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부끄러움
  • 최태선
  • 승인 2014.07.15 10: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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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목사들, 진리를 향한 몸부림 필요해

한 기독교 매체에서 부목사에 관해 취재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익히 알고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군대식 상명하복, 일시적 소모품, 고용 불안, 복지의 사각지대, 암울한 미래, 최저 생계비에 못 미치는 봉급 등등의 단어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암담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신대원에 입학한 젊은이들이 높은 현실의 벽에 부딪힙니다. 그들은 자신이 주님과 복음을 위해 이미 생명까지도 바쳤다고 믿고 결기를 부리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거짓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을만큼 마음의 각오가 남달랐습니다.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남다른 헌신으로 주변 사람들의 인정도 받았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땅끝까지라도 달려갈 각오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이런 곳이 복음이 말하는 참된 교회인가? 처음에는 고민도 많이 합니다. 현실에 무릎 꿇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는 깨달음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마음과 태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3년도 안 되어 그런 마음은 모두 사라지고 현실에 순응한 누구보다 세속적인 욕망에 가득 찬 사람들로 변합니다. 세상의 일반 사람들보다도 더 권력을 탐하고 성공에 굶주린 자들이 됩니다. 물론 자신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젠가는 자신의 뜻대로 목회할 날을 고대하며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적응하고 젖어들어갑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능력을 과시하고, 경쟁의 물결에 휩쌓인 싸움꾼들로 변해갑니다. 그렇게 그들은 복음과 결별했는데 비극은 그렇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정작 본인들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힘든 관문을 둟고 담임 목사가 된 부목사들은 자신이 받았던 과거의 부당한 대우를 기억하고 자신의 부목사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들은 단지 독재자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좋은 목사, 인격적인 목사로 추앙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과연 복음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겨우 그 정도일까요? 단지 부목사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존경을 받을만한 목사상이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목사들이 존경을 받고 아무도 주목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독교와 교회는 총체적으로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 좋은 교회라고 소문난 교회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그곳에 복음이 가지고 있는 혁명적인 변화의 힘이 역동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곳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고,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 같지만 막상 그들 가운데 예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거나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이들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헛똑똑이들은 넘쳐나지만 복음대로 살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이들은 사라진 죽은 교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의 간판을 내걸고 여전히 성업중입니다.

부목사들의 처우 개선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 만일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가 된다면 부목사들의 처우에 대해 언급할 이유 자체가 사라질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담임목사는 부목사를 동역자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귀하게 여기게 될 것이며 자신이 봉급을 못 받아도 부목사들의 생활에 책임을 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오늘날은 담임 목사가 부목사와 같은 수준의 사례비만 받아도 교인은 물론 세상의 인정을 넘어 칭송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초기 교회는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재물을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동등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사랑한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세상이 변했다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물론 세상은 변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빈부격차가 심해진 오늘날 복음은 더욱 혁명적이고 과격한 변화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독재자들의 철옹성이 되어버린 교회 안의 부목사들의 처우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을 박차고 나와 진리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부목사들의 의지와 결단을 촉구해야 합니다. 희생과 헌신의 결단은 부당한 현실에 저항함은 물론 진리를 향한 몸부림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 하나가 생각납니다.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시인의 고백에서 시인의 슬픈 감정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과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그의 고백은 자신이 어렵게 쓴 시도 인생에 비하면 너무도 쉬운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생은 어려운 것입니다.

사실 그가 살던 시대는 시대 자체가 암울했습니다. 일제 치하 속에서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뒤셖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목숨을 버릴 각오로 일제와 맞서 싸우던 독립투사들과 당당하게 일본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변절자가 되더라도 글을 써야 했습니다. 아니 글을 쓰기 위해서는 변절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상황이 오늘날 교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속에는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기회를 기다리며 자신의 의지를 꺾고 당당하게 경쟁의 대열에 서서 진리 아닌 길을 달려가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룹니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암울하고, 모두가 그런 것처럼 보여도 복음대로 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 안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모두 변절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박차고 나올 용기와 결단을 촉구하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어려운 나라사정을 뒤로 한 채 덤덤하게 학교에 나가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라는 공통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그러한 자신을 부끄럽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의 시에서 똑같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살겠다고 몸부림치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흘려듣고 있는 것입니다. 변절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부끄러움을 느끼기는 커녕 얼마든지 더 변절할터이니 그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라고 채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를 읽으며 또 한 번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건 그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절망적인 "어둠" 뿐이지만 "등불"과 "아침'이 있습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절망과 고통, 무기력한 나날들이지만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변하여 선이 되리라는 믿음과도 같은 확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의 강한 의지가 또 다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부목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확신과 강한 의지입니다.

"쉽게 씌어진 시"에서 시인의 순수함을 봅니다 그 순수함은 모든 것을 이겨내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복음의 시를 써나가는 부목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듯 싶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30b)

최태선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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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ckim116 2014-07-29 11:58:15
최근에 아주 흥분할만한 소식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는 강 만원 선생님으로부터 페북 개혁 포럼의 란을 통하여 들었습니다. 앞으로 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겠지만 우선 새로운 양상의 교회상을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원형 교회, 아르케 처치(Arche Church)이란 것입니다. 이 교회는 제가 듣기론 Global church도 될수 있고 또한 Local Church 즉 Internet을 통한 Online Church 혹은 소수의 형제 자매들이 모여서 한 공동체로서 신앙 생활을 할수 있는 가정 교회같은 형식으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뭉쳐 하나되고 서로 섬기며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구제하고 말씀을 서로 배우며 영적 싸움에서 승리 할수 있도록 말씀의 검을 차고 사단의 무리들을 물리치며 나아가서는 전도와 선교활동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여 천국을 확장하고 억지로도 말며 인색하지도 않게 헌금하여 그 모인 재력을 대부분 이웃을 돕고 전도와 선교하는데 사용할수 있는 좀 색다르면서도 초대 교회의 장점을 따서 결국은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 그리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며 칭찬하시는 교회가 바로 "아르케 교회"라는 것입이다. 현제의 부패한 교회를 대치할수 있고 가나안 성도들이 같이 동참할수 있는 새롭고도 원형적인 아름다운 교회를 꿈꿀수 있는 교회가 바로 아르케 교회란 것입니다.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교회상이 멀지않아 세상에 밝혀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