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방법론 아닌 본질 고민하기'
이학권 목사, '방법론 아닌 본질 고민하기'
  • 이학권
  • 승인 2013.09.2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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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본질 회복 시리즈, 예배와 설교

이 글은 하나임교회 이학권 목사가 진행한 '본질 회복 세미나'의 강의안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이학권 목사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 이학권 목사. (<미주뉴스앤조이> 자료사진)

 
 
예배

예배 순서는 세계적으로 비슷합니다. 가톨릭, 개신교, 동방정교가 거의 같습니다. 예배로의 부르심, 찬양, 기도, 설교, 헌금, 광고, 찬양, 축도의 순서 중 한 두 개 차이가 있는 정도입니다. 이 순서는 교황 그레고리 1세(Gregroy the Great·A.D. 590-752)가 만든 것입니다. 그레고리 1세는 6세기 사람이니 사도공동체의 삶이나 모습 같은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종교화된 예배의 질서나 분위기가 너무 문란하니 미사의 순서·의미·상징성 등을 정립하는 개혁을 하였습니다.

그레고리 1세는 '그레코로만'(Greco-Roman)의 철학, 문학에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의 사상의 죽음과 환생, 그리스 철학의 문학과 의식, 그리스도의 신비주의적인 면을 끌어들여 예배 순서를 경건주의 양식으로 자리를 잡게했습니다.

제사장의 의상과 향, 성수, 촛불, 바실리카 양식, 로마법에 기초한 교회법들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제도와 의식이 공고해졌습니다. 교황은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로마 황제가 대신관(大神官)으로서 '모든 종교의 가장 으뜸가는 제사장'이라는 뜻으로 쓰던 이교도의 칭호입니다. 이러한 예배 순서는 천 년 동안 유지됐습니다. 종교개혁으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개신교의 예배는 설교 중심입니다. 가톨릭은 종교개혁까지 설교가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의식으로 재현해 그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가톨릭 미사였습니다. 이런 참여 위주의 예배 방식이 설교를 듣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설교는 머리로만 듣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개혁가들은 말씀을 중요시하였습니다. 루터는 말씀 선포 없이는 절대로 모이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형식의 모임이던 개신교는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성만찬의 정결의식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떡과 잔을 올리는 의식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이런 형식은 청교도들에게까지 왔지만, 이들은 성직자 복장, 성상 장식과는 결별을 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준비하고 전하는 설교도 자리 잡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사제들을 위한 교육이 없어 교황청이나 교구에서 내려주는 것을 사제들이 읽기만 하고 직접 설교 준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직접 준비해서 전하는 설교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발생적 기도를 강조해서 예배 때 기도를 보통 한 시간 정도는 했다고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일차적 수단이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을 처벌했습니다. 벌을 주거나 벌금을 내렸습니다. 예배당에서의 태도는 엄숙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 웃어서는 안 됐습니다.

청교도 시대를 지나면서 부흥 운동이 들어 왔습니다. 예배에 들어오면 웃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졸면 벌을 받거나 벌금 내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배가 뭐가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예배에 무슨 감동이 있었겠습니까. 역사가 일어나려면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감동이 있어야 에너지가 피어납니다. 머리와 논리에는 감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에너지로 만드는 것이 감동입니다.

그래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배 안에서 회중의 감정 표현을 처음으로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감리교에서 시작되어서 무디(Dwight L. Moody)의 부흥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부흥운동은 오순절 운동을 지나 '경배와 찬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감리교의 부흥운동에서 처음으로 회중찬송을 적극 도입했습니다. 처음으로 사람들이 예배에 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감정이 표현되니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특별히 가스등이 발명되어 주일저녁 예배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tv가 없어서 저녁 먹고 함께 모여 찬송하며 어울리는 일상이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많은 역사가 이루어 졌습니다. 그 시절 많은 복음성가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수 백 곡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같은 전도자는 '말씀을 나누는 유일한 목적은 오직 회심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의미 등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직 교회로 나오지 않는 사람을 교회로 나오게 하는 것이 시대적 요구였습니다. 주관적, 개인적 체험을 굉장히 강조해서 '개인의 구주' (personal saver)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대중 기독교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설교

설교는 개신교의 꽃입니다. 예배의 핵심이자 전부입니다. 설교는 교회의 중심입니다. 설교가 '이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를 표현하는 시대입니다. 요즘 설교의 특징은 규칙적으로 똑같은 사람이 수동적 청중에게 전하는 연설의 형태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배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일입니다.

사도공동체는 어떻게 했습니까. 서로 권하는 말이었습니다. 말의 내용이 특별해야 감동을 받는다면 병든 상태입니다. 특별한 것을 깨닫거나 깨우쳐야 감동을 받는다면 심령이 메마른 상태입니다. 진짜 감동은 평범한 진실이 나누어질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명이 건강하다면 평범한 진실에서 감동이 빛나야 됩니다.

설교의 유래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선지자의 전통도 아니고 예수님도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원전 5 세기 그리스의 변론가들인 '소피스트'(Sophist)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연설의 대가로 돈을 받고, 감정에 호소하고, 특별한 옷을 입고, 고정된 장소에서 고정된 청중에게 연설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저녁 식사 후에 짧은 설교를 듣는 것이 오락거리였습니다. 소피스트들은 주요 도시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오늘날 설교자가 그 교회의 자존심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어느 도시의 소피스트가 더 말을 잘 하나 하는 식입니다.

