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도 평신도이다
목사도 평신도이다
  • 신성남
  • 승인 2014.07.05 06:34
  • 댓글 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신교에 '성직자' 직분은 없다
   
▲ 신성남 ⓒ <뉴스 M>

직분을 특권화하고 계급화하는 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일이며 종교 업자들의 밥그릇을 치장하는 일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단순히 종교의 틀에 가둘 수 있는 그런 저급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를 포장하여 종교화하거나 상업화하는 일을 막아야 합니다.

언젠가 어느 대형 교회 원로 목사님의 발언 가운데 '장로를 평신도로 지칭'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평소에 존경하던 목사님의 발언인지라 당시 필자는 순간적으로 다소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왠지 불편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목사 역시 '가르치는 장로'로서 본질상 장로의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장로인데 과연 무슨 근거로 '다스리는 장로'는 평신도이고,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는 평신도가 아닐까요. 또는 신도 중에 오직 목사만이 '주의 종'일까요.

개신교 직분에 '성직자'는 없다

목사는 별도로 신학 과정을 이수하고 안수를 받은 특별한 사람이기에 성직자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 역시 자신을 그리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직임시에 목사만 안수 받는 것이 아니라, 장로와 안수집사도 안수를 받습니다. 그런즉 안수 자체가 직분자를 특별히 구분하여 성직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단지 신학을 전공하였다고 해서 그를 성직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교사'에 해당되는 신학교 교수는 성직자가 아니라 그냥 교수일 뿐입니다. 결국 신학 전공이나 안수가 목사를 평신도가 아닌 성직자로 분류할 근거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본래 개신교에 별도의 '성직자' 직분이란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 성직자인 사제직을 폐지한 이유와 맥락을 같이합니다. 개신교의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이 아니며, 신약의 사도도 아니고, 그리고 중세 교회의 사제는 더욱 아닙니다.

신약 교회에서 목사, 장로, 교사, 또는 집사 등의 직분은 마치 귀족과 평민을 구별하듯 신분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역의 구분'을 의미합니다. 신분상으로는 직분에 관계없이 모든 신도가 동등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바른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어느 목사라도 자신이 특별한 성직자이며 사도나 제사장이나 사제와 비슷한 동급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이미 사이비의 문턱을 크게 넘어서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거의 예외 없이 목사나 교주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신성시하여 기필코 '성스로운 존재'로 둔갑시킵니다. 그래야만 추종자들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며 그 사특한 목적을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대속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간자 역할을 하던 구약의 성직자인 제사장을 폐하셨고, 그 결과 모든 신자가 다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약 교회에는 모든 신자가 신분상 이미 다 성직자가 되었으니, 별도로 '성직자' 역할의 직분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신약시대에는 교회 내의 직분만이 성직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신자들이 담당하고 있는 모든 직업이 다 거룩한 소명을 지닌 성직입니다. 도의적인 문제만 없다면 신자에게 천하거나 속된 직업이란 없습니다. 세탁업도 성직이며, 국밥집도 성직이고, 그리고 막노동도 성직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돌보는 것도 성스러운 사역이고, 남은 여력으로 이웃과 사회를 돕는 것 또한 매우 성스러운 사역입니다. 따라서 더는 성속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폴 스티븐스 교수 역시 "성경에 기록된 헬라어 '라오스'라는 단어는 평신도나 성직자의 구분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뜻한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여러분들은 안수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다"라며 목사와 평신도가 서로 다른 계급의 신분이 아니라 같은 신도임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평신도'라는 용어가 중세 교회의 계급적 표현이라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은 매우 타당합니다.

물론 세인들이나 언론에서는 목회자를 가톨릭의 사제나 불교의 승려에 준하는 신분으로 생각해서 성직자로 예우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굳이 따라다니며 시정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 내에서는 이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인식이 관습을 바꾸며, 잘못된 관습은 제도와 사상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직분 우월 의식은 비기독교적 사상

