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적 아버지다”!?
“나는 영적 아버지다”!?
  • 강만원
  • 승인 2014.07.07 09:3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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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만원 ⓒ <뉴스 M>

제법 이름이 널리 알려진 어떤 중형교회에서 새로이 장로들을 선출했다. 다섯 명의 신임 장로들을 임명한 직후에 담임목사는 의례히 그랬던 것처럼 즉각 당회를 열고는, 장로들의 군기를 잡았다.

“교회에서 당회장은 영적 아버지다. 교양있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복종하듯이, 아니, 그 이상으로 신임 장로들은 전임 장로들을 본 받아서 담임목사인 나를 영적 아버지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회는 영적인 위계질서가 있어야 하며, 질서가 있는 교회라야 하나님의 정의가 넘치며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다”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신임 장로들 가운데 한 명이 미덥잖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담임목사가 신임 장로들과 상견례를 겸한 첫 당회라서 유난히 질서를 강조했으리라고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불편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저 ‘똘마니’처럼 졸졸 따를 줄 알았던 신임장로의 태도에서 어딘지 모르게 뻑뻑한 분위기를 감지한 담임목사는 마음을 다잡고는 연거푸 ‘군기 당회’를 열었다. 계속해서 당회장인 자신이 교인들의 ‘영적 아버지’라고 강조하며...

마침내 세 번째 당회가 열리는 날, 그 장로가 결국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목사의 주장에 반기를 들었다.

“너희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마23:9) 장로는 이 말씀이 곧,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라는 뜻이 아니냐고 목사에게 물었다.

하지만 목사는 그런 질문이 나오리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장로를 꾸짖었다. “어떻게 장로쯤 돼서 영적 아버지라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한 구절만 알고, 더욱 중요한 다른 구절들은 모르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자신이 사도 바울인양, 목사는 장로들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성경을 펼쳐들고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후서를 거침없이 읽는다.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고전4:17)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딤전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딤전2:2)

한국교회에서 목사하고 논쟁해서 이길 수 있는 장로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여전히 미덥잖았지만 성경지식이 빈약한 장로로서는 성경구절을 조목조목 들이대며 자기 주장을 펼치는 목사와 더 이상 논쟁할 수가 없었다.

목사는 성경에 기록된 바울과 디모데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 자신만만하게 설명했지만,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너희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바울과 디모데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 외에도 실제로 영적인 아버지가 존재한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땅에 있는 어떤 자에게도 영적인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

우리는 성경의 바른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모순처럼 보이는 두 구절의 실제 의미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미리 강조하지만, 성경을 읽는 자의 자의적인 해석에 오류가 있을 뿐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결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형제들 사이에서 어떤 자인들 – 설령 사도라 할지라도 - 감히 영적인 권위를 과시하면서 스스로 ‘높은 자’가 되려 하지 말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 “너희는 다 형제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즉, “다 같은 형제로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특별히 우월한 존재로서 영적인 아버지가 있을 수 없다”라는 명백한 가르침이다.

반면에 노년의 바울이 젊은 디모데를 ‘참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리고 전혀 다른 의미에서 ‘아들’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사도로서 특별한 영적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믿음이 부족한 어떤 신자에게 영적 아버지의 특별한 지위를 강요한 것이 아니라,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이미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자리잡은 디모데에게 아버지같은 특별한 애정을 보인 것이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행16:2).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구절을 논거로 내세우면서 ‘영적 아버지’라는 지위를 심지어 목사에게까지 일반적으로 적용시키려면 무엇보다 먼저 바울이 디모데뿐만 아니라 바울이 전도한 모든 교인들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렸어야 하지만, 성경 전체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바울은 디모데 외에 어떤 누구에게도 ‘영적 아버지’로 자처하지 않았다.

요컨대 바울은 영적인 주종, 또는 상하관계에서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나이 어린 디모데에게 친밀한 이름으로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제부터는 물만 쓰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생각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마셔라”(딤전5:23)

바울이 디모데에게 느낀 ‘아버지’의 친밀한 감정은, 병이 있는 디모데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주께서 엄히 금하셨던, ‘높아지려는 자’, ‘섬김을 받으려는 자’, ‘으뜸이 되려는 자’의 계급적인 의미가 아니며, 이른바 일부 목사들이 교회의 위계질서를 세운다는 허튼 명분으로 내세우는 ‘영적 아버지와 아들의 수직관계’가 결코 아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주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께로부터 특별한 영적권위를 부여받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지니신 ‘죄사함’의 권세를 부여받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특별한 신적 권위를 부여받았지만, 사도들은 한 순간도 신자들 앞에서 속된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자신에게 무릎 꿇었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베드로 사도가 겸손히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이튿날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다가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그를 맞이하며 발 앞에 엎드려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세우며 이르되, ‘나도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며...”(행10:24-26)

반면에, 목사들이 스스로 ‘영적 아버지’라고 자처하는 의도는 교인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목사 성직자’와 열등한 ‘평신도’를 제멋대로 구별지으면서 절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목사라는 거창한(?) 직함에 스스로 현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얼빠진 인간들이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미국의 한인교회에서도 젊디젊은 목사가 나이든 교인들 앞에서 ‘영적 아버지’ 행세를 하며 버젓이 목회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아마, 장소에 상관없이 유교적 가부장의식에 사로잡힌 한인 목사들의 꼴불견이 세상 곳곳에서 추태를 보이는 것이다. 젊디젊은 목사의 입에서 감히 어른 교인들을 모신 자리에서, “목사인 나는 영적인 아버지이다. 아버지를 따르듯이 모든 성도는 나를 따르고, 내 말에 복종하라”라고 말할 정도라면... 이미 그는 ‘온유와 겸손’으로 주의 사역을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40대의 젊은이가 60-70대의 어른들에게 감히 “내가 당신들의 아버지요!”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도대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청컨대, ‘아버지’라는 소중한 이름을 함부러 들먹이지 말라. 세상의 아버지는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자식들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는 아름다운 이름이며, 하늘 아버지는 우리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제물로 바치신 거룩한 이름이다.

‘영적 아버지’를 자처하는 목사들에게서 아버지의 아름다운 희생을 본 적이 있었던가...? 목사는 바울에 빗댈 수 있는 사도가 아니며, 어떤 논리를 내세운들 영적 아버지가 아니다. 영적인 형제로서 다른 형제들을 섬겨야 하는, ‘종 된 형제’가 목사의 정확한 자리다.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자. 작가.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며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단순한 열정,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신이 된 예수, 루나의 예언, 자연법의 신학적 의미, 예수의 역사와 신성 외 다수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아르케 처치'에서 성경강의 및 번역, 출판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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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2014-07-09 16:23:19
제가 보기엔 이것도 유교사상에 젖어있는 생각 같습니다만...? => 40대의 젊은이가 60-70대의 어른들에게 감히 “내가 당신들의 아버지요!”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도대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사도바울은 높고 목사는 낮다라는 원리도 앞에 쓰신 글에대한 스스로의 반론 같습니다만...?

허경조 2014-07-08 00:45:20
정확한 지적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혼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목사와 장로에 대한
정확한 일에 대한 구분이 필요한데 혹시 이에 대한 글을
쓰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gibyul 2014-07-07 12:10:04
누구든지 직분에 대하여 잘못 인식하고 있으면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