라 명령하신대로 사람은 용서해야 한다.

사람에게 복수하라고 명하시지는 않으셨다.

문제는 사람이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이 가능한가인데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서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기자가 지적한 것처럼 트라우마가 남아 있지만 내가 진정으로 용서한 것과는 별개다.

참된 용서의 의미를 모르면 트라우마가 남아 있으므로 용서하지 못했다고 추론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 손의 못자국을 지니고 계시지만 용서하셨다.

이 땅 위에서 온전한 심리적 치료는 어렵겠지만 온전한 용서는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