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방법론 아닌 본질 고민하기'
이학권 목사, '방법론 아닌 본질 고민하기'
  • 이학권
  • 승인 2013.09.1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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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본질 회복 시리즈, 교회와 예배당

이 글은 하나임교회 이학권 목사가 진행한 '본질 회복 세미나'의 강의안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이학권 목사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 이학권 목사. (<미주뉴스앤조이> 자료사진)  
 
세미나 이름을 본질회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행하는 것들에 형식이 아니라 본질을 담자는 의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는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질문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지요. 많은 일들을 하는데 '왜' 하는지 질문을 하고, 그 가치에 확신이 있을 때 하라는 것이지요. 아테네 원로원은 그것을 청년들을 타락 시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질문은 진리를 찾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위험한 것이니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본질회복 세미나는 무엇이 옳으냐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 것이 옳으냐'가 아니라, '그 안에 어떤 본질이 담겨야 하느냐'를 찾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10가지 주제를 살펴보겠는데, 그 이전에 우리의 비전이자, 뿌리이자, 목표된 1세기의 '사도공동체'(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들)의 모습을 먼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1세기 사도공동체는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에 없어졌습니다. '에비오님'이라 불리는 율법주의자들이 5세기까지 시리아에서 명맥을 유지했지만 교회라 부를 수 있는 모임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사도공동체의 명맥을 유지한 것을 마게도니아의 교회들이였으며, 그 모습은 신약성경을 통해 나타납니다.

사도공동체의 분명한 특징 몇 가지를 정리해보면, 소수의 사람들이 가정집에서 모였으며, 그 모임에는 인도자 없이 함께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방언·예언도 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나누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설교에 가깝지만 결코 오늘 같은 설교는 아닙니다.

이 모임의 특징에는 종교성이 있지만 결코 종교 행위로 한 것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주 순수하고 진실한 나눔과 교제(코이노니아)였습니다. 그 당시 타락하고 문란한 문화에 질려버린 세대에, '복음'과 '교제'는 신성하고 순수한 맑은 물줄기였습니다 나눔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식사를 같이 하였으며, 식사를 나눌 때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사역의 필요를 따라 사도, 장로, 복음 전하는 자, 집사, 선지자, 목사와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획일화된 제도는 아니었습니다. 지역의 특성에 따라 사도, 장로, 집사가 있는 곳(예루살렘교회)도 있었고, 선지자와 교사가 있는 곳(안디옥교회)이 있는 등 서로 달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직분들은 은사였으며 계급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제도도 없고 조직도 없고 교리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제 온전히 자유하다는 복음뿐이었습니다. 자유하다는 말은 더 이상 내가 내 자신의 의를 만들기 위해 내 자신의 가치를 만들고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나를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유하면 반드시 좋은 면이 피어납니다. 억압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같은 사람의 악한 면이 피어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확신이 임하면 어린아이 같은 자유함으로 내 안에 있던 하나님 생명의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이를 나누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는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교회의 모습에서 출발한 우리는 어떤 여정을 거쳐 지금 우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지 함께 보겠습니다.

1. 건물

유대교의 3대 요소는 '성전'·'제사'·'제사장'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완성'(롬 10:4)이 되셨기 때문에 이제는 성전(건물)도 제사도 제사장을 따로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시고 제사이며 큰대제사장 이십니다. 즉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이고 그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영적 제사이며,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제사장들입니다.

성전은 희생 제사를 위하여 있는 것인데 그리스도 이후에는 희생 제사가 없으니 성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당 건물을 성전으로 종종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성경적으로는 잘못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함께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모였다는 말은 생명으로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특징은 나눔과 교통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생명 관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나누고 서로 교통합니다. 단절과 대립을 전제하고 있는 생존만을 위한 관계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 부르는 데, 그 이유가 바로 생명의 '코이노니아' 즉 생명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랑 신부라는 표현은 하나 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누리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건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교회라는 단어는 '에클레시아'인데, '모인 사람들'을 뜻합니다. 신약에 114번이 나오는데 전부가 모인 사람들이라는 뜻이지 교회 조직이나 건물을 뜻한 적은 없습니다.