작금의 한국교회가 바로 그런 형국입니다. 목사를 특별한 성직자로 생각하여 장로나 교사 그리고 집사보다 크게 성스러운 직분으로 대우하거나, 또는 비록 일부이겠지만 목사 스스로 자신을 신도보다 우월한 신분으로 자처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근자에 한기총의어느 목사님은 한기총 사태 해결을 위해 법원에서 파견된 변호사에 대해 "일개 집사가 목사를 오라가라 하느냐"는 식의 발언을 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이를 일개 목사의 발언이라고 무시하기에는 그 파장이 너무 컸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일부 목회자들 속에 돌처럼 경직된 직분 우월 의식이 크게 들통난 사례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신약 교회에서 회중이 선출한 특정 직분자를 마치 타종교의 사제, 승려, 교주 또는 무당처럼 대우하여 다른 직분자나 신도보다 우월한 신분에 두는 것은 매우 미신적이며 비기독교적인 발상입니다. 성경은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 등을 서로 보완적이며 협력적인 대등한 직분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만 가르치는 직무를 중시하여 '가르치는 장로'를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스승을 존경한다고 해서 스승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지는 않습니다. 가르치는 일에 관련된 권한과 책임만을 위임합니다. 마찬가지로 목사를 존경한다고 해서 교회가 그에게 과도한 교권과 함께 지나친 책임을 지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필자가 한국교회를 전반적으로 매우 '기형적인 교회'라고 혹평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요즘 예수교가 '목사교'라고 지탄을 받을 정도로 목사직이 심하게 교주화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은 잘 몰라도, 목사의 가르침이라면 별다른 검증이 없이 무조건 따르는 맹신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실하신 목사님들만 계신다면 당장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무인가 신학교만 해도 무려 400개가 넘으며, 전국의 신학교들에서 매년 만명 이상의 목회자가 양산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수백만 원만 내면 정규 신학교 학위는 물론 목사 자격까지 만들어 주는 전문적 중개업자들이 있고, 보다 심한 경우로는 돈만 내면 며칠 만에 목사로 신분 세탁을 해주는 곳까지 있다고 합니다.

이러니 오늘날 왜 한국교회가 이렇게 상처투성이로 만신창이 된 것인지 쉽게 설명이 됩니다. 여러 교단의 교세 확장 우선 정책과 이에 따른 신학교의 난립으로 목사의 저급화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보면 직분 우월 사상이 교회를 얼마나 심각하게 해치고, 목사직의 특권화가 한국교회 부패와 타락에 얼마나 안락한 온상이 되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단 목사직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장로나 집사직 역시 만성적인 직분 우월 사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직분자는 근본적으로 '섬기는 자'인데, 어찌 된 일인지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아직도 교인들을 차별하며 목이 뻣뻣한 장로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사랑과 섬김입니다. 그런데 교회 개척 초기에는 주인의 밥상 아래 개처럼 낮아져 하찮은 일도 마다 않던 목회자들이 중형 교회 정도가 되면 정승처럼 행세하려 하고, 나중에 대형 교회라도 되면 아예 왕처럼 회중을 휘두르며 군림하려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최고 의결 기관인 공동의회를 아예 동네 반상회만도 못한 '날치기 의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 재정 결산, 건축, 또는 세습 등 예민한 문제들을 처리할 때 보면 정말 가관입니다.

일부에서는 이제 그것도 배부르고 싫증이 났는지 정치권마저 넘보며 그 허망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동안 순진한 신도들을 기만하고 우민화하며 교단 정치에서 잔재미를 톡톡히 보시더니 요즘은 세속 정치마저 아주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하여튼 선거철이 될 때마다 빠짐없이 혼탁한 먹물을 뿌리며 나서는 꼴뚜기들 중에 제대로 된 생선은 하나도 없다고 단정해도 큰 오류는 아닐 것입니다.

성속 구분은 중세적 악습

목회자의 직분 우월 의식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목회자 납세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기총 대표회장은 "원칙적으로 목회자 납세에 반대한다. 목회자는 근로자가 아니라 봉사하는 사람이므로 과세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목사가 교회에서 하는 사역은 성스러운 일이고, 생업에 수고하는 교인들의 사역은 세속의 일이라는 이원적 사고에 기인합니다.

아울러 그 봉사 논리가 참으로 이상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만 봉사하나요. 오히려 진정한 봉사자는 무보수로 헌금과 세금을 내며 수고하는 장로와 집사들일 것입니다.

직업에 있어 성속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극히 중세적인 구습입니다. 목회자 납세 논란은 목사가 성직자라는 중세적 특권 의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공식적으로 성직자를 인정하는 가톨릭의 사제도 세금을 내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많은 외국 교회 목사들도 소득세를 내는데 유독 한국교회 목회자들만이 면세가 되어야 한다는 그 논리는 매우 궁색하기만 합니다.

