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은 꼭 선해야 하나?
기독교인은 꼭 선해야 하나?
  • 김기대
  • 승인 2014.06.18 13: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창극과 같이 선한 사람들에 대한 브레히트의 헌시

일제 지배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신앙고백’(?)으로 국무총리 인준이 위태위태한 문창극 씨의 발언에 대한 사람들의 빈축은 이미 넘쳐나는 지경,  숟가락 하나 슬쩍 얹는듯한 언급은 더이상 필요없다

   
▲ 온누리 교회에서 강연중인 문창극 장로 ⓒ 뉴스 M

고 생각하던 차에 한 일간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문창극 총리후보자 평가 ‘극과 극’”이라는 제목의 지난 6월 12일자 한겨레 신문 기사다. 글을 쓴 이세영 기자는 문후보자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가 극과 극이라는 논지의 기사를 전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로 기사를 맺는다.

<그러나 외형적 도덕성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의 오랜 언론계 지인은 “보수적인 기독교 가문에서 자라 도덕적 하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일제 강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 강제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가 필요없다는 사람, 자기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재단의 기금을 이용해 스스로 석좌 교수가 된 사람이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도 기독교 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인들의 판단. 이 시대에 기독교 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에 도덕적 하자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기는 하다.  그런데 읽는 마음은 편치 않다. 과연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전에는 선하다는 말이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는 데가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문창극씨는 도덕적 기준에 맞는 즉 선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런 류의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는데 나는 문씨가 진짜로 선할 것이라고 믿는다. 결코 비아냥이 아니다. 그가 다니는 온누리 교회 구성원들은 대부분 적당한 고학력에 예의 바르고, 선교에 열심이다.  교회 운영에도 별 관심이 없어서  사사건건 따지지 않는 아주 착한 교인들이다. 아마 문창극 장로도 소망교회의 이명박 장로처럼 주차장 정리도 열심히 했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지위나 가진 재산에 상관없이 겸손하게 봉사하는 그의 모습에 진정성이 있다고 믿는다.

중앙일보 정치 부장 시절 정치 차장이었던 고도원 기자(현재 아침편지 발행인) 와 일촉 즉발의 상태까지 갔었다는 보도에 따르면 고도원씨가 호남출신이란 것이 불화에도 영향을 미쳤다는데 문창극 씨는 호남출신의 하용조 목사는 지극 정성으로 모셨을 것이다. 아무리 호남 출신이 싫어도 그 지역 사람들이 자기에게 고분고분만 하면 지역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문씨에 대한 온누리 교회 교인들의 반응을 취재한 오마이 뉴스 보도에 따르면 “그분은 아주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하는데 나도 그렇게 믿는다.

선함의 사회성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 작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진 세월을 견뎌 낸 생존자 중 한 명이다. 본래는 화학을 전공한 화학도였으나 2차 대전 이후 <이것이 인간인가> 등의 대표작을 남긴 소설가로 변신한다. 아우슈비츠에 끌려 갈 때 그가 탄 화물차칸의 65명 중 겨우 4명만 살아남는 잔인한 시련을 이겨 낸 그였지만 1987년 토리노 자택에서 자살한다. 그를 괴롭히던 수용소의 악몽, 세상이 진보하리라고 믿었지만 인간의 탐욕만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자살했을 것이다.

그의 기억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화학을 전공한 덕분에 아우슈비츠의 화학 연구실에서 조교처럼 일하는데 그때 같은 연구실에 있던 젊은 독일 여성들이 프리모 레비를 가리켜 수근대는 소리를 듣고 그는 인간에 대한 실망이 더욱 깊어졌다고 회상한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여성들이 프리모 레비를 보면서  유대인들은 왜 저렇게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느냐 라고 했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받던 유대인들, 이처럼 그들을 악취나는 존재로 만든 독일 동족의 만행을 매일 보던  여성들이 마치 더러운 냄새가 유대인의 민족적인 특징인 것처럼 아무 생각없이 말할 때 프리모 레비에게는  여성들의 무감각함이 가스실의 만행보다 더 무서운 충격이었다.

영화같은 데서 보았던 1940년대 초반의 독일 여성들을 상상해 보자. 검소하고 절제된 모습, 머리에는 하얀 띠가 둘러 있을 것이고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수더분한 옷차림, 히틀러가 자신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 중 일부라고 말했던 것처럼 조국 독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당시 여성들은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열심히 나갔을 것이다. 분명 그 젊은 여성들은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었다. 그녀들이 직접 유대인들을 죽이지 않았고 전쟁책임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도덕적 순수함 때문에 프리모레비에게서 나는 악취의 원인을 보고도 몰랐다.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선한 문창극 장로에게는 가난은 원인에 관계없이 게으름의 결과이기에 조상들이  안타까워서 선조들의 일을 거론했을 뿐인데  여론의 질타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고작 원인을 생각해낸 것이라고는 힘없어서 나라를 빼앗겼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세포적인 역사관, 그래서 그것을 말했을 뿐인데 자기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쯤 상황의 전개가 자신을 성숙시키는 하나님의 시련 쯤으로 생각하고 저들의 용서를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함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

오늘 기독교인들이 선함으로 신앙인의 표징을 삼기를 원한다면 선함에 대한 고민을 가져야 한다. 자크 엘룰에 따르면 선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과 인간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의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성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라고 본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선이고 그것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보면 드러난다. 선함의 응집체인 예수는 때로는 싸웠고 욕했고 부수었다.

 선을 알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오히려 믿음이란 이름으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려 한다고 자크 엘룰은 우려한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선이 무엇인지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선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선와 악을 규정함으로써 마치 하나님처럼 되려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크 엘룰은 이사야 5:20을 읽어준다.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오늘 한국 교회의 핵심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천박한 현행을 마다 않는 기독교인들은 SNS상에서 개독교라는 비판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는다. 게다가 교양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들은 저급한 취급을 받는다. 진짜 위험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고민하기 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보이기 위하여 선생인체 하는 학벌좋고 교양있는 기독교인들, 시끄러운 문제를 애써 외면하면서 착한 척 하는 중산층 이상의 기독교인들, 자기 기준으로 게으름과 근면함, 민족사의 비극과 하나님의 섭리를 결정하는 신앙 좋은 기독교인들이 진짜 위험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뿐 아니라 선한 사람들은 곳곳에 많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눈에도 선한 사람의 문제점이 커 보였던 모양이다. 문씨를 비롯한 한국의 많은 선한 기독교인들을 위해  브레히트의 시를 선물한다. 이 시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자주 인용해서 유명한 시이기도 하다.

 

선한 자에 대한 심문

   
▲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브레히트 ⓒ 뉴스 M

앞으로 나오라, 우리는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대는 매수되지 않지만,

집을 내려치는 번개 또한

매수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가 했던 말을 지켰다.

그러나 어떤 말을 했는가?

그대는 정직하고, 자기 의견을 말한다.

어떤 의견인가?

그대는 용감하다.

누구에게 대항하는 용기인가?

그대는 현명하다.

누구를 위한 현명함인가?

그대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의 이익을 돌보는가?

그대는 좋은 친구이다.

그대는 좋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친구인가?

 

이제 우리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그대가 우리의 적임을 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그대를 벽 앞에 세우리라. 그러나 그대의 미덕과 장점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대를 좋은 벽 앞에 세우고 그대를

좋은 총의 좋은 탄환으로 쏠 것이며 그대를

좋은 삽으로 좋은 땅에 묻어 주리라.

김기대 목사 / LA 평화의 교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