'Church' 라는 말은 헬라어 '큐리콘'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그 말은 '주님께 속하다'라는 말입니다. 건물도 주님께 속해 있지요. 그런데 나중에는 건물의 의미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제일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영어 성경 번역본 중 하나인 '킹 제임스 버전'(King James Version)입니다. 킹 제임스 버전은 에클레시아를 전부 Church 로 번역하고 congregation 즉, 회중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회중이라는 말이 청교도의 용어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본격적으로 건물과 동일시되기 시작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공로(?)입니다. 태양신을 섬겨 화폐에 태양신을 새겨 넣고 일요일을 '태양신 미드라'를 섬기는 Sun-day 로 공포하고 성베드로성당에 태양신 형상의 그리스도를 모자이크로 새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사도공동체의 모임과 나눔은 사라지고 신전에 모인 종교의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교 회당 제도와 이교의식을 흡수한 공중(公衆) 예배 의식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희생 제사(성만찬)와 제사장(성직자), 그리고 성전(건물)의 개념이 모두 부활했습니다. 주의 만찬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신비한 희생 제사가 되었고, 건물은 다시 성전이 되고, 제사장은 독신 성직자로 부활이 되어서 결국 그리스도의 죽은 것을 '헛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시 종교가 되고만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기린다던지 순교자를 숭배한다던지 장례식 장송곡,(그리스도인에게 무슨 죽음이 있습니까. 육체는 잠깐 생명을 담았던 그룻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려놓고 나는 하나님과 영원히 어울리는 것입니다.) 신성한 물건 등 이교의 관습이 그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서기 327년에는 로마 전역에 교회가 건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교도 신전에는 신의 이름을 붙였는데 신 이름이 없으니 '성베드로', '성바울'처럼 성인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건물이 웅장해지니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더러운 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건물 앞에 세면대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축을 하다가, 고딕 양식( gothic style)으로 지금도 교회를 세우는 데 이 뾰족탑을 몇 개씩 세우고 있습니다. 그 탑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에서 온 거에요. 예수님과 성경과 물론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먼저는 우리가 건물의 틀을 잡았는 데 이제는 건물이 우리의 틀을 잡고 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교회당 안에 유품을 전시하고 성만찬상(제단)을 다시 만들고 주교나 장로들의 의자는 따로 놓고 촛불과 향, 성직자 예복이 생기고 (로마의 행정관을 본 따서 만든) 황제 의식 때의 행진음악을 본떠서 성가대가 생기고 예배는 극적 효과를 위해서 전문화되었습니다. 즉 전문가들이 진행하고, 성도들은 관객이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 후에는 수 천 개의 성당이 개신교 교회 건물로 바뀌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한 가지입니다. 성만찬상은 밑으로 내리고, 대신 강대상을 위로 올렸습니다. 이 강대상은 벌써 3세기에 생긴 것입니다. 250년에 회당의 낭독대를 본 따서 만든 것입니다. 가톨릭 미사는 성만찬 즉 제단 중심이고, 개신교는 설교 중심으로 된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이학권 목사 / 하나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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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 2013-10-02 02:24:36
말을 이리돌리고 저리 돌리고 어쩌자는 것인지 애매모호합니다. 말장난 하는 거 같아요 무엇이 옳으냐를 찾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본질을 담느냐가 중요하다면 본질적으로 옳은 것을 담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무슨 소린지 이해가 통

하이루 2013-10-01 13:25:14
2편 먼저 읽고 하도 이해가 안되서 1편을 안읽어서 그런가보다 생각해서 1편을 읽었는데 역시 몬소린지 모르겠어요. 본질회복 세미나의 목적이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어떤 본질이 담겨야 하느냐를 찾자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본질이라는 개념부터 바로 잡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말하는 본질이란 사도공동체의 모습을 찾자는 것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그 사도공동체의 모습은 역사적 실제에 나타난 것인가요? 아니면 성경에 나와 있는 해석된 실제를 다시 검토해 보자는 것인가요? 양쪽 다라고 하면 정말 곤란해 집니다. 왜냐면 사실과 해석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본질부터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아시죠? 윗글의 역사적 고찰과 관련된 부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재탕한 것입니다. 콘스탄틴 얘기 부터 유대교 회당, 이교의식, 희생제사와 성만찬 등등... 계속되는 사실 나열이 있은 후 사도공동체의 모임과 나눔은 사라지고, 주의 만찬은 왜곡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것으로 만들고, 황제의식을 본뜬 성가대가 생겨나는 등등으로 왜곡되고, 종교개혁 후에도 외모만 달라지고 실제 내용은 그대로 등등을 언급하셨는데,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면서도 아쉬운 한숨을 쉬게 되는 것은 목사님의 본질에 대한 기준과 명쾌한 해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많은 학자들의 주장을 반복적으로 기술해 놓고 너희들이 알아서 본질을 찾아보라는 식의 내용같고,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이나 노력을 조명하지 않은 채 "내가 보기에는 니들도 아니었어"하는 듯한 내용 같아서 읽기가 불편해 집니다.

바두기 2013-09-26 02:00:50
어떤 글은 자기의 주장이 주된 목적인 논설문이어서 글에 나온 사실들도 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입니다. 이런 글들은 주장이 명확하지 않으면 뭔소린지 모르겠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글들은 지식을 전달하는게 주된 목적이어서 주장이 안나와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글에 뭔소린지 모르겠다는 댓글이 달리는 이유는
이 목사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거나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안해서 잘 못알아듣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을 심도있게 가르치지 않는 교회들이 참 많습니다.

이 글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열가지 주제중 이제 겨우 첫번째 주제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논설문이라기 보다는 지식전달이 주된 목적인 것 같습니다. 이런 글이 싫으면 읽지 않으면 됩니다. 왜 구태여 손가락을 들어 남을 공격하고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주규 2013-09-21 20:47:27
아래 댓글다신 분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건지 알수가 없네요.
녹취한 기자의 문제인지, 말하는 목사의 문제인지...
아마 이글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느낌을 갖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 글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까....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김목사 2013-09-20 18:21:03
공적인 싸이트에 글을 쓰려면 성서적, 신학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써야 한다고 봅니다. 허술한 내용을 말하면서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