반면에 성속을 구분하지 않고 사역하셨던 허병섭 목사님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하월곡동 달동네로 들어가 '동월교회'를 열었고, 국내 최초로 교회에 탁아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목회자의 직분을 버리고 직접 공사판 미장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월곡동 일꾼두레'를 만들어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후에는 시골로 내려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자연을 중심으로 하는 생태 공동체 사역에 여생을 헌신했습니다.

허 목사님의 향기로운 삶 앞에서 성속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고, 누가 감히 '목사는 평신도가 아니다'라는잡론을 펴며 구취를 풍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신자들에게 더는 구분된 성스러운 땅, 성스러운 건물, 성스러운 강단, 성스러운 가운, 또는 별개의 성직자 따위란 결코 없습니다. 오직 성스러운 소명을 향한 거룩한 사역만이 있을 뿐입니다.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라 사역자

요즘 이교적 성직주의와 직분 우월 사상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가 '직분 계급화'를 그대로 방치하였더니 이젠 '직분 우상화'의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목사직이 교회의 우상으로 변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정 직분이 성직자가 되고, 나머지는 평신도가 되는 것은 이방 종교의 모습입니다. 복음 진리에 세워진 신약 교회에서는 직분에 따른 사역의 구분은 있으나 신분의 구분이란 없습니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모두가 대등한 직분입니다.

그런데 다 똑같이 허탄한 인생들이 그 무슨 어줍잖은 성직자 행세를 하며 별도의 특권을 주장해야 할까요. 왜 일부 목사들은 스스로 참된 '제자'가 될 각오는 실천하지 않고 늘 멋진 '선생'이 될 궁리만 하고 있습니까. 정말 성경은 직분이나 안수 자체가 사람을 더 거룩하고 성스럽게 만든다고 가르치는지요.

거룩한 교회 내에서 특정 직분을 특권화하거나 계급화하는 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일이며, 종교 업자들의 밥그릇을 치장하는 기만적 잔수를 따르는 일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단순히 종교의 틀에 가둘 수 있는 그런 저급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를 포장하여 종교화하거나 상업화하는 일을 막아야 합니다.

땀 흘려 일하는 모든 직업이 다 고상한 성직이며, 모든 신자가 다 거룩한 소명을 지닌 성직자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전제 아래에서든 장로와 집사가 평신도라는 논리가 옳다면, 목사도 당연히 평신도입니다. 목사가 특별하게 중요한 직분을 맡은 신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다른 신도보다 더 크거나 더 성스러운 존재는 결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했습니다.

결국 모든 신도가 성직자인 개신교에 별도의 특별한 신도나 성직자란 결단코 없습니다. 다만, 사랑과 섬김으로 가슴이 불타는 '사역자'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세 부류의 사역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고대 교회의 사역자들도 세 부류로 나뉘었다. 장로 계열에서 일부는 목사와 교사로 선택되고, 나머지 장로들에게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책망하고 지도하는 일을 맡겼으며, 빈민을 돌보고 구제 물자를 분배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위임했다." - 칼뱅(Jean Calvin)

신성남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5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james 2014-09-09 10:45:22
신성남 저자님의 의도도 공감하고, 현실도 공감 하지만
그저 조용히 순종하는 우리의 자세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비판으로 인하여 목회자 그룹에 속하여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바라 볼 우려가 있기 때문이지요
무슨 자격과 능력으로 신성남 저자님이 수많은 사람들을 판단합니까

오늘날 우리들 마음속에 민주주의, 이기주의는
조금도 손해보고 싶지않고, 조금도 가슴아픈 일을 참지 못하는,,

죄된 나를 드러내려 하는 본능을 누르고, 누군가를 비판하려 하지만 말고
본인이 알고 있는 한정적인 정보와 지식을 자랑하려 하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주어진 것에 순종하며,
문제에 대한 정확한 현황과 원인, 문제점에 대한 저자의 해결, 제안점등
희망적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글을 써 주셨으면 좋겠네요.

루크 2014-07-08 17:17:21
교회를 유기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위의 글은 100%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성경전체를 보면 기관적요소도 발견되어 집니다.
충분한 교회론에 대한 이해 없이 한 측면만을 가지고 직분을 평가하는 것에 대해 다소 불편함이 있네요.

hesentme 2014-07-08 06:49:33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상식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군요. 책임있는 자리에 있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습니다. 모두 축구해설을 할 수 있지만 축구해설자로 살 수 없듯이 목사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민우 2014-07-06 09:50:29
강추

김목사 2014-07-06 06:48:00
신성남 박사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