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와 '신앙'의 경계선은 어디일까?
'이데올로기'와 '신앙'의 경계선은 어디일까?
  • 천진석
  • 승인 2009.05.20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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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죽음의 '이데올로기 신앙' 버리고, 생명의 '관계 신앙' 회복해야

복음서에 한 여인이 예수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붓는 일화가 나옵니다. 먼저 이 본문의 맥락을 살펴봅시다.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모의하는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향유를 붓는 일화가 나오고 이후에 가룟 유다가 그들에게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향유 붓는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사건입니다. 예수를 팔았던 가룟 유다가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에 대해 메시아로서의 기대감 대신 실망감과 분노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가룟 유다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크게 실망하게 되었을까요.

▲ 예수의 발을 씻는 막달라 마리아. (출처 : Pitts theology libary)
가룟 유다가 분노한 이유

예수님이 거한 집은 문둥병자 시몬의 집입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문둥병자의 집에 거하는 것도 파격적인 일이지만,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종교적·사회적·의학적으로 버림받은 한 문둥병자와 함께하시는 예수님. 이 사건 하나만이라도 그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기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걸맞지 않은 일이 벌어집니다. 1년 치 노동자 품삯에 해당하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머리 위에 부어버린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당황한 일입니다. 더구나 그토록 가난하고 소외된 문둥병자의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차라리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지극히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들은 이 여인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소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녀를 괴롭히지 말라. 그녀가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삶에 대하여 강조하십니다. 제자들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행위를 칭찬하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위가 기억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예수님은 지금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거하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그와 함께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토대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보다 교회 헌금하는 것이 먼저다'라는 이분법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돌보야 된다는 신념으로 모든 신앙의 행위를 판단하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이 여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 여인의 삶과 신앙의 실존으로부터 그 의미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진리의 한 부분 절대화하는 것 이데올로기 신앙의 표본

여기서 이데올로기와 신앙의 경계선이 명백해집니다. 이데올로기는 신앙의 진리의 한 부분을 절대화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정신 구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 신앙을 절대화하고 있는 사람은 몸이 아파도 십일조를 안 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실직을 해도 십일조를 안 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부부 관계가 안 좋아져도 십일조를 안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의 신앙 행위에서 비롯되는 가치로 판단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반면에 신앙은 이런 절대화된 사고와 판단 체계가 '우상'임을 밝혀주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형성한 가운데 각 사람을 살리는 진정한 길을 찾아가게 하는 마음가짐이요 삶입니다.

▲ 신앙이 이데올로기로 변질되면, 자신이 믿는 것을 절대화하고,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행위를 정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보통 막달라 마리아라고 말합니다. 일곱 귀신들렸었고,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여인이라고도 전해집니다. 자신을 치유해주었고, 억눌림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신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행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여인에게는 아마도 자신이 결혼을 위해 준비해놓은 그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드리는 것이 최선의 사랑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행동에 옮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행위에서 그 여인의 순수한 헌신과 사랑을 보셨고, 이를 아름답다고 평가하셨습니다.

물론 이 여인의 행위를 은혜에 대한 보답의 일반화된 표준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헌신하는 방식이나 내용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표준화된 하나의 가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 개인이 처한 실존과 헌신의 방식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신앙이 이데올로기로 변질되면, 사람을 살리기보다 죽이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절대화하면,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행위를 정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정한 행위를 하는 사람과의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도, 이미 표준화된 자신의 가치 기준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행하는 짓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던 것입니다.

이데올로기 아닌 '관계의 신앙' 회복 절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각자의 인격과 삶의 정황을 통찰하시고 거기에 적합한 진리의 말씀을 주셨는데, 그 방향은 늘 사람에게 참된 생명을 주고자 하는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도, 세리 삭개오의 집에 가자고 하셨을 때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도 예수님은 한 가지 방식으로 절대화된 이데올로기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들이 변화되어 참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관계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이웃과 깊은 이해와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쉽게 배운 교리적인 지식으로 쉽게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율법주의적인 고정관념과 고정 가치에 입각해 살아가며 생명보다는 죽음을 몰고 오는 신앙 행위가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관계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한 사람의 영혼과 삶이 지닌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채워져야 할 영적인 갈급함을 해소시켜 주는 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천진석 / LA 살림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세계관네트워크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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