가톨릭 초기, 특별히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유명한 설교자들은 수사학(修辭學)의 제자들입니다. 대표적인 설교자가 4세기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n Chrysostom)입니다. 헬라식 수사학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크리스소스톰의 헬라식 수사학을 따른 개혁 시대의 대표가 울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라틴식을 따른 인물입니다. 어거스틴의 방식을 따른 대표적인 설교자는 마틴 루터였습니다.

가족이 모였는데 아버지가 가족을 앞에 두고 한 시간씩 설교를 하면 지루할 것입니다. 즐겁게 얘기하며 나누며 밥을 먹으면 될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마음에서 나오는 격려는 서로를 인정해주고 고마워하게 합니다. 작은 진실, 순수한 진실들이 나누어지고 생명은 거기서부터 영글어 갑니다. 시를 쓰듯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나눔은 지루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절대 지루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놀 때 지루해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다운 나눔은 내버려둔 채 굉장히 어색하고 지루한 설교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종교개혁 당시 칼뱅은 가톨릭이 말씀을 무시한 것에 반발하여 성경을 조직적으로 연구 했습니다. 그 칼뱅의 전통을 따른 청교도들이 주석적 성경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현대 설교의 모체가 되는 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구약을 오묘하게 갖다 붙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짝이 있다'며 소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제일 대표적인 사람이 세대주의자들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마지막 날에 칠년 환난이 있는데 첫 삼년 반 후 삼년 반을 나누더니, 예수님이 재림하시는데 첫 번째 재림은 '공중재림', 두 번째 재림은 '지상재림이라고 주장합니다. 본질세계를 현상세계에 꿰어 맞추려고 하니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표적으로 세 가지의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그 첫 번째 부작용은 성직자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목사님의 교회'로 부르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 이름 부를 때 대개 '아무개 목사님 교회'라고 말하면서 전혀 이상해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영적 성장이 어려워졌습니다. 말씀은 영인데 어떻게 지식으로 말씀을 가르칠 수가 있습니까. 영은 가르침보다는 삶으로 나누어지고 체험·습득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일갈이 맞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난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령의 교통함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지적인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결코 사람의 지적 능력으로 말씀을 알 수는 없습니다. 말씀은 영이니까요.

마지막 부작용은 성도들이 평신도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 부작용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들은 체계적으로 무기력한 수동적 '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 다음에 계속됩니다.)

이학권 목사 / 하나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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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2013-10-26 08:52:26
여러 문제점이 보이나 특별히 카톨릭 계열 교회에 대한 이해가 엄청나게 부족한 내용입니다. 개혁신학 쪽으로도 많은 반론이 제기 될 소지 많고, 교회사적으로도, 특히 설교학 쪽으로도 엄청난 비평을 감당하셔야 할 내용들이 도처에 있네요. 하바드 디비니티에서 수학하신 적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약간 의아합니다. 앞으로 칼럼에 참조하신 텍스트가 어떤 책들인지 함께 제시해 주시면 짧은 칼럼으로는 혼란스러울수 있는 부분들도 어느정도 새겨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본질 회복 2013-10-18 07:09:57
그사람의 평가는 그삶이 지나간 길을 보면 안다더군요.
이목사님이 떠난후 그분이 개척한 교회를 다니다 나온사람입니다.
잘가르 치고 하셧는데 제가보기로는 모든 교회를 이학곤 목사 자신의 스타일로 가르치고 운영 해온것같읍니다 새교회라고 시작 햇지만 별로 새로운것은 없고 어쩌면 이목사의 자기 스타일 로 교회 를 만든것 같아 보입니다(전우주 적 하나님의 교회 야하는데).떠날때의 그 소란과 소동 모두 깨긋 하지 못 햇읍니다.
뉴저지 가서는 또 새롭게 하시고 있나요?
소문에 의하면 부교역 자들이 붙어 있질 못 한다는 데 정말 성경적 목회의 본질이 회복 되야 한다고 생각 이 들어 몇자 적어 봅 니다

좋네요 좋아요 2013-10-08 05:35:36
사실상 형식이 본질을 보호하지 못하고, 되려 본질을 갉아먹어 온지는 너무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퀘이커나 무교회주의자들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이제 한국교회는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개종'이 필요한 단계라고요... 너무 각종 '노이즈'가 많아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설자리가 없는 교회... 뭐 이게 한국교회가 아니것나... 하나님의 자리를 가로챈 '도둑'이 넘 많은 것이 문제로다 뭐 이런 탄식이죠.

아톰 2013-10-08 05:25:18
정말 좋은 강의 내용입니다. 이학권 목사님 같은 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만, 목사님들이 많이 싫어할 내용입니다.

한번 굳어진 패러다임은 생각보다 질기고 오래가지요. 인간은 보통 익숙해진 삶의 방식에 길들여지기 마련이고,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란 생각입니다.

이 목사님이 하시는 본질회복 강의 내용내용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이해하기는 아직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나 미몽에 빠져 있다는 느낌입니다.

하나님이 쫓겨난 한국교회에 하나님이 계실 자리를 만들어 내는 일에 정진하시기를...

다니엘 2013-10-05 03:23:37
설교의 원천은 성경과 설교자의 삶의 자리이다....라는 이재철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이글이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지 못하는 이유를 뉴스엔조이의 편집자와 발행인을 빼고는 다 알겁니다.
장영춘 목사등...다른 분들의 기사에 달린 부정적인 댓글들은 다 그대로 두면서 이 글의 저자에 대한 부정적인 댓글들은 무조건 삭제하는 행태는 미주 뉴조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밝히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