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화 위해 싸운 파란 눈의 선교사
한국 민주화 위해 싸운 파란 눈의 선교사
  • 이승규
  • 승인 2009.06.13 0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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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문혜림 선교사, '민중과 함께 뒹구는 선교가 제 맛'

▲ 문혜림 선교사.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해 투쟁했다. 쫓겨나듯이 한국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와 미군 부대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했다.
노스캐롤라이나 블랙마운틴 지역에는 한국에 복음을 전했던 미국북장로교단에 소속 미국인 선교사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들은 당시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국을 찾아 학교를 세워 인재를 키우고 병원을 지어 질병을 고쳐주는 등 한국 사회가 발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지난 4월에는 미주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 이들을 찾아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주로 이런 선교사들만 기억하고 있다. 과연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은 이들 뿐일까.

이들과는 조금 다른 선교를 한 선교사들이 있다. 이들은 학교나 병원을 짓는 대신,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청을 높였고, 한국과 미국 정부에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요구해 많은 한국인들의 상처 입은 가슴을 치유했다. 이들은 거리에서 민중과 함께했고, 심하게는 아예 한국에서 추방을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문혜림 선교사도 그중 한 명이다. 문동환 목사의 아내로 더 잘 알려진 그이지만, 그녀의 이력도 남편에 견주었을 때 전혀 뒤지지 않는다. 문 선교사는 문 목사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 있을 동안 한국의 열약한 인권 상황을 미국에 알렸다.

문 선교사는 미군 부대에서 일했던 이점을 십분 살려 군사 우편을 이용, 국내의 소식을 해외에 알리고, 외신 기사들을 한국에 들여와 국내 운동가들과 함께 소식을 나눴다. 당시에는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외신 기사들은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값진 행동이었다.

문 선교사는 미국 의회에서 열린 청문회 의사록을 받아 한국 운동가들과 학생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문건이 중요했던 이유는 한국의 상황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이었고, 그중에서도 미국 정부가 박정희 정권을 어떻게 지지했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 선교사의 이런 행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그녀에게 △조용히 있든지 △미군 부대에서 하는 일을 그만 두든지 △한국을 떠나든지 등의 조건을 내걸었다. 남편이 감옥에 있었고, 공동체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문 선교사는 미군 부대 우체국을 통해 한국 바깥세상과 소통하던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문 선교사는 당시 한국의 상황을 염려하는 선교사들의 모임인 '월요 모임'에 나갔는데, 이 소속 선교사들은 주한 미 대사를 만나 한국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 1968년 2월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당시 미국의 험프리 부통령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다른 관리들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교회 지도자들, 국제 인권 단체에서 온 관계자들 모두 이들에게는 만남의 대상이었다.

한국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위한 문 선교사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 언론이 정권의 입장만을 두둔했기 때문에 외신을 이용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찰나에 기회(?)가 찾아왔다.

문 목사가 재판을 받을 때 일이다. 정부에서는 한국 최초로 재판 과정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문 선교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거리에서 시위를 하기로 했다. 어떤 날은 침묵의 표시로 X자를 그려 붙인 마스크를 쓰기도 했고, 어떤 날은 우산에 한국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문구를 붙여 사람이 많은 곳에서 활짝 펼치기도 했다. 이들의 행동은 언론에 좋은 기삿감을 제공했다.

▲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해 투쟁했던 월요 모임 선교사들의 이야기 <시대를 지킨 양심>을 문 선교사가 보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은 뒤 문 목사도 석방됐다. 그리고 1980년 봄 문 목사는 세계교회협의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에 갔다. 그리고 그 기간 중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은 문 목사에게 한국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한국에 있던 문 선교사 역시 아이들과 함께 도망치듯이 미국으로 향했다. 그렇게 떠난 뒤 5년 동안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문 선교사는 떠나기 전 미군 부대에서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들을 상담하는 일을 했다. 처음 제안이 들어왔을 때 문 선교사는 절대 미군 부대에서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한국의 독재 정치를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했던 일들이 훗날 미군 부대 근처에서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준비하는 단계였다는 사실은 당시에는 몰랐다.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노태우 정권 당시 문 목사 가족은 다시 한국을 찾았다. 문 선교사는 곧바로 동두천 미군 기지를 찾았다. 기지촌 여성들을 돌보기 위해서다. 한국에서 생활하던 미군들은 온갖 편의를 제공 받았지만, 기지촌 여성들에게는 정기적인 성병 검사뿐이었다. 또 미군들에게 폭행당하는 여성들, 결혼하기로 해놓고 몰래 도망간 미군 등등, 여성들은 미군들에게 상처를 꽤 많이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문 선교사는 한국 장로교와 손을 잡고 '자매의 집'이라는 센터를 만들었다. 이 자매의 집은 기지촌 여성들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주고, 오갈 곳 없는 여성들에게 머물 곳이 됐다.

처음부터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문 선교사는 기지촌 여성들이 성병을 검사 받는 병원을 찾아갔다. 그들을 만나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영어도 가르쳐줬다. 그러면서 친해졌다. 나중에는 상담은 물론, 요리 강좌, 영어 수업 등 기지촌 여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강좌를 개설할 수 있었다.

문 선교사는 기지촌 여성들이 자신에게도 도움을 줬다고 했다. 정말 기독교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함께 있는 여성들을 보면서 배웠다고 했다.

당시 문 선교사를 비롯한 월요 모임 선교사들이 민주화 투쟁을 했을 때 많은 동료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왜 예수를 전하지 않고 거리에서 데모를 하느냐고 물었다. 선교사 역할이라는 것이 예수만 전하면 되지, 민주화 운동 같은 사회 참여는 안 하는 게 좋다는 얘기였다.

문 선교사는 그런 그들의 생각도 존중하지만, 학생들이 다치고,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편하게 예수만 전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들과 함께 예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월요 모임 선교사들에게는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이 바로 예수를 전하는 일이었던 셈이다.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 선교하러 가고 싶다는 문혜림 선교사. 문 선교사는 마지막 과제가 남아 있다고 했다. 바로 한반도의 통일. 문 선교사는 한반도 분단에는 미국의 책임도 있기 때문에 특히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평화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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