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 이국진 목사
  • 승인 2014.07.29 23:3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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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국진 목사 ⓒ <뉴스 M>

우리를 파멸로 이끌기 위해 사탄이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불신(不信)이다. “나누어 정복하라(Divide et impera)”라는 병법(兵法)을 사용하기 위해, 사탄은 우리 가운데 불신을 심어놓고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적으로 간주했다. 골리앗을 무찌르면서 일약 이스라엘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다윗을 보면서, 사울은 자신의 자리가 위태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의 평생을 다윗을 죽이는 일에 매달렸다. 만일 사울이 다윗을 신뢰하고 자신의 충신으로 활용하며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게 만들었다면, 사울은 아주 훌륭한 업적을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과 함께 동역하면서 함께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사울에게 있어서 다윗은 동역자가 아니라 경쟁자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원수였을 뿐이다. 결국 사울은 나쁜 왕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블레셋 민족이 그일라를 침공했을 때, 왕으로서 그들을 보호하고 구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속수무책이었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권이 되고 말았다. 반면 사울은 다윗을 죽이는 일에는 열정을 보였다. 왕으로서 백성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일한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필요하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동반자로 생각하고 서로 양보하고 감싸주면서 가정을 세워나가야 한다. 아쉬운 것은 종종 우리는 사탄의 이간질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많다는 점이다. 남편이나 아내를 동지로 보지 않고 철천지원수로 대하라는 사탄의 소리 말이다. 반려자로 인정하고 함께 노력한다면 좋은 가정,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데, 서로를 원수로 규정하는 순간 가정은 파괴되고 마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성도와 성도 사이에,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시기와 반목이 일어나고 마치 철천지원수인 것처럼 싸우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서로가 동역자로 생각하고 함께 부족한 것을 덮어주며 같이 영적인 성숙을 위해 나아갔더라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쉽게도 사탄의 이간질 전략에 말려든 것이다. 

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함께, 같이 살아가야 할 운명 공동체다.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관점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적대시하며 원수처럼 여기고 서로를 죽이려한다면 피차 망하게 될 것이다. 서로 포용하면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좋은 나라를 만들어가려는 마음의 태도가 아쉽다. 

국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지금은 저 중동 지방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적대시하고 싸우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비난을 하면서 말이다. 물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큰 잘못이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단순한 양비론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 원수처럼 생각하며 싸우다가 함께 망하는 것보다 함께 동역자가 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다윗은 사울을 향해서 속담을 인용하며 이렇게 외쳤다.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고 말이다(삼상 24장 13절). 그렇다. 내가 상대를 악한 존재로 생각하고 없애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은 내가 악인이기 때문에 나오는 생각일 뿐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말은 그런 점에서 진리이다. 상대방이 너무 나빠 보이는가? 그건 내가 그만큼 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울에게 악으로 악을 갚지 않았다.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씩이나 주어졌지만, 자신의 손을 들어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의로운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래서 다윗은 망하지 않았다. 만일 다윗도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고 같이 서로 죽이려 들었다면, 함께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원수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기름을 부음을 받은 자’로 보았다. 그런데 결과는 사울이 이긴 것이 아니었다. 결국 사울은 망했고, 다윗은 이겼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상대를 제압하고 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 스스로 확보하지 않으면 망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 반대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바보처럼 사는 것이 승리하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이려드는 자들에게 항거 한 번 하지 않고 무참히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같지만, 결국 부활하셔서 승리하셨다.

이국진 목사 / 남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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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2014-08-01 05:44:25
본문의 요지는 무엇인지요?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요. 댓글의 Philip Im 님 말씀이 보다 더 명확한 성경적 함의를 갖고 있네요.

Philip Im 2014-07-30 04:38:35
악은 악인에게서 납니다. 맞습니다. 악을 행하여서 악인이 아니라 악인이기 때문에 악을 행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악인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이 속담을 인용한 것은 자신이 악인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린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자를 우리는 의인이라 합니다.

삼상24:12-15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윗이 자신의 손으로 사울을 해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각은 사울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글처럼 '상대방이 나빠 보이므로' 다윗이 악한 자입니까?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무조건 상대를 나쁘게 보는 것도 잘못이지만 나쁜 것을 나쁜 것으로 보지 못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다윗은 의인이기 때문에 악인처럼 행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판단하지만 악인이 아니며 악으로 갚지 않았기 때문에 악인이 아니며 악에 대하여 선으로 응대하였기 때문에 악인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의지한 의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그것이 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 또한 악입니다. 누룩이 온 교회에 번지는 것을 보면서 경고하지 않으면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대해야합니다. 어떻게? 참 어려운 질문이며 그런 상황에 다다르면 무엇이 악한 일이며 선한 일인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혹은 지난 후 깨닫고 더 나은